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고대 요동(遼東)을 중심으로 찾아보는 우리 삼국의 원래 위치 - 최초주장
“요동(遼東)”은 “요수(遼水)의 동쪽”이라는 뜻이다.
요동은 우리 고대 역사와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 요동의 위치를 정확히 모르면 우리의 역사강역을 찾아낼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요동(遼東)”은 우리의 역사강역을 찾아내는 비밀의 열쇠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우리는 지금 한반도 북쪽 요동반도 부근을 요동이라 하며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하면서 왔던 곳이라고 하고 있는데, 이는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이곳은 명· 청시기에 지명을 옮겨 놓은 곳이지 고대의 요동은 아니다. 따라서 지금의 요하도 고대의 요수가 아니고, 요하하류는 고대의 요택이 아니다. 지금의 요동반도는 고대의 왜국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고대의 요동이 어디를 말하는지, 요서가 어디를 말하는지, 현토가 어디를 말하는지, 대방이 어디를 말하는지, 낙랑이 어디를 말하는지 명확하게 알지 못하고 각각의 주장들만 분분한데, 필자는 고대의 옛 요동을 지금의 북경 부근으로 비정하고 있고, 나머지 지명들도 모두 북경 부근에 위치했을 것으로 믿고 있다.
그렇다면 필자는 왜 지금의 북경 부근을 “고대의 요동(遼東)”이라 주장하는 것일까?
☆ 수십년간 사서를 뒤지고 있는 재야 역사연구자 중에서도 극소수인 몇 사람만이 지금의 북경 부근을 고대의 요동군으로 확신하고 있을 정도인데, 이는 조선시대 이후 지명이 이동되었고, 지금 우리가 한반도에 살고 있어 발상의 전환이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북경 부근을 고대의 요동(遼東), 영정하를 고대의 요수(遼水)로 비정하고 사서들의 기록에 따라 각 나라들의 위치를 배치해 보면, 역사서들에 요수, 요동, 대방, 낙랑, 현토 등과의 수 많은 접촉기록을 무리없이 설명할 수 있고, 각 나라들의 위치를 비정해 볼 수 있다.
[고구려]
후한서 고구려전
요동 동쪽 1천리에 위치. 남쪽은 조선과 예, 맥, 동쪽은 옥저, 북쪽은 부여와 접.
삼국지 고구려전
요동 동쪽 1천리에 위치. 남쪽은 조선과 예, 맥, 동쪽은 옥저, 북쪽은 부여와 접.
위서 고구려전
요의 동남쪽 1천여리에 위치(필자 주 : 이는 요동의 동쪽 1천여리의 오기일 것임). 동쪽은 책성까지, 남쪽은 소해까지, 북쪽은 옛 부여까지. 강역은 동서 2천리, 남북 1천여리.
송서 고구려국전
지금 한나라 때의 요동군을 통치.
양서 고구려전
요동 동쪽 1천리에 위치. 한나라와 위나라 때 남쪽으로는 조선과 예, 맥, 동쪽으로는 옥저, 북쪽으로는 부여와 접.
주서 고(구)려전
땅이 동쪽으로는 신라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요수를 건너니 동서 2천리요, 남쪽으로는 백제와 접하고, 북쪽은 말갈과 이웃하여 남북 1천여리.
남사 고구려전
요동 동쪽 1천리에 위치. 땅이 사방 2천리이고, 한나라와 위나라 때 남쪽으로는 조선, 예, 맥, 동쪽으로는 옥저, 북쪽으로는 부여와 접.
북사 고구려전
동쪽으로는 신라까지, 서쪽으로는 요(요수)를 건너니 2천리요, 남쪽으로는 백제와 접하고, 북쪽으로는 말갈과 인접하니 1천여리.
[고구려왕들의 작위]
19대 광개토대왕(재위 392-413)
평주목, 요동왕, 대방왕
※ 양서 고구려전에는 "(고)구려왕이 평주목이 되었고, 요동과 대방 두 나라의 왕으로 봉해졌다. 고안(시기적으로 광개토대왕을 말하는 것인데, 삼국사기에는 광개토대왕의 이름이 담덕이라 했다)은 처음으로 장사, 사마, 참군의 관직을 설치했고, 후에는 요동군을 차지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북사에도 "동진 효무제 태원 10년(A.D.385)에 (고)구려가 요동군과 현토군을 공격하니 후연의 모용수가 그 아우 모용농을 보내 (고)구려를 쳐서 두 군을 되찾았다. 모용수의 아들 모용보는 (고)구려왕 안을 평주목으로 삼아 요동과 대방 두 나라의 왕으로 책봉했다. 안이 장사, 사마, 참군의 관직을 처음으로 설치하였고, 뒤에는 요동군을 경략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20대 장수왕(재위 413-491)
사지절 도독 영주제군사 정동장군 고구려왕 낙랑공(A.D.413) :동진
※ 송서 고구려국전에는 위와 같이 "낙랑공(樂浪公)"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장수왕 조에는 동진의 안제가 왕을 "낙안군공(樂安郡公)"으로 봉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지절 도독 영주제군사 정동대장군 고구려왕 낙랑공(A.D.420) : 송
사지절 산기상시 도독 영·평2주제군사 정동대장군 고구려왕 낙랑공(A.D.422) : 송
도독 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영호동이중랑장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A.D.435) : 북위
사지절 산기상시 도독 영·평2주제군사 거기대장군 개부의동삼사 고구려왕 낙랑공(A.D.463) : 송
사지절 산기상시 도독 영·평2주제군사 표기대장군 개부의동삼사 고구려왕 낙랑공(A.D.479) : 남제
증 거기대장군 태부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A.D.491) : 북위
21대 문자왕(재위 492-519)
사지절 도독 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영호동이중랑장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A.D.492) : 북위
사지절 산기상시 도독 영·평2주제군사 정동대장군 고구려왕 낙랑공(A.D.493) : 남제
사지절 산기상시 도독 영·평2주제군사 거기대장군 고구려왕 낙랑공(A.D.495) : 양
사지절 산기상시 도독 영·평2주제군사 무동대장군 개부의동삼사 고구려왕 낙랑공(A.D.508) : 양
증 거기대장군 영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A.D.519) : 북위
※ 북사에는 "거기대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공 고구려왕"으로 추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22대 안장왕(재위 519-531)
안동장군 영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A.D.519) : 북위
※ 북사에는 "진동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공 고구려왕"의 작위를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지절 도독 영·평2주제군사 영동장군 고구려왕(A.D.520) : 양
23대 안원왕(재위 531-545)
사지절 도독 영평2주제군사 영동장군 고구려왕(A.D.531) : 양
사지절 산기상시 거기대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A.D.532) : 북위
사지절 시중 표기대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A.D.534) : 동위
24대 양원왕(재위 545-559)
사지절 시중 표기대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A.D.550) : 북제
25대 평원왕(재위 559-590)
사지절 영동이교위 요동군공 고구려왕(A.D.560) : 북제
상개부의동 대장군 요동군개국공 요동왕(A.D.577) : 북주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평원왕 조에는 "개부의동삼사 대장군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으로 봉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북사 고구려전에는 "상개부의동대장군 요동군공 요동왕"으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장군 요동군공(A.D.581) : 수
26대 영양왕(재위 590-618)
상개부의동삼사 요동군공(A.D.590) : 수
상개부의동삼사 요동군공 고구려왕(A.D.591) : 수
27대 영류왕 (재위 618-642)
상주국 요동군공 고구려왕(A.D.624) : 당
28대 보장왕(재위 642-668)
작위에 대한 기록이 없다.
[백제]
위서 백제국전
북쪽 1천여리에 고구려가 있고, 소해의 남쪽에 위치.
송서 백제국전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 동쪽 1천여리에 위치.
후에 고구려는 요동을, 백제는 요서를 경략하여 차지. 백제가 통치한 곳은 진평군 진평현.
양서 백제전
본래 구려(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에 위치.
진(晉)나라 때 (고)구려가 요동을 경략하자 백제 역시 요서‧진평 두군의 땅을 점거하고 스스로 백제군 설치.
주서 백제전
대방 옛 땅에서 건국. 동쪽으로는 신라에 닿았고, 북쪽으로는 고구려와 접했으며, 서쪽과 남쪽은 바다.
수서 백제전
대방 옛 땅에서 건국. 남쪽(동쪽의 오기)으로는 신라에 닿고, 북쪽에는 고구려가 위치.
남사 백제전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 동쪽 1천여리에 위치.
진(晉)나라 때 (고)구려가 요동을 경략하자 백제 또한 요서‧ 진평 두 군의 땅을 점거하고 스스로 백제군 설치.
북사 백제전
대방 옛 땅에서 건국. 동쪽은 신라까지, 북쪽은 고구려와 접했으며, 서쪽과 남쪽은 대해까지이고, 소해의 남쪽에 위치.
[백제왕들의 작위]
13대 근초고왕(재위 346-375)
진동장군 영낙랑태수((A.D.372) : 동진
※ 진서(晉書) 권9 제기 제9 간문제 함안 2년(A.D.372) 조에, "百濟王餘句爲鎭東將軍 領樂浪太守"라고 기록되어 있어 근초고왕의 이름이 부여구(扶餘句) 임을 알 수 있고, 이때 근초고왕이 동진으로부터 받은 작위가 백제 최초의 작위로 보이는데, "영낙랑태수"라는 작위를 받았다는 것은 이때 백제가 낙랑 땅을 차지했다는 말이다.
14대 근구수왕(재위 375-384)
※ 근구수왕 역시 동진(316-420)과의 관계를 돈독히 했으므로 동진으로부터 작위를 받았을 것이나 이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고, 이후의 왕들도 동진과 국교를 맺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작위에 대한 기록은 아직 찾지 못했다.
15대 침류왕(재위 384-385)
16대 진사왕(재위 385-392)
17대 아신왕(재위 392-405)
사지절 도독 진동장군 백제왕 : 동진
18대 전지왕(재위 405-420)
사지절 도독 백제제군사 진동장군 백제왕(A.D.416) : 동진
사지절 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 (A.D.420) : 송
19대 구이신왕(재위 420-427)
20대 비유왕(재위 427-455)
사지절 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A.D.430) : 송
※ 삼국사기 백제본기 비유왕 조에는, 송나라 문황제가 비유왕에게 선대 임금인 영(전지왕)의 작위와 같은 작위를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전지왕 12년인 416년에 동진으로부터 받았던 작위인 "사지절 도독 백제제군사 진동장군 백제왕"을 주로 달아 놓았으나 송나라에서는 420년에 전지왕을 진동대장군으로 올려 봉했었으므로 비유왕이 송나라로부터 그 아버지인 전지왕과 동일한 작위를 받았다면 사지절 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의 작위를 받았다고 해야 옳은 기록이다.
송서 고구려국 전에 송나라에서 장수왕을 정동대장군으로, 전지왕을 진동대장군으로 올려 봉했다는 기록이 있다.
21대 개로왕(재위 455-475)
사지절 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A.D.457) : 송
※ 송서 백제국전에는, 개로왕이 사신을 보내와 작위를 요구해 조칙으로 허락했다는 기록만 있어 구체적인 작위 내용을 알 수 없으나 그 아버지인 비유왕의 작위를 그대로 물려받았을 가능성이 많다.
22대 문주왕(재위 475-477)
※ 작위에 대한 기록을 찾지 못했다.
만약 작위를 받았다면 문주왕과 삼근왕은 송(420-479)나라에서 받았을 것이다.
23대 삼근왕(재위 477-479)
24대 동성왕(재위 479-501)
사지절 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A.D.490) : 남제
※ 양서나 남사에 천감 원년인 502년에 모태(모대)의 작위를 정동장군으로 올려 봉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동성왕은 501년 12월에 죽었다. 따라서 이 기록은 죽은 후에 추증을 했다는 말일 가능성이 많다.
그리고 이때는 웅진에 도읍했을 때인데, 작위에 대방군공이라는 문안이 없는 것으로 보아 웅진은 옛 대방군에 속하지 않는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동성왕 때 백제가 북위의 수십만 기병을 물리치고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었다는 기록의 진실 여부에 논란이 많은데, 이때 백제가 북경 부근과 당산,진황도 일원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북위와 전쟁을 했던 것이지 북위가 서해바다를 건너와 한반도 남부에 위치해 있던 백제를 침공했다가 패한 것이 아니다.
25대 무령왕(재위 501-523)
사지절 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A.D.501 혹은 502) : 남제 또는 양
※ 502년에 남제가 멸망하고 양나라가 건국되었는데, 무령왕이 남제로부터 작위를 받았는지 양나라로부터 작위를 받았는지 정확히 나타나지 않고 있다.
사지절 도독 백제제군사 영동대장군 백제왕(A.D.521) : 양
※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지석에는 양나라에서 받은 영동대장군의 작위가 쓰여 있었다.
26대 성왕(재위 523-554)
지절 도독 백제제군사 수동장군 백제왕(A.D.524) : 양
27대 위덕왕(554- 598)
사지절 시중 거기대장군 대방군공 백제왕(A.D.570) : 북제
사지절 도독 동청주제군사 동청주자사(A.D.571) : 북제
상개부 의동삼사 대방군공 백제왕(A.D.581) : 수
※ 백제가 웅진에서 사비로 도읍을 옮긴 때는 성왕 16년인 538년이었는데, 그 이전 성왕의 작위는 "수동장군 백제왕"이었고, 그 이후 위덕왕의 작위는 "대방군공 백제왕"이었다. 또한 위덕왕의 작위가 동청주자사라는 것은 이때 백제가 동청주 지역을 차지했다는 말인데, 동청주란 산동반도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백제가 원래 한반도가 아닌 지금의 북경 동쪽 하북성 난하 부근에서 건국되었음을 알아야 백제 역사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28대 혜왕(재위 598-599)
※ 혜왕과 법왕의 작위에 대한 기록은 찾지 못했다.
재위기간이 짧아 작위를 받지 못했는지 기록이 누락되었는지 알 수 없다.
만약 작위를 받았다면 "대방군공 백제왕"이라는 작위를 받았을 것이다.
29대 법왕(재위 599-600)
30대 무왕(재위 600-641)
주국 대방군왕 백제왕(A.D.624) : 당
증 광록대부(A.D.641) : 당
31대 의자왕(재위 641-660)
주국 대방군왕 백제왕(A.D.641) : 당
[신라]
수서 신라전
신라국은 고(구)려의 동남쪽에 위치.
북사 신라전
신라는 고구려의 동남쪽에 있는데,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
구당서 신라국전
신라는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
동쪽과 남쪽은 모두 대해로 한정, 서쪽은 백제, 북쪽은 고(구)려와 인접.
신당서 신라전
동쪽은 장인국에 닿고, 동남쪽은 일본, 서쪽은 백제, 남쪽은 바다에 닿았으며, 북쪽에는 고구려가 위치.
[신라왕들의 작위]
24대 진흥왕(재위 540-576)
사지절 동이교위 낙랑군공 신라왕(A.D.565) : 북제
※ 기록에 나타나는 신라 최초의 작위인데, 진흥왕은 555년 봄에 완산주를 비사벌에 설치했고(필자주 : 잘 이해되지 않는 기록이다), 10월에는 북한산을 순수하고 국경을 넓혀서 정했고, 556년에는 비열홀주를 설치하고, 557년에는 국원을 소경으로 만들었으며, 562년에는 대가야를 쳐 없앴고, 564년에 이르러 해외로 눈을 돌려 북제에 사신을 보내자 북제에서 사신을 보내 진흥왕에게 사지절 동이교위 낙랑군공 신라왕이라는 작위를 주게 되는 것이다.
신라의 왕에게 엉뚱하게도 "진한군공"이 아닌 "낙랑군공"이라는 작위를 주었다는 것이 언뜻 이해되지 않을 수 있지만 이는 신라가 낙랑 땅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신라가 낙랑 땅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것은 수서, 북사, 신·구당서에 모두 신라가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음을 확인해 볼 수 있는데, 기록대로라면 우리의 신라가 한반도의 경주 부근에 위치했던 나라가 아니라 지금은 중국 땅이 되어버린 발해 북쪽 북경, 하북성 진황도, 요녕성 호로도 부근에 위치했다는 말이 된다.
25대 진지왕(재위 576-579)
※ 정상적이라면 진지왕도 "낙랑군공 신라왕"이라는 작위를 받았을 것이나 이 시기는 북제가 577년에 북주에게 멸망하는 혼란한 시기였기 때문에 작위를 받지 않았을 수도 있다.
26대 진평왕(재위 579-632)
상개부 낙랑군공 신라왕(A.D.594) : 수
주국 낙랑군공 신라왕(A.D.624) : 당
증 좌광록대부(A.D.632) : 당
※ 수나라는 581년에 북주를 멸망시키고 건국되었다가 618년에 멸망하고 당나라가 건국되었으므로 진평왕은 수나라로부터 작위를 받았다가 다시 당나라로부터 작위를 받게된 것이다.
27대 선덕여왕(재위 632-647)
주국 낙랑군왕 신라왕(A.D.635) : 당
증 광록대부(A.D.647) : 당
28대 진덕여왕(재위 647-654)
주국 낙랑군왕 신라왕(A.D.647) : 당
증 개부의동삼사(A.D.654) : 당
29대 태종무열왕(재위 654-661)
개부의동삼사 낙랑군왕 신라왕(A.D.654) : 당
30대 문무왕(재위 661-681)
개부의동삼사 상주국 낙랑군왕 신라왕(A.D.662) : 당
계림주대도독 좌위대장군 개부의동삼사 상주국 신라왕(A.D.663) : 당
※ 문무왕 3년(A.D.663) 4월 조를 보면 "당나라가 우리나라로서 계림대도독부를 삼고 왕으로써 계림주대도독을 삼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당나라는 이때부터 신라를 "계림주"로 바꾸어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옥저]
후한서 동옥저전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에 위치. 동쪽은 대해까지, 북쪽은 읍루와 부여, 남쪽은 예맥과 접.
삼국지 동옥저전
고구려 개마대산 동쪽 바닷가에 위치. 북쪽은 읍루와 부여, 남쪽은 예맥과 접.
[예(동예)]
후한서 예전
북쪽으로는 고구려와 옥저, 남쪽으로는 진한과 접했고, 동쪽은 대해에 닿았으며, 서쪽은 낙랑까지.
삼국지 예전
남쪽으로는 진한, 북쪽으로는 고구려, 옥저와 접했고, 동쪽은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