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우리 고대사의 의문을 밝혀 줄 윤여동의 난하중심설 - 최초주장
우리 고대사가 실제 이루어진 곳이 어디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모범답안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은 우리 고대 역사의 현장에 관한 한 아직 정설이 없고 가설만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가설이란 아직 검증되지 않은 개인의 의견이라 정의할 수 있으므로 우리 고대사가 이루어진 역사의 현장은 아직 정확히 찾지 못한 상태라 할 수 있다.
지금 우리 고대사의 현장이 과연 어디인가라는 질문에는 현격하게 다른 상반된 두 주장이 존재한다.
첫째는 한반도를 우리 역사의 중심지로 보고 해석하는 한반도중심설이 있고,
둘째는 발해 서북쪽 중국 하북성 난하를 중심으로 하는 그 부근 지역을 우리 고대사의 중심 강역으로 보는 난하중심설(윤여동설)이 있다.
한반도중심설은 주로 강단사학에서 주장하는 설로서 고조선으로부터 위만조선, 삼한, 삼국, 고려, 조선, 현재까지 한반도에서 그 유구한 역사를 이어왔다는 주장으로서 지금까지는 이 설이 정설행세를 했다.
난하중심설(윤여동설)은 환인, 환웅, 고조선으로부터 삼한, 삼국, 후삼국, 발해, 고려시대까지 우리 역사의 중심은 난하를 중심으로 하는 하북성, 요녕성, 북경, 내몽골 부근 지역이었는데,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된 후 도읍을 대륙의 개경에서 한반도의 한양으로 옮김으로써 한반도 서울이 우리 역사의 중심지가 되었고, 대륙의 땅은 명나라 또는 청나라에게 빼앗기게 되었다는 설인데, 현재 많은 사람들로부터 우리 역사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설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아마 머지 않아 이 설이 우리 역사의 정설이 될 것이다.
☆ 그 외에 고조선이 요하 또는 대릉하를 중심으로 번성하다가 중국 세력들에게 밀려 지금의 요동을 거쳐 압록강을 건너 북한의 평양으로 밀려들어오게 되었다고 하는 주장이 있으나 이는 위만조선 이후의 역사 해석이 한반도중심설과 대동소이하므로 논외로 하고, 또 중국 대륙 전체가 우리 고대사의 강역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이는 말이 되지 않으므로 논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한반도중심설은 고조선의 왕검성을 북한 평양으로 보고 역사를 해석한다.
그리하여 위만조선의 도읍 왕검성 역시 북한 평양이라고 함으로써 한 무제가 순체와 양복이라는 두 장군을 보내 위만조선을 칠 때 육군을 이끈 순체는 요하 부근에서 출발하여 압록강, 청천강을 건너 평양에 도착했고, 수군을 이끈 양복은 산동반도에서 동쪽으로 황해를 건너 대동강을 타고 올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지금의 북한 지역을 나누어 한사군을 설치했다고 이해하고, 대방군을 황해도 일원, 예(濊)를 강원도 일원, 동옥저를 함경남도 일원에 위치했던 것으로 역사를 이해한다.
그리고 기원전 194년 위만에게 왕검성을 빼앗기고 남하한 고조선의 준왕이 서울, 경기, 충청, 전라도 지역을 마한이라 하고, 경상북도 지역을 진한, 경상남도 지역을 변한이라 하여 그 삼한을 합하여 한(韓)이라 하고, 전북 익산 금마 부근에 도읍하고 한왕에 올랐고, 후일 마한에서 백제가, 진한에서 신라가, 변한에서 가야가 건국되었다가 신라가 당나라를 끌어들여 백제를 통합하고, 고구려까지 멸망시킨 후 패수 남쪽까지 차지했다가 고려, 조선으로 이어졌고, 현재에 이르렀다고 역사를 해석한다.
따라서 고려의 천리장성이 지금의 압록강 하류에서 동쪽으로 동해안에 이르렀고, 고려의 동북9성이 함흥 또는 길주 부근에 설치되었으며, 조선시대에 이르러 4군 6진을 개척함으로써 현재의 압록강, 두만강이 중국 세력과 우리의 국경선으로 굳어지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반면에 난하중심설(윤여동설)은 중국 문명보다 훨씬 선진화되고 앞선 홍산문화, 요하문명이 바로 우리의 환인, 환웅이 이룩한 문명이고, 고조선의 왕검성이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이며, 위만조선과 한사군은 하북성 북부와 요녕성 서부지역에 위치했었고, 삼한은 만리장성 부근인 당산, 진황도, 요녕성 서부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주장하며, 삼한의 후신인 삼국과 후삼국, 발해와 고려가 난하를 중심으로 하는 그 부근지역에 위치했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동옥저는 내몽골 옹우특기부근에, 예는 내몽골 고륜기 일원에, 말갈은 대흥안령에, 동부여는 내몽골 정람기 일원에 위치했으며, 요동군은 북경 일원, 대방군은 북경 동쪽 준화 일원에 위치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된 후 도읍을 대륙의 개경(하북성 승덕시 관성 부근)에서 한반도의 한양으로 옮기게 되어 서울이 역사의 중심지가 되었고, 그 후 대륙의 땅을 명나라 또는 청나라에게 빼앗기게 되었다고 역사를 해석한다.
두 주장이 조선시대 이전의 역사에 대하여 그 위치가 대륙과 한반도로 전혀 다른 것이다.
한반도중심설이 진실이라면 난하중심설은 거짓인 것이고, 난하중심설이 진실이라면 한반도중심설은 거짓말인 것이다.
둘 중에 하나는 틀림없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인데, 과연 어느 설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한반도중심설은 우리 모두가 학창시절 배운 이론이니 새삼스럽게 다시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인데, 그렇다면 윤여동은 왜 고려로부터 그 이전의 우리 고대역사가 중국 북경 동쪽 난하를 중심으로 한 그 부근 지역에서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며 "난하중심설"을 주창하게 되었을까?
윤여동은 지금 한반도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이 우리의 고대사 모두를 증명할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반도중심설 대로라면 최소한 한반도에서 삼국시대의 왕릉들이 다수 발견되어야 마땅한데 지금 남한에서 주인공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삼국시대 왕릉은 오직 백제 무령왕릉뿐이고, 신라 천년왕도라는 경주에서 신라왕릉이 한 기도 명쾌하게 확인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신라, 백제, 가야, 고구려의 수많은 왕과 왕비는 말할 것도 없고, 그 많은 왕자와 공주, 왕족과 호족들이 죽어 한반도에 묻혔다면 그들의 능과 묘가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이 마땅한데 그들의 능과 묘가 발견되지 않는 것은 그들이 한반도에 묻히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백제는 4세기 중반 대륙에서 근초고왕과 무광왕이 왕위다툼을 벌여 패한 무광왕이 한반도로 건너와 반도백제를 세움으로써 백제의 흔적들을 남기게 되었고, 무령왕은 바로 그 무광왕의 후손으로서 그 이복형인 동성왕 때 반도백제가 대륙백제를 흡수통합 한 후 대륙으로 건너가 대륙백제의 왕위에 올랐다가 시해 당하자 이복동생인 무령왕이 다시 대륙으로 건너가 왕위에 올랐다가 죽은 후 그 뼈를 간추려 한반도로 가져와 공주에 능을 조성했기 때문에 지금 충남 공주에서 무령왕능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중국 정사서들 속에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놓고는 해석할 수 없는 기록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에 - 사실은 전부이지만 - 역사서의 기록들 모두를 동시에 충족할 수 있는 위치를 찾다가 초기의 고구려가 하북성 승덕시 일원에(도읍 평양성은 하북성 승덕시 부근), 신라는 요녕성 금주시(錦州市)를 중심으로 하는 그 부근, 백제는 도산 남쪽인 난하중 하류부근, 가야는 산해관 동쪽 부근에 위치했음을 알아내게 되어 "난하중심설"을 주창하게 되었고, 그를 "윤여동설"이라 이름 붙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구당서 고(구)려전을 보면, "그 나라의 도읍은 평양성인데 한나라 낙랑군의 옛 땅이다. 장안에서 동쪽으로 5,100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시피 고구려의 평양성은 옛 고조선의 도읍 왕검성이었고, 위만조선의 도읍 왕검성이었으며, 낙랑군의 치소였다고 하는 곳이고, 당나라의 도읍 장안은 지금의 섬서성 서안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섬서성 서안에서 5,100리 떨어져 있었다는 고구려의 평양성이 과연 지금의 북한 평양을 말한다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삼국지 한전을 보면, "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다.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한계로 했고, 남쪽은 왜와 접했다. 땅이 방 4천리이다. 삼종이 있어, 마한· 진한· 변한인데 진한은 옛 진국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한이 방 4천리에 이를 정도로 넓은 강역을 가진 나라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섬서성 서안에서 한반도의 평양까지 5,100리 밖에 안 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고, 또 현재 남한의 면적이 사방 1천리 정도 밖에 되지 않는데, 한(삼한)이 방 4천리였다면 사방 1천리 땅에 방 4천리나 되는 한이 위치했다는 말이 되어야 하므로 한반도를 중심으로 역사를 해석할 경우 말이 되지 않는 기록이라는 것이다.
또한 기원전 128년에 한(漢) 무제가 예(濊)의 땅에 설치했다는 창해군이 강원도 일원이라는 기록 역시 이해할 수 없는 기록이며, 구당서 신라국전에는, "신라국은 본래 변한의 먼 후예이다. 그 나라는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과 남쪽은 모두 대해로 한정되어 있고, 서쪽은 백제, 북쪽은 고(구)려와 인접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경주에서 천년간 도읍했다는 우리의 신라가 어떻게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것인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이고, 또 신라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백제에 대해서도 남제서 백제국전에는, "이해(A.D.490)에 위(북위)나라 오랑캐가 또 다시 기병 수십만을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그 지역으로 쳐들어가니 모대(동성왕)가 장군 사법명·찬수류·해례곤·목간나를 보내 무리를 거느리고 북위의 오랑캐군을 기습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쳐부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한반도 남쪽에 위치했었다는 백제를 중국 대륙에 위치했던 북위의 수십만 기병이 어떻게, 무슨 이유로 그 위험한 바다를 건너 침공할 수 있었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낙랑군 수성현의 위치에 대하여 중국 사서들은 한결같이 "낙랑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고, 장성이 시작된 곳"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중국 사서들에는 또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신라가 위치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이는 우리의 신라가 한반도의 경주 부근이 아닌 지금의 진황도에 있는 갈석산 부근에 위치했었다는 말이 되고, 백제는 그 서쪽에, 고구려는 그 북쪽에 위치했음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백제는 마한의 동북쪽에서 건국된 나라였고, 신라는 진한에서, 가야는 진한의 남쪽에 위치했던 변한에서 건국된 나라이니 결국 삼한 역시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 위치했다는 것이다.
또한 고려의 위치에 대하여 서긍의 고려도경에는, "고려는 남쪽으로는 요해, 서쪽으로는 요수, 북쪽으로는 옛 거란, 동쪽으로는 금나라와 접해 있다. 그리고 일본, 유구, 담라, 흑수, 모인 등의 나라와 개의 이빨처럼 서로 맞물려 있다. 저 신라와 백제가 자신들의 영토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여 고려 사람들에게 병합이 되었으니 현재의 나주와 광주도가 여기에 해당된다.
고려는 우리 송나라 수도(당시 송나라의 도읍은 개봉으로서 변경이라고도 했다)의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연산도에서 육로를 거친 다음 요수를 건너 동쪽으로 고려 국경까지 가는데 모두 3,790리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서긍은 실제 1123년 고려에 사신 일행으로 왔다가 돌아가서 고려도경을 써서 송 휘종에게 바쳤고, 당시 송나라의 도읍은 지금의 하남성 개봉(開封)으로서 황하 남쪽에 위치하고 낙양의 동쪽이다.
그런데 하남성 개봉에서 동북쪽으로 연산도(燕山道 : 지금 북경 북쪽에 연산산맥이 있다)를 지나고 요수를 건너 동쪽으로 총 3,790리를 가면 고려에 도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개봉에서 하북성 관성현까지 893km로 나타나는데, 옛날의 1천리는 지금의 230km에 해당한다. 따라서 893km는 3,882리로 계산되는데, 고려도경에는 개봉에서 고려의 국경까지 3,790리라고 하였다]
고려가 한반도의 황해도 개성에 도읍하고 있었다면 개봉에서 지금 한반도까지의 거리가 3,790리였다는 말이 되는데, 이는 이해하기 매우 곤란하고, 또 고려도경은 고려의 위치에 대하여 "등주·내주·빈주·체주와 정확하게 마주보는 위치에 있다"라고도 기록하고 있는데, 고려는 도대체 어디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일까?
등주(登州)는 지금의 산동반도 묘도해협 남쪽 봉래 부근지역을 말하는 것이고, 내주(萊州)는 내주만이 있는 내주 지역을 말하는 것이며, 빈주(濱州)는 황하 하류지역을 말하는 것이며, 체주( 州)는 빈주 서북쪽의 무체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등주, 내주, 빈주, 체주는 동서로 나란히 위치한다. 따라서 이 등주, 내주, 빈주, 체주와 동시에 정확하게 마주보는 지역은 한반도의 황해도지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북쪽으로 발해건너 진황도 부근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인터넷 까페를 보면 가관인 글들이 많다. 옛 기록을 엉터리로 해석해 섬서성 서안이 고려의 도읍 개경이었다나? 그리고 고려태조 왕건릉이 사천성에 있다나? 고려의 강역이 신강, 서장자치구까지로서 만리대국이었다나? 이러한 엉터리 주장에 현혹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중국 세력들이 위만조선으로부터 고구려나 백제를 침공할 때 육군은 요동(현 북경 부근)에서 출발했고, 수군은 산동반도에서 출발하여 발해를 건넜다. 따라서 진·한 이후 역사적으로 산동반도 이남이 우리 강역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된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중국 대륙을 통일했다는 진(秦)은 어디 있었고, 한(漢)은 어디 있었으며, 수, 당, 송나라는 어디에 있었다는 말인지.........
다만 서쪽으로 태행산맥까지, 남쪽으로 하북성 한단, 맹자가 태어났다는 산동성 추성까지와 강소성 풍·패와 서주 부근까지는 옛날 동이의 강역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리고 어느 사람은 신라가 양자강 부근에, 백제가 산동반도 부근에 남북으로 위치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데, 역사적으로 백제와 신라는 동서로 위치했고, 당나라 때 소정방이 백제를 치기 위해 출발한 곳이 산동반도 내주만이었으므로 그러한 주장은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다.
고려도경은 우리의 고려가 한반도에 위치했었던 것이 아니라 중국 북경, 하북성, 요녕성 서부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서긍은 고려로 오기 위하여 지금의 절강성 영파(명주)를 출발하여 동북쪽으로 한반도를 향하여 항해했던 것이 아니라 사실은 북쪽으로 항해하여 산동반도를 돌아 발해에 진입한 후 발해를 서북쪽 방향으로 가로질러 건너 하북성 진황도 부근에 위치했던 고려에 갔었다는 말이 되는 것인데, 우리가 지금까지 고려도경의 기록을 잘못 해석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려시대 지도는 현재 한 점도 전해지는 것이 없는데, 이는 그 당시 제작된 지도를 국가 차원에서 일부러 없애기 전에는 이렇듯 한 점의 지도도 전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반면에 조선이 한반도 서울을 중심으로 500년 역사를 이었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고, 현재 한반도를 그린 조선시대 지도는 많이 전해지고 있으며, 서울에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이 있고, 도읍을 둘러 싼 성곽이 있고, 조선 태조 이성계의 능으로부터 마지막 왕까지의 능이 한반도에 있으니 더 이상의 확인은 불필요할 것이고, 특히 우리 개인들의 조선시대 조상 할아버지 묘소들도 한반도에 있으니 더 이상 무슨 증거품이 필요하느냐는 것이다.
이성계는 1392년 7월 왕위에 올랐고, 1393년 3월 조선으로 국호를 바꾸었고, 1394년 10월에 이르러 개경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우리는 이를 지금까지 한반도의 황해도 개성에서 서울로 도읍을 옮겼다고 역사를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려가 북경 동쪽 난하를 중심으로 한 대륙에 위치하고 있었음이 밝혀졌으므로 사실은 이때 이성계는 대륙의 개경에서 한반도의 한양으로 도읍을 옮겨 500년 조선왕조가 한반도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조선이 500년간 한반도에서 이루어졌으므로 그 앞 왕조인 고려도 당연히 한반도에서 존속했다고 믿게 되어 우리의 고대사 전부를 한반도를 중심으로 해석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강은 이렇다.
이것이 사실일 경우 우리는 지금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 하는 것일까?
잃어버린 대륙의 옛 땅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그냥 한반도를 중심으로 거짓으로 역사를 해석하고 그렇게 후손들에게 전해주어야 하는 것일까?
중국은 동북공정에, 탐원공정에, 청사공정에 자신들의 역사 강역을 넓히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우리는 뒷짐지고 눈 뻔히 뜨고 우리의 역사 강역이 중국의 손아귀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야 하는 것인가?
필자는 우리나라에 깨우친 역사학자가 없음을 매우 안타까워한다.
눈을 들어 대륙을 보지 못하고 온갖 쓸모없는 논리를 내세워 우리의 역사를 어떻게 하든 한반도 내로 고착시키려고 안달하고 있는 역사학자들이 과연 제정신이 있는 것인지 묻고 싶다.
앞으로 불과 몇 십년 후에는 유물, 유적이 우리 고대사의 난하중심설을 명명백백 밝혀 줄 것인데, 그때가 되어도 한반도중심설을 그대로 주장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