윤여동설 - 당 태종이 고생하며 건넌 “요택(요동늪)”을 찾았다 - 최초공개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와 철군할 때 고생 하며 건넜다고 전해지는
요택(요동늪)은 과연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은 요택이 지금의 요하 하류의 저습지를 말한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는 엉터리 중의 엉터리 주장이다.
왜냐하면 고대의 요수는 지금의 요하를 말하는게 아니라 북경 서쪽을 흐르는 영정하이었고, 북경 부근이 옛 요동군이었기 때문이다.
서기 645년 당 태종의 고구려 침공 기록을 보면,
이때 당 태종은 정주(定州)에서 출발하여 요동을 향하여 가다가 (필자주 : 이때 갈석산에도 올랐다고 한다) 요택(요동늪)을 통과하고, 요수(遼水)를 건너 요동성에 도착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학자들은 이러한 기록을 해석하기를 이때 당태종이 지금의 정주를 출발하여 동북쪽으로 향하여 북경을 지나고, 산해관을 넘고, 요하를 건너 요동성에 도착했을 것이라고 하는데, 이는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을 한반도의 평양이라 생각하고 이러한 주장을 펼치게 되었을 것이지만, 이는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사실 당시 고구려의 평양성은 지금의 북경 동북쪽 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반도의 평양이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이었고 요하가 옛 요수로서 그곳이 고구려와 당나라의 국경이었다면, 당 태종은 군사들을 요하에서 가까운 지금의 요녕성 호로도시 또는 금주시(錦州市) 부근에 집결시킨 후 출발했을 것인데, 당 태종은 2천리도 더 멀리 떨어진 정주에서 출발시켰다고 하기 때문이다.
이는 정주 부근이 고구려와의 국경에서 가까운 곳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고, 앞서 수 양제 역시 고구려를 침공할 때 군사들을 정주에서 별로 멀지 않은 탁군에서 출발시켰기 때문에 그 부근이 당시 고구려와 수. 당의 국경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때 당 태종은 정주에서 동북쪽으로 향하여 요동성(지금의 북경)을 향하여 진군했다.
그런데 기록을 보면 요택(요동늪)은 진창길이 200여리(필자주 : 200여리중 80리 정도는 통행이 전혀 불가능하고 나머지는 늪지대이기는 하지만 통행할 수는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에 이르고 요수를 건너기 전에 바로 위치했던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지금의 북경 서남쪽 영정하 부근을 말하는 것으로서 지금도 저습지가 많다.
전한서 권28하지리지 제8하요서군 조를 보면, 요서군에 소수가 48개나 흐른다고 하였는데, 이 기록은 요서군 즉 지금의 영정하 하류 서쪽 부근에 대한 기록인데, 요택을 지나면 바로 요수가 있었고, 요수를 건너면 바로 요동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 수 양제가 고구려를 침공할 때는 탁군에서 출발했고, 당 태종은 정주에서 출발했는데, 그들의 1차 목적지는 똑같이 요동성을 향하여 가는 것이었으므로 요택에 진창이 항상 형성되어 있었다면 수 양제 때도 그 요택(요동늪)을 지나야 요동성에 도착할 수 있었을 것인데, 수 양제 때는 그러한 기록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아마 수양제가 고구려를 침공했던 612년에는 날씨가 가물어 진창이 형성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참고로 자치통감에 기록되어 있는 당 태종의 철군 기록을 보면,
당 태종은 안시성을 함락시키기 위하여 60일 동안 연인원 50만 명의 품을 들여 안시성 옆에 흙산을 쌓기도 했으나 결국 안시성을 함락 시키는데 실패하고 철군을 명령하게 되는데, 이때가 서기 645년 음력 9월 18일 계미일이었다.
그런데 이틀 뒤인 9월 20일 을유일에 요동에 도착하고, 다음 날인 9월 21일 병술일에 요수를 건너는 것으로 보아 안시성은 요동성에서 이틀거리 밖에 떨어지지 않은 아주 가까운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는 요수를 건너자 바로 요택이 있었고, 열흘간에 걸쳐 요택 진창길을 메우면서 행군하여 10월 초하루 병신일에 발착수(渤錯水)를 건너게 되고, 10월 11일 병오일에 영주(營州)에 도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당 태종이 고생해 가면서 건넜다고 기록이 확실하게 전해진 요택을 정확히 찾을 수 없었던 것은 기본적으로 북경 부근을 말하는 요동군, 요동성의 위치를 전혀 엉뚱한 지금의 요하 동쪽에서 찾으려 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