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카테고리 없음

윤여동설 - 위만조선은 중국 하북성 난하를 중심으로 존재했던 나라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12. 1. 00:10

윤여동설 - 위만조선은 중국 하북성 난하를 중심으로 존재했던 나라 - 최초주장

 

 

 

  우리는 싫든 좋든 위만조선의 역사를 알아야만 한다.
  그것은 위만조선의 역사가 우리 역사의 한 장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고, 특히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한사군이 설치되었기 때문에, 위만조선의과 한사군을  빼버리고는 우리 고대사 역사의 현장을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그 위만조선이 과연 어디에 위치했던 나라였는지, 한사군이 어디에 설치되었었는지 지금까지도 명쾌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으니 매우 난감한 일이다.
  역사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역사의 현장이 어디였는지를 찾는 일인데, 고조선, 위만조선으로 이어진 그 역사의 현장이 어디인지를 확실히 알지 못하고 있으니 우리의 역사연구는 시작부터 장벽에 가로막혀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그 장벽을 허물고 역사의 현장을 밝혀야만 한다.

 

삼국유사 위만조선 조를 보면,

 

  전한서(前漢書) 조선전(朝鮮傳)에 이르기를,
  "연(燕)나라 때부터 진번조선[안사고는 말하기를, 전국시대에 연나라가 처음으로 이 땅을 침략해서 차지했다고 했다. 필자 주 : 위략에는 조선 서쪽 2천여 리를 빼앗아 만반한(만번한)을 국경으로 삼았다고 했다]을 침략해서 이를 차지하고, 관리들을 두어 변방의 요새를 쌓았다.
  그 뒤에 진(秦)이 연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땅을 요동군(遼東郡) 변방에 소속시켰다.   
  한(漢)나라가 일어나자 이 땅이 너무 멀어 지킬 수 없다 하여 다시 요동의 옛날 요새를 수리해서 쌓고 패수(浿水, 필자 주 : 살수의 오기일 것이다)로 경계를 삼아[안사고는 말하기를, 패수는 낙랑군에 있다고 했다] 연나라에 소속시켰다.
  연나라 왕 노관이 한(漢)나라를 배반하고 흉노에게로 들어가니, 연나라 사람 위만(魏滿: 衛滿의 오기일 것이다)도 무리 1,000여 명을 모아 요동의 요새지를 넘어 도망하여 패수[필자주 : 요수의 오기일 것이다]를 건너 진(秦)나라의 옛 빈 터전인 상하장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
  차츰 진번조선의 오랑캐들과 또 옛날에 연(燕)과 제(齊)에서 망명해 온 자들을 자기에게 소속시켜 왕이 되어 왕검[王儉; 이기는 땅이름이라 했고, 신찬은 말하기를 왕검성은 낙랑군 패수 동쪽에 있다고 했다]에 도읍했다.       
  위만은 군사의 위력으로 그 이웃의 조그만 읍들을 침략하여 항복시켰다. 
  이에 진번과 임둔이 모두 복종해 와서 그에게 예속되니 사방이 수천 리나 되었다.
  위만은 아들에게 왕위를 전하고 손자 우거[안사고는 말하기를, 위만의 손자 이름이 우거라고 했다]에 이르렀는데, 진번(眞番)과 진국(辰國)이 한나라에 글을 올려 천자를 알현하고자 했으나 우거가 길을 막고 지나지 못하게 했다[안사고는 말하기를, 진국은 진한이라고 했다]. 
  원봉(元封) 2년(B.C.109)에 한나라에서는 섭하를 보내어 우거를 타일렀지만 우거는 끝내 명령을 받들지 않았다. 
  섭하는 그곳을 떠나 국경에 이르러 패수에 당도하자 말을 모는 마부를 시켜 자기를 호송하러 온 조선의 비왕(裨王) 장[長; 안사고는 말하기를, 장은 섭하를 호송하는 자의 이름이라고 했다]을 찔러 죽이고는 곧 패수를 건너 달려서 변경 요새를 넘어 자기 나라에 돌아가 이 사실을 보고했다.
  한나라 천자가 섭하를 요동동부도위(遼東東部都尉)에 임명하자 조선은 섭하를 원망하여 불시에 그를 쳐죽였다.
  천자는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을 보내서 제(齊)에서 발해(渤海)에 배를 띄워 조선을 치게 하니 병력은 5만이었다. 
  좌장군(左將軍) 순체는 요(遼, 필자 주 : 지금의 산서성 좌권 부근 지역이 원래의 요였다)에서 출발하여 우거를 쳤다. 
  우거는 지세가 험준한 곳에 군사를 배치하고 그를 막았다. 
  누선장군은 제(齊)의 군사 7,000명을 거느리고 먼저 왕검성(王儉城)에 이르렀다. 
  이때 우거는 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누선의 군사가 얼마 되지 않는 것을 정탐해서 알고는 곧 나가서 누선을 공격하니 누선이 패해 달아났다. 
  누선장군 양복은 군사들을 잃고 산 속으로 도망해서 죽음을 면했다. 
  좌장군 순체도 조선의 패수 서쪽을 쳤지만 깨뜨리지 못했다.
  천자는 누선장군과 좌장군의 형세가 이롭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이에 위산을 시켜 군병의 위력을 가지고 가서 우거를 타이르게 했다. 
  우거는 항복하기를 청하고 태자를 보내어 말을 바치겠다고 했다. 
  그리하여 1만여 명이나 되는 병력을 거느리고 바야흐로 패수를 건너려 하는데 사자(使者)인 위산과 좌장군은 혹시 (조선군이) 변을 일으킬까 의심하여 태자에게 '이미 항복하였으니 병기(兵器)는 버리라고 하시오.'하였는데, 태자도 사자인 위산이 혹시 자기를 속여 해치지 않을까 의심하여 마침내는 패수를 건너지 않고 군사를 데리고 돌아가 버렸다.  
  이 사실을 천자에게 보고하자 천자는 위산을 주살했다.  
  좌장군은 패수 상류에 있는 조선 군사를 깨뜨리고 바로 전진하여 왕검성 밑에까지 이르러 성의 서북쪽을 포위했다. 
  누선장군도 역시 왕검성 밑으로 와서 군사를 합쳐 성 남쪽에 주둔했으나 우거가 굳게 성을 지켜 몇 달이 지나도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천자는 이 싸움이 오래 되어도 끝이 나지 않자 옛 제남태수 공손수를 시켜서 치게 하고, 모든 일을 편의에 의해서 처리하게 했다. 
  공손수는 우선 누선장군을 묶어 놓고 그 군사를 합쳐서 좌장군과 함께 급히 조선을 공격했다. 
  이때 조선의 상(相) 노인(路人)과 상(相) 한도(韓陶)와 또 이계(尼谿)의 상(相) 삼(參)과 장군(將軍) 왕겹[안사고는 말하기를, 이계는 지명으로 이들은 모두 네 명이라고 했다]은 서로 의논하여 항복하려 했으나 왕은 이 말을 좇으려 하지 않았다.
  이에 한도와 왕겹은 모두 도망쳐 한나라에 항복했고 노인은 도중에서 죽었다.
  원봉(元封) 3년(B.C.108) 여름에 이계(尼谿)의 상(相) 삼(參)은 사람들을 시켜서 우거왕을 죽이고 한나라에 투항했다. 
  하지만, 왕검성은 아직도 함락되지 않았고, 우거의 대신인 성이(成已)가 또 (한나라에) 반했다. 
  좌장군은 우거의 아들 장(長)과 노인(路人)의 아들 최(最)로 하여금 자기들의 백성을 회유하여 성이를 죽이도록 했다. 
  이리하여 마침내 조선을 평정하고 진번·임둔·낙랑·현토의 네 군으로 만들었다고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 위만조선 조의 내용이 전한서 조선전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기 때문에 대략적으로는 비슷한 내용이지만 전한서 조선전에는 일연이 빼버린 다른 사실들까지도 들어 있어 위만조선의 역사를 연구하려면 반드시 전한서 조선전 원문을 전부 읽어보아야 한다.


 

  그런데 이 기록들 속에는 지금 우리로서는 설명할 수 없는 기록들이 많이 들어 있다. 즉 진번조선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었길래 연나라가 그 땅을 빼앗아 차지한 후 요새를 쌓았고, 진(秦)나라 때 요동군의 변방에 소속시켰다고 하는지, 또 한나라 때는 그 땅이 너무 멀고 지키기가 어렵다 하여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해서 쌓고 그 땅을 포기하고 뒤로 물러나게 되었다는 것인지 또 요동과 요수, 패수가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지, 위만은 연나라의 어디에서 살다가 어느 길을 따라 조선으로 왔으며, 또 그가 망명해 와서 살았다는 상하장은 지금의 어디를 말하며, 또 어떻게 위만이 연나라, 제나라 망명자들을 규합하여 세력을 키워 왕검성에 도읍하고 왕위에 오를 수가 있었다는 것인지, 진번조선과 임둔이 어디에 위치했기에 그들이 복속해 와 위만조선의 강역이 사방 수천리가 되었다고 하는지, 또 진번과 진국(진한)이 중국을 가고자 하는데 어떻게 위만조선에서 길을 막고 가지 못하게 할 수 있었다는 것인지, 양복은 산동반도에서 위만조선을 정벌하러 가면서 왜 서해(황해)바다를 건너지 않고 발해에 배를 띄워야만 했는지, 그리고 위만조선이 멸망한 후 한사군은 과연 어디에 설치되었다는 것인지 의문 투성이인 것이다.

 

  그렇다면 한 조문 한 조문 차근차근 그 의문을 풀어나가 보자.

 

  조선왕 만(위만)은 연나라 사람이다.
  연나라 때부터 진번조선을 공략하여 귀속시키고 관리를 두어 요새를 쌓았었다. 진나라가 연나라를 멸망시키자 조선은 요동의 외곽에 속하게 되었다.
  한나라가 흥기하자 그곳이 멀고 수비하기가 어렵다하여 요동의 옛 요새를 다시 수리하고 패수까지를 경계로 정하여 연나라에 속하게 하였다.

 

  이때의 연나라란 진나라 이전의 춘추전국시대의 연나라를 말하는 것인데, 연나라는 지금의 하북성 보정 부근을 중심으로 번성했던 나라였다.
  삼국지에 인용된 위략에는 연나라가 진번조선을 침략해서 빼앗았다고 하지 않고, 진개를 보내 고조선 땅 서쪽 2천여리의 땅을 빼앗아 만반한(만번한)을 국경으로 삼았다고 했고, 한나라가 건국된 후에는 패수(浿水)가 아닌 추수( 水)를 국경으로 삼았다고 했다. [필자주 : 살수의 오기일 것이다]
  지금의 산서성 북부에서 동쪽으로 2천여리라면 지금의 북경 부근지역까지를 말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인데, 필자가 비정하는 만반한의 위치는 지금의 북경 동북쪽 밀운수고 부근 지역이다. 
  그런데 한나라가 흥기하자 그곳이 멀고 지키기가 어렵다 하여 요동 옛 요새를 수리해서 새로운 국경으로 삼았다고 했으므로 이는 진나라 말기의 어수선한 시기에 그 만반한 지역을 잃었으므로 한나라가 건국되자 국경을 후퇴시켜 새롭게 정했다는 말로 해석이 가능해 진다. 따라서 한나라 때는 진나라 때의 만반한 보다 더 서쪽으로 이동시켜 요수를 국경으로 삼았을 것이다.
  패수는 지금의 난하를 말하는 것으로서 북경의 동쪽에 위치하고, 요수인 영정하는 북경의 서쪽에 위치했으므로 한나라 초기 한나라와 고조선의 국경은 한나라에 가까운 요수이어야 이치에 맞고, 요동이란 지금의 북경 부근으로서 그 곳의 서쪽으로 요수로 비정되는 영정하가 지난다.   
  그렇다면 전한서의 패수(浿水), 위략의 추수( 水)는 요수(遼水), 살수(薩水)의 오기일 것이다.         

 

  연나라왕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들어가자 만도 1천여 명의 무리와 함께 상투(추결)를 틀고, 만이의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요새를 넘어 달아나 패수를 건너 망명하여 진나라의 빈땅인 상하장에서 살았다.
  점차 진번조선과 만이 그리고 연나라, 제나라에서 망명해온 자들을 모아서 왕이 되고 왕험(王險: 왕검성)에 도읍 하였다.

 

 
  위략에는 위만이 패수를 건너 고조선의 준왕에게 망명하고는 준왕을 설득하여 고조선의 서쪽 경계에 살았다고 했는데, 이는 고조선의 왕검성이 패수(지금의 난하)의 바로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망명을 요청하기 위해 패수를 건너갔다는 말일 것이다.
  그리고 이때 한나라와 고조선의 국경이 요수였을 것이기 때문에 위만이 살았다는 진나라의 옛 터인 상하장이란 옛날 연나라가 차지하고 있던 험독 지역을 말하는 것으로서 지금의 북경 서남쪽으로 비정할 수 있겠는데, 그 지역은 중국 세력이 고조선을 공략할 수 있는 길목에 해당하는 매우 중요한 곳이다.
  그런데 고조선의 준왕은 위만이 망명해와서 서쪽 변방에 살게 해주면 중국의 망명자들을 거두어 조선의 번병이 되겠다고 하는 감언이설에 속아 충성심이 검증되지도 않은 그를 믿고 총애하여 박사로 임명하고 나라 서쪽 변방 백리 땅을 영지로 주고는 나라 서쪽 변경 요충지의 방어를 위만에게 맡겼던 것인데, 이렇듯 잘못된 판단으로 인하여 준왕은 큰 화를 불러오게 되어 나라의 반쪽을 빼앗기는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
  이때 위만은 준왕으로부터 옛 만반한 지역을 얻어 살면서 옛날 진나라 말기에 연나라, 조나라, 제나라에서 망명해 왔던 유민들을 포섭하여 자기편으로 만들어 세력이 강해지자 준왕에게 사람을 보내 "한나라 군대가 열 군데 길로 쳐들어오고 있으니 왕궁에 들어가 왕을 호위하겠다"고 거짓말을 하게 된다.
  그런데도 준왕은 그것이 거짓말인지를 알지 못한 채 위만의 말만을 믿고 그를 왕궁으로 불러들이게 되는데, 군사를 이끌고 왕궁에 도착한 위만은 갑자기 돌변하여 준왕을 공격해 버리는 것이다.
  이때 준왕은 믿었던 도끼에 발등을 찍혔던 것이고, 아무 준비도 없이 졸지에 공격당한 준왕은 왕검성을 위만에게 내어줄 수밖에 없었고, 급히 좌우궁인들을 이끌고 도망쳐 남쪽의 마한 월지국(목지국이라고도 한다)으로 가서 그곳에 다시 도읍하고 마한, 진한, 변한을 합하여 국호를 한(韓)이라 하고 한왕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고조선 땅은 북쪽에는 왕검성에 도읍하고 있는 위만조선이 위치하게 되고, 그 남쪽에는 월지국(목지국)에 도읍한 한이 위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많은 사람들은 위만조선의 도읍이었던 왕검성(왕험성이라고도 한다)이 북한의 평양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고, 준왕이 도망쳐 다시 세운 한의 도읍 월지국을 전북 익산 지역이라고 말들하고 있다.
  우리가 지금 한반도에 살고 있으니 옛 위만조선도 당연히 한반도에 위치하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며, 준왕이 왕검성인 평양에서 좌우궁인을 이끌고 대동강을 타고 내려와 서해안을 타고 내려와 전북 익산 부근에 도착하여 다시 한을 세웠을 것이라고 역사를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틀린 것이다.
  고조선, 위만조선의 도읍 왕검성은 북한 평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부근을 말하는 것이고, 한(韓)의 월지국은 당산 풍윤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한나라 혜제와 여후 때에 이르러 천하가 처음으로 평정되자 요동태수는 만을 외신으로 삼고 약정을 체결하였는데 "만은 외신이 되어 요새너머의 만이들을 통솔하되 변경에서 약탈하지 못하게 하고, 여러 만이의 군장들이 천자를 만나기 위하여 입조하고자 할 때 그를 막아서는 아니된다" 하였다. 이를 듣고 천자도 허락하였다.
  이런 연고로 만은 병사와 재물로써 부근의 소읍을 쳐 항복 시켰다.
  진번, 임둔도 모두 복속하여 왔으므로 땅이 사방 수 천리에 이르렀다.
  (위만의) 왕위가 아들에게 전해지고 손자인 우거에 이르렀는데, 한나라 사람들이 많이 망명해 갔고 또 조선왕(우거)은 한나라에 입조하지도 않았으며, 진번과 이웃한 여러 나라가 천자를 알현하고 글을 올리려 하였으나 길을 막고 통과시키지 않았다.

 

 

   진번의 위치는 요녕성 능원 일원을 말하는 것이고, 임둔의 위치는 내몽골 고륜기 일원을 말하는 것이며, 진국(진한)은 요녕성 금주시(錦州市)일원을 말하는 것이다. 
  이때 위만조선의 강역이 사방 수 천리나 되었다고 하는데, 위만조선은 하북성 승덕시를 중심으로 남쪽으로 난하 반가구수고 부근까지, 동쪽으로 지금의 요하 부근까지, 서쪽으로 하북성 조하부근까지, 북쪽으로는 내몽골 서랍목륜하에 이르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