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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백제 부흥운동의 중심 주류성(周留城)과 임존성(任存城)의 위치 찾기 - 최초공개

윤여동 2014. 10. 4. 21:36

윤여동설 - 백제 부흥운동의 중심 주류성(周留城)과 임존성(任存城)의 위치 찾기 - 최초공개

 

 

  백제 부흥운동의 중심성이었던 주류성과 임존성은 과연 지금의 어디에 위치하고 있었던 성일까?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조를 보면,

  “무왕의 조카 복신이 일찍이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이때에 중 도침과 함께 주류성(周留城)에 웅거하며 반하였다.

  옛 왕의 아들로서 왜국에 볼모로 갔던 부여풍을 맞아들여 왕으로 삼으니 서북부에서 모두 호응하매 군사를 이끌고 사비 도성에 있는 유인원을 포위하였다.

  당나라에서 조서를 내려 유인궤로서 검교대방주자사를 삼아 왕문도의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군사를 적당하게 발동시켜 유인원을 구원하게 하니........(중략).........인궤가 군사를 엄숙하게 통제하여 싸우면서 전진하여 오므로 복신 등이 웅진강구 양쪽에 목책을 세워 그들을 막았는데, 인궤가 신라군사와 협력하여 치매 우리(백제부흥군) 군사들이 퇴각하여 목책 안으로 뛰어들어 올때에 물에 막히고 다리가 좁아 물에 빠지고 전사한 자가 1만여명이었다. 이리하여 복신 등이 도성의 포위를 풀고 물러와서 임존성(任存城)을 보존하고 있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 우리는 이 기록 속의 주류성과 임존성의 확실한 위치를 찾지 못하고 사람마다 주장마다 이곳이다 저곳이다 하면서 논란만 많은 형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역사학자라는 사람들은 백제의 마지막 도읍 사비성을 지금의 한반도 충남 부여라고 하면서 한반도에서 주류성과 임존성을 찾으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 충남 부여는 사비성이 아니라 무광왕이 세운 반도백제의 도읍이었던 거발성이었고, 충남 공주는 반도백제의 고마성이었다.

  지금까지 전혀 엉뚱한 곳에서 주류성과 임존성을 찾고 있었으니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사실 진짜 사비는 한반도 충남 부여가 아니라 지금의 중국 하북성 당산시 난현(난주)이었다.

  따라서 진짜 사비성인 하북성 당산시 난현(난주)에서 서북쪽 방향으로 가면 천서방향이고 그 부근은 아주 높은 산악지역으로서 경충산, 요대산, 계운산, 유산, 평정산, 청룡산 등이 있고, 청룡산 북쪽 산맥을 넘는 길이 그 유명한 차현(車峴)이었다.

 

☆ 차현(車峴)은 고려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 제8조에 언급되어 있는 고개이다.

 

  백제 부흥운동의 중심성이었던 주류성과 임존성은 차현 북쪽 산악지역에 위치했었던 것이다.

 

☆ 주류성(周留城)을 일본서기는 주유성(州柔城)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그 환경에 대하여 천지천황 원년(A.D.662) 겨울12월 조를 보면, “백제왕 풍장과 그 신하 좌평 복신들이 협정련, 박시전래진과 의논하기를 ‘이 주유는 농경지와 멀리 떨어져 있고, 토질이 척박하다. 농잠할 땅이 아니다. 방어하고 싸울 장소다. 여기에 오래 있으면 백성이 기근이 들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주류성이 험한 산악지역에 위치했음을 알게 한다.

 

  그러했기 때문에 주류성에 주둔하고 있던 복신이 그 동남쪽 가까이 사비성에 주둔하고 있던 유인원을 괴롭힐 수 있었지만 내부갈등으로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복신은 자신이 왕위에 옹립한 부여풍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된다.

  그리고 왜국지원군을 싣고 오던 왜국배 4백척도 백강구 전투에서 패하자 부여풍은 고구려로 도망쳐 버린다.

  그리하여 신라군과 당군은 사비, 웅진에서 가까운 주류성을 먼저 공격하여 함락시키는 것이고, 지수신이 임존성에 웅거하며 끝까지 저항하려 하였으나 대세가 기울어지자 지수신도 처자를 버리고 북쪽의 고구려로 도망치고 말았고, 백제 부흥운동도 막을 내리고 마는 것이다.

  이렇게 백제의 부흥운동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주류성과 임존성을 한반도에서 찾지마라.

  주류성과 임존성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당산 북쪽에 있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