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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광개토태왕의 정복지 비려 염수와 개선로 - 최초주장

윤여동 2012. 1. 13. 19:58

윤여동설 - 광개토태왕의 정복지 비려 염수와 개선로 - 최초주장

 

 

  호태왕 비문 영락 5년(A.D.395) 을미년 조를 보면,

  “영락 5년 을미년에 왕이 비려(碑麗)가 붙잡아간 사람들을 돌려보내지 않으므로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였다.

부산(富山)과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에 이르러 3개 부(部) 6, 7백영(營)을 격파하고 셀 수 없을 만큼의 소, 말, 양떼를 노획하고 개선하였다. 양평(襄平) 길을 지나 동쪽으로 ○○성, 역성(力城), 북풍(北豐)을 거쳐 왕이 사냥을 준비시켜 국경도 구경하고 사냥도 즐기면서 돌아왔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여러 지명이 언급되고 있다.

  비려(碑麗), 부산(富山), 부산(負山), 염수(鹽水), 양평(襄平), 역성(力城), 북풍(北豐) 등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이 호태왕비 영락 5년 조에 언급되고 있는 지명들이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지 확실하게 알지 못하고 학자마다 사람마다 여기일 것이다 저기일 것이다 하면서 주장들만 난무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지만 비려(碑麗)에 대한 기록을 보면 셀 수 없을 만큼의 소, 말, 양떼를 노획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그 지역이 목축을 생업으로 하고 있는 넓은 초원지역 임을 유추해 볼 수 있는데, 필자는 비려를 거란(契丹)의 일파로 보고 있고, 비려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염수(鹽水)는 지금의 내몽골 오란찰포시 찰합이우익후기 북쪽에 위치한 지금의 염호(鹽湖 : 요나라 때의 대염박(大鹽泊)를 말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광개토태왕 당시 고구려의 도읍은 평양 동쪽의 황성이었다.

  황성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을 말하는 것이므로 이때 광개토태왕은 황성을 출발하여 서쪽으로 지금의 내몽골 찰합이우익후기를 향하여 진군하여 그 부근의 염수까지 가서 승전하고, 3개 부 6-7백개의 영을 격파하고 초원에서 방목하고 있던 수많은 가축들을 노획하고 돌아왔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광개토태왕이 개선할 때 지났다는 양평(襄平) 길은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양평은 역사가 매우 오랜 곳으로서 춘추전국시대 연장성이 조양(造陽)에서부터 양평(襄平)까지 쌓았다는 곳인데, 한서지리지를 보면, 양평은 요동군의 속현으로서 목사관이 설치되어 있던 곳이고, 공손씨 일가인 공손도, 공손강, 공손공, 공손연, 공손수 등이 근거지로 삼고 연왕을 칭하다가 위나라 사마의에게 토벌 당해 소멸했던 곳으로 전해지는 곳이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영양왕 23년(A.D.612)조를 보면, 수양제가 고구려를 침공하여 고구려의 도읍인 평양성을 향하여 진군할 때, 우문술은 부여도, 우중문은 낙랑도, 형원항은 요동도, 설세웅은 옥저도, 신세웅은 현토도, 장근은 양평도, 조효재는 갈석도, 최홍승은 수성도, 위문승은 증지도를 따라 진군하여 압록강 서쪽에서 모두 집결하였다고 하였으므로 양평이라는 곳이 압록강 서쪽에 위치한 중요 교통로 중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북풍(北豐)은 북연이 북위에게 멸망당하고 연왕 풍홍이 고구려로 망명해오자 장수왕이 처음에 풍홍을 평곽(平郭)에 머무르게 했다가 얼마 후 북풍으로 옮겼다는 곳이고, 평곽은 요동군의 속현이었다.

  요동군의 치소는 요양(遼陽)으로서 지금의 북경 부근으로 비정되는데, 이곳이 우리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요동성(遼東城)이었다.

 

☆ 요동군의 치소가 처음에는 양평에 있다가 후대에 이르러 요양으로 옮겨진 듯한데, 요양은 후일 요나라의 동경요양부가 되고, 금나라의 동경요양부가 되는 곳으로서 지금의 북경 부근으로 비정된다.

 

  그러면 비려가 내몽골 찰합이우익후기이며, 요동군이 북경 부근이라면 당시 광개토태왕이 어느 길을 따라 비려를 정복하고, 개선했는지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위 : 비려 염수로 추정되는 지금의 내몽골 찰합이우익후기에 있는 염호]

 

☆ 삼국지 고구려전을 보면 “공손도가 해동에 웅거하자 백고[고구려 8대 신대왕]는 대가 우거와 주부 연인 등을 파견하여 공손도를 도와 부산(富山)의 도적을 격파하였다” 라고 부산이 언급되고 있는데, 이를 보면 부산이라는 곳은 요동군과 고구려에 가까이 위치하였을 것이고, 그곳을 근거지로 삼은 산적들이 약탈을 일삼아 요동군과 고구려로서는 골칫거리였던 듯하다. 그러자 요동군과 고구려가 협력하여 그를 토벌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호태왕비문에는 광개토태왕이 개선할 때 요양(요동성)이 아닌 양평 길을 지나 동쪽으로 역성, 북풍을 거쳐 돌아왔다고 했는데, 양평은 요동군에 속하는 현으로서 지금의 북경 부근으로 비정되고, 북풍은 그 북쪽 하북성 난평, 풍녕 부근으로 비정된다.

  따라서 이때 광개토태왕은 지금의 북경 북쪽을 거쳐 돌아왔던 것이다.

  천년동안 찾지 못하고 헤매던 광개토태왕이 비려를 정복하고 돌아온 개선로가 필자에 의해 역사상 처음으로 밝혀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