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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부여의 황금, 섭라의 백옥 보물찾기 - 최초공개

윤여동 2008. 12. 24. 02:45

윤여동설 - 부여의 황금, 섭라의 백옥 보물찾기 - 최초공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문자왕 13년(A.D.504) 조를 보면,
  "여름 4월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더니 위나라 세종이 우리 사신 예실불을 동당에서 접견했는데, 예실불이 나아가 말하기를, '우리나라가 누대에 걸쳐 온 정성을 다하여 토산물을 보내는 조공을 빠뜨리지 않았으나 다만 황금(黃金)은 부여에서 나오고, 가(珂: 백옥)는 섭라에서 나오는 것인데, 부여는 물길에게 빼앗겼고, 섭라는 백제가 병합해버렸으므로 금과 옥이 왕의 창고에 들어오지 못하는 것은 실로 두 도적 때문입니다' 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고,
  위서 고구려전에도,
  "정시(A.D.504-507) 중에 세종이 동당에서 고구려의 사신 예실불을 인견하니 예실불이 나아가 말하기를 '고구려가 누대에 걸쳐 온 정성을 다하여 토산물을 바치는 조공을 빠뜨리지 않았는데, 다만 황금은 부여(扶餘)에서 나오고 마노(백옥)는 섭라(涉羅)에서 산출되는데, 지금 부여는 물길에게 축출 당했고, 섭라는 백제에게 병탄 당했습니다' 라고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 기록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해 볼 수 있다.
   기록 속의 부여란 시기적으로 동부여를 말하는 것인데, 당시 동부여에서 황금이 아주 많이 산출되었는데 이때쯤 고구려가 그 땅을 물길(말갈)에게 빼앗겼고, 백옥은 섭라라는 곳에서 산출되는데, 이때쯤 고구려가 그 땅도 백제에게 빼앗겨 그 품목들을 조공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이 기록을 보고는 황금은 압록강 북쪽 만주 지역에서 산출되었고, 백옥은 한반도의 고구려와 백제의 접경 지역이었을 경기도 북부지역에서 산출되었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후한서 부여국전에는, "(동)부여는 현토의 북쪽 1천리에 있다. 남쪽은 고구려, 동쪽은 읍루, 서쪽은 선비와 접하였고, 북쪽에는 약수가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지 부여전에는, "(동)부여는 장성의 북쪽에 있는데, 현토에서 1천리 떨어져 있다. 남쪽은 고구려, 동쪽은 읍루, 서쪽은 선비와 접했고, 북쪽에는 약수가 있다. 땅이 사방 2천리이고 백성은 8만 호이다. 산과 능선이 많고 넓은 못이 있으며, 동이지역에서는 가장 평탄하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동부여가 만리장성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하고,  
  후한서 읍루전을 보면, "읍루는 옛 숙신국이다. (동)부여의 동북쪽 1천여리에 있는데 동쪽은 대해에 닿고 남쪽은 북옥저와 접했으며 북쪽은 그 끝을 알지 못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지에도 비슷하게 기록하고 있으며,   북사 물길전에는, "물길국은 고구려의 북쪽에 있는데 말갈이라고도 한다. 읍락마다 각각 장이 있으며 하나로 통합되어 있지 않다. 그들은 굳세고 흉포하여 동이 가운데 제일 강하며 말도 그들만이 다르다. 두막루 등의 나라를 항상 가볍게 보는데, 여러 나라들이 골칫거리로 여긴다. 낙양에서 5천리 떨어져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물길(숙신, 읍루, 말갈)이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5천여리 거리에 위치했음을 알게 하는데, 하남성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5천여리 거리라면 이는 북경을 지나 대흥안령산맥 부근까지의 거리에 해당한다.

 

[동부여와 물길(읍루)의 위치]

 

                         약수

 

 선비                   동부여                   읍루(물길)

 

        현토            고구려

 

               요동        백제     신라

 

  시기적으로 기록 속의 부여는 해모수의 북부여, 동명왕의 졸본부여, 해부루의 동부여 세 부여 중 하나인 동부여를 말하는 것으로서 기원전 86년 북부여가 졸본부여에게 멸망당하자 북부여왕의 동생이었던 해부루가 유민들을 이끌고 가섭원이라는 곳으로 가서 다시 세운 나라로서 서기 494년 2월에 이르러 그 왕이 처자들을 데리고 고구려 문자왕에게 나라를 바치고 투항함으로써 멸망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보이는데,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504년 조의 기록에는 고구려가 동부여를 물길에게 빼앗겼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동부여가 고구려에 투항한 후 504년 이전 경에 고구려가 그 동부여 땅을 다시 물길에게 빼앗겼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물길이 동부여의 동쪽에 위치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길이란 옛 숙신으로서 시대에 따라 읍루, 물길, 말갈, 여진으로 불리웠다. 우리 역사 강역의 동북쪽 험준한 산악지대에 살았으며, 주로 수렵, 유목 민족으로 나타나고 있고, 문명이 뒤떨어졌던 곳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후세의 발해, 금나라, 청나라가 바로 이들 숙신의 후예들이 세운 나라였다.  
  우리는 지금 동부여가 압록강 북쪽 만주벌판에 위치했던 나라로 인식하고 있고, 물길이 두만강 건너 연해주에 위치했었던 것으로 인식하고 있으나 사서 기록 속의 장성이란 만리장성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 만리장성은 중국 하북성 진황도 산해관 노룡두에서 시작되어 북경 북쪽을 지나고 산서성 북부를 지나, 서쪽의 감숙성 가욕관까지 이어지는데, 동부여가 바로 그 장성의 북쪽 1천여리 쯤에 위치했다면 동부여는 한반도의 북쪽인 압록강 너머에 위치했던 나라가 아니라 지금의 북경 북쪽 방향인 내몽골, 몽골에 위치했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도 내몽골, 몽골 지역에서는 금이 아주 많이 생산되고 있고 이곳이 바로 옛 동부여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읍루(물길)는 지금의 대흥안령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숙신, 읍루, 물길, 말갈, 여진은 연해주에 위치했던 나라가 아니라 지금의 대흥안령산맥을 중심으로 존재했던 나라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고구려가 백제에게 빼앗겼다는 백옥이 생산되는 섭라는 또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위서 백제국전을 보면, "백제국은 그 선조가 부여로부터 나왔다. 그 나라는 북쪽에 고구려가 1천여리 거리에 있고, 소해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백성들은 농사를 짓는데, 땅이 대부분 낮고 습하여 대개 산에서 산다" 라고 기록하고 있고,
  북사 백제전에는, "(백제의) 동쪽은 신라까지이고, 북쪽은 고구려와 접했다. 서쪽과 남쪽은 대해에 닿았고, 소해의 남쪽에 위치하는데, (강역은) 동서 450리, 남북 900여리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우리는 지금 이 기록을 한반도에 비정하여 역사를 해석한다.
  그러나 동부여가 내몽골, 몽골에, 동부여의 동쪽에 위치했던 물길(읍루)이 대흥안령에, 동부여의 서쪽에 위치했던 선비가 산서성 북부에 위치하고 있었다면 동부여의 남쪽에 위치했다는 고구려는 당연히 지금의 하북성 북부에 위치했었을 것이고, 다시 백제가 그 고구려의 남쪽에 위치했다면 백제는 지금의 북경 부근에 위치했었다는 말이 되며, 신라는 북경 부근의 동쪽 방향에 위치했었다는 말이 된다.

 

☆ 실제 백제의 중심강역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당산, 진황도 일원이었고, 신라의 중심강역은 요녕성 금주(錦州) 일원, 고구려의 중심강역은 장가구시, 승덕시, 내몽골일원이었고, 요동이었던 북경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중국 세력과 고구려, 백제가 다투었다.

 

  그렇다면 백옥이 생산되던 섭라라는 곳도 바로 지금의 북경 부근을 말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옛날 백옥이 생산되던 섭라가 지금의 어디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북경 부근 또는 태행산맥 부근에 옛날 고구려가 위나라에 조공품으로 보낼 정도로 아주 질 좋은 백옥을 캐던 백옥 광산이 있었을 것이다.

 

[보고]

[2013년에 섭라의 백옥산지 추정지를 찾았습니다.찾고보니 북경 서남쪽에 위치한 탁주시의 서북쪽 방향인 대석와진이 바로 유명한 백옥(마노)산출지였습니다.우리의 고구려와 백제(대륙백제)가 그곳까지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필자 윤여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