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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환도성(丸都城)과 안시성(安市城)은 같은 곳이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10. 5. 30. 23:39

윤여동설 - 환도성(丸都城)과 안시성(安市城)은 같은 곳이다 - 최초주장 

 

 

 

 

 

[학자들이 환도산성으로 비정하고 있는 집안 부근산성자산성 환도산성 표지석과 성벽인데 사실 이곳은 환도성이 아니다]

 

  삼국유사 왕력 고구려 16대 국원왕(고국원왕) 조를 보면,

  “임인년(A.D.342) 8월 안시성으로 도읍을 옮기니 이것이 환도성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흥법 순도조려 조에도,

  “상고해보면 고구려의 도읍은 안시성이며, 이곳을 혹은 안정홀(安丁忽 , 필자주 : 安寸忽의 오기인가?)이라고도 하는데 요수 북쪽에 있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우리를 매우 헷갈리게 한다.

  왜냐하면 환도성은 서기 198년 고구려 산상왕 2년 2월에 처음으로 쌓았다고 하고, 서기 209년 산상왕 13년 10월에 국내성(국내위나암)으로부터 옮긴 도읍이었으며, 후일 고국원왕 12년(A.D.342) 8월에 다시 환도성으로 이거(移居)했었으나 연나라 모용황의 침공을 받아 환도성을 함락당하여, 궁실은 불타고 성이 허물어져 버리자 평양 동황성으로 옮겼다고 하는데, 삼국유사는 이곳 환도성이 곧 안시성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 20년 조를 보면 환도성이 함락되고 동천왕이 관구검의 명을 받은 왕기라는 장수에게 쫓겨 숙신 남쪽 옥저(북옥저)까지 도망쳤었는데, 이 전쟁 때에 위나라 장수가 숙신 남쪽 경계에 이르러 돌(바위)에 공을 새겨 기념하고, 또한 환도산(필자주 :  옥저산이 아닐까? )에 이르러 불내성(不耐城)이라고 새기고 돌아갔다고 기록하고 있고, 양서와 북사에도 동일한 기록이 보인다.

  그런데 불내성(不耐城)이라는 의미를 잘 새겨보면 ”오래 가지 못할 성“ 또는 ”오래 견디지 못할 성“이라는 의미로서 오래 유지되지 못할 것이라는 조롱 섞인 글자를 새겼던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지금 바위에 ”不耐城(불내성)“이라고 새긴 글자를 찾았다는 보고가 없다.

  혹시 환도산에 새긴 것이 아니라 옥저지역에 새긴 것은 아닐까? 

 

  그런데 정사인 삼국사기에도 환도성과 안시성이 같은 곳일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 기록이 보인다.

  삼국사기 잡지 제6 지리4 고구려, 백제 편의 기록을 보면, “압록강 이북의 항복하지 않은 11개 성은 본래 조리비서인 북부여성주, 본래 무자홀인 절성, 본래 초파홀인 풍부성, 본래 구차홀[돈성이라고도 한다]인 신성주, 본래 파시홀인 도성, 본래 비달홀인 대두산성, 본래 오열홀인 요동성주, 옥성주, 백석성, 다벌악주, 옛 안촌홀(安寸忽 혹은 丸都城)인 안시성 등이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기록대로라면 안시성의 옛 이름이 안촌홀 또는 환도성인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환도성과 안시성이 압록강 북쪽 또는 요수 북쪽에 위치했었다는 기록을 보고는 지금 한반도 압록강 북쪽 집안의 산성자산성을 고구려의 환도성으로 비정하고 있고, 안시성은 요하 동쪽인 요녕성 해성시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환도성과 안시성을 전혀 별개의 장소로 인식하고 있는 것인데, 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던 것일까?

   

   앞서 고구려 산상왕이 국내성으로부터 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긴 때는 후한 말기의 어수선한 때였다.

  이때 산상왕은 후한말기의 어수선한 때를 이용하여 강역을 중국 쪽으로 넓힐 생각으로 도읍을 전진 배치했다가 위나라 관구검의 침공을 받아 환도성을 함락 당했고,

  고국원왕 역시 5호16국 시기에 평양성에서 환도성으로 이거했다가 연나라 모용황의 견제침공을 받고 역시 환도성을 함락 당하고는 그 후 우리 역사에서 환도성이란 이름은 나타나지 않는다.

  산상왕이나 고국원왕이 중국의 혼란기에 환도성에 자리잡은 것을 보면 환도성이 국내성이나 평양성보다 중국 쪽에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을 것이다.

  삼국사기에서 안시성은 당 태종 고구려 침공 때인 645년부터 구체적인 기록으로 나타나지만 이 전쟁 기록 중에 당 태종이 백암성을 함락시킨 후에 이세적과 나눈 대화 즉 “내가 들으니 안시는 성이 험하고 군사가 강하며 그 성주가 재질이 용맹하여 막리지(연개소문)의 난에도 성을 지켜 항복하지 않았고, 막리지가 쳤으나 그를 굴복시킬 수가 없었기 때문에 성을 그에게 주고 말았다고 한다. 이제 건안성은 군사가 약하고 군량이 적으니 만약 그들이 뜻하지 않은 때에 치게 되면 반드시 이길 것이다. 그대는 먼저 건안을 쳐야 하는 바 건안이 항복한다면 안시는 우리의 뱃속에 있는 것이니 이것이 병법에서 말하는 ‘치지 않을 성이 있다’는 것이다” 하니

  이세적이 대답하기를 “건안은 남쪽(필자주 : 북쪽의 오기)에 있고, 안시는 북쪽(필자주 : 남쪽의 의 오기)에 있는데 우리의 군량은 전부 요동에 있습니다. 이제 안시를 지나 건안을 치다가 만일 고구려 사람들이 우리의 군량수송로를 끊게 되면 어찌 되겠습니까?” 하였다는 기록을 보면 안시성은 그 전부터 존재했던 성임에 틀림없고, 요동성과 가까이 위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서지리지 권28하 지리지 제8하 요동군 조를 보면,

 “요동군(遼東郡)은 진(秦)나라가 설치했고 유주(幽州)에 속했다.

  55,972호이고, 인구는 272,539명이며, 18현이 있는데, 양평(襄平), 신창(新昌), 무려(無慮 : 서부도위치소), 망평(望平: 대요수가 요새 밖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안시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길이가 1,250리이다), 방(房), 후성(候城: 중부도위치소), 요대(遼隊), 요양(遼陽), 험독(險瀆), 거취(居就), 고현(高顯), 안시(安市)』, 무차(武次: 동부도위치소), 평곽(平郭), 서안평(西安平), 문(文), 번한(番汗), 답씨(沓氏)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전한 시대에도 이미 안시현이라는 지명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산상왕이 그곳에 둥그렇게 대규모(둘레가 12,580척)의 성을 쌓고 환도성이라 명명했다가 그곳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동천왕 때와 고국원왕 때 두 차례의 전란으로 환도성이 함락되고 무너져버려 도읍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해버리자 옛 지명을 따서 안시성으로 명칭을 다시 바꾸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결론적으로 환도성이나 안시성은 같은 장소를 말하는 것이고, 옛 압록강의 서쪽, 국내성의 동쪽, 요동성의 북쪽에 위치했었고, 고구려는 그 안시성을 나라의 서쪽 변방을 지키는 방어의 요충지로서의 역할을 하도록 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진짜 고구려의 안시성은 옛 요동성이었던 지금의 북경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지 요하 동쪽에 위치했던 것이 아니다.

  지금의 북경 북쪽 발해진 부근이 옛 환도성, 안시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