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고구려 왕릉 조성지 고국(故國)에 대한 새로운 가설 - 최초주장
고대 왕조시대에 왕릉은 당시의 도읍 부근에 조성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필자도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왔고, 따라서 고구려의 왕릉들도 당시의 도읍 부근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생각하여 시대에 따라 변화된 당시 고구려의 도읍 부근에서 해당 왕릉들을 찾으려고 하였다.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고구려의 건국지 졸본(홀본)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 후성진(后城鎭)이고,
국내성은 지금의 북경시 연경구 영녕진(永寧鎭)이며,
고구려의 환도성(丸都城), 안시성(安市城)은 지금의 북경 북쪽 회유 발해진(渤海鎭)이고,
고구려의 평양성은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열하행궁)으로 밝혀졌다.
그리하여 고구려 건국시조인 추모왕(주몽왕)의 능은 당연히 건국지인 지금의 중국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 후성진 부근에서 찾으려 하였는데, 삼국사기의 “용산에 장사지냈다(葬龍山)”는 기록과 호태왕 비문의 “왕이 홀본 동쪽 능선에서 황룡의 머리에 올라 승천하였다(王於忽本東岡黃龍首昇天)”는 기록에 따라 적성 후성진의 동쪽 능선에 추모왕(주몽왕)의 능이 조성되었을 것으로 생각했고, 또한 삼국사기에 고구려왕들이 “졸본(홀본)으로 가서 시조의 사당에 제사지냈다(王如卒本祀始祖廟)”는 기록들이 계속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건국시조인 추모왕(주몽왕)의 능은 졸본(홀본, 필자주 : 지금의 적성 후성진) 동쪽에 조성된 것이 틀림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후 국내성(國內城)으로 도읍을 옮겼던,
2대 유리명왕(瑠璃明王)의 능은 두곡동원(豆谷東原)에 조성했다고 하였고,
3대 대무신왕(大武神王)의 능은 대수촌원(大獸村原)에 조성했다고 하였으며,
4대 민중왕(閔中王)의 능은 왕의 유언에 따라 민중원석굴(閔中原石窟)에 장사지냈다고 하였는데, 당시 고구려의 도읍이 국내성(國內城, 필자주 : 북경시 연경구 영녕진)이었기 때문에 고구려 국내성이었던 지금의 북경 북쪽 영녕진(永寧鎭) 부근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판단하고 그 부근을 뒤져 이 고구려왕릉들을 찾고 있는 중이다.
[필자주 : 그 중 유리왕릉과 대무신왕릉의 위치는 찾았고, 민중왕릉은 대강의 위치를 찾아 놓은 상태이다]
그런데 같은 국내성에 도읍하고 있던 때인,
5대 모본왕(慕本王)의 능을 “모본원(慕本原)”에 조성했다고 하였고,
8대 신대왕(新大王)의 능을 “고국곡(故國谷)”에 조성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후의 왕릉 조성지에 대하여 생각을 달리해보게 되었다.
왜냐하면 모본(慕本)이란 “근본을 그리워하다”라는 뜻이고, 고국(故國)이란 “고향 땅”이라는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고국(故國)”에 능을 조성한 고구려왕은,
8대 신대왕 외에도
9대 고국천왕(故國川王)의 능을 고국천원(故國川原)에 조성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심지어 고구려가 평양성 또는 황성에 도읍하고 있던 때인
16대 고국원왕(故國原王)의 능도 고국지원(故國之原)에 조성했고,
18대 고국양왕(故國壤王)의 능도 역시 고국양(故國壤)에 조성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필자는 고구려 왕실의 입장에서 “고국(故國)” 즉 고향 땅이란 과연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생각해 보게 되었는데, 결론은 북부여의 건국시조인 천제 해모수의 고향을 말하거나, 고구려 건국시조인 추모왕(주몽왕)의 어머니인 하백(河伯, 필자주 : 어부의 높힘말이다)의 딸 유화(柳花)가 원래 살았던 압록강변의 고향동네를 말할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이는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 “고구려의 선조는 해모수로 부터이니 해모수 어머니의 고향 역시 그곳이다. 조대기에서 이르기를 ‘해모수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일찍이 웅심산(熊心山)에서 살다가 부여의 옛 서울에서 군대를 일으켜 무리에게 추대되어 나라를 세우고 왕위에 오르니 이를 부여(북부여)의 시조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호태왕 비문에도 추모왕(주몽왕)을 천제 해모수의 후예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었고, 또한 삼국유사 기이 제1 고구려 조를 보면, “앞서 북부여의 왕 해부루가 이미 동부여로 피해가고 부루가 죽자 금와가 왕위를 이었다. 이때 금와가 태백산(太伯山)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여자 하나를 만나서 물으니 그 여자가 말하기를, ‘나는 하백(河伯)의 딸로서 이름은 유화(柳花)라 합니다. 여러 동생들과 함께 밖으로 나와서 놀고 있는데, 한 남자가 오더니 자기는 천제의 아들 해모수(필자주 : 시기적으로 해모수가 아니라 해모수의 증손자인 해불리지이다)라고 하면서 나를 웅신산(熊神山) 아래 압록강가의 집 속으로 유인하여 정을 통하고는 가더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부모는 내가 중매도 없이 혼인한 것을 꾸짖어 이곳으로 귀양 보냈습니다’하였다.
금와가 이상하게 여겨 그녀를 방 속에 가두어 두었더니 햇빛이 방안으로 비쳐오는데 그녀가 몸을 피하면 햇빛이 쫓아와서 비추었다. 이로 인하여 태기가 있어 알 하나를 낳으니 크기가 닷되들이 만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하백의 딸 유화가 압록강변에서 해모수(필자주 : 사실은 해모수의 증손자인 해불리지였다)에게 겁탈을 당하여 임신했고, 그 부모가 시집도 안간 처녀가 임신했다하여 집에서 내쫓았고, 유화는 태백산 남쪽 우발수라는 곳으로 가서 그곳에서 주몽을 낳았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 위 기록에는 동부여 금와왕이 유화와 만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사실 금와왕은 주몽과 비슷한 나이로서 이때 유화가 동부여왕을 만났다면 금와왕이 아니라 해부루왕이어야 한다.
주몽이 출생한 해는 기원전 79년이었고, 금와왕은 2년 뒤인 기원전 77년생이었다.
그리고 주몽이 졸본으로 도망쳐 와서 졸본부여왕의 둘째 공주와 혼인한 후 부마의 자격으로 졸본부여의 왕위를 물려받은 때는 기원전 58년이었고, 다시 졸본부여의 국호를 고구려로 바꾸고 고구려의 왕위에 오른 때는 기원전 37년이었다. 그리고 금와왕이 해부루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때는 기원전 47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북부여 천제 해모수가 태어났고, 추모왕(주몽왕)의 어머니인 유화가 원래 살았던 압록강변 웅심산(熊心山) 혹은 웅신산(熊神山)은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이맥(李陌)의 태백일사(太白逸史)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를 보면, “고리군의 왕 고진(高辰, 필자주 : 해진이다)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이고, 옥저후 불리지(弗離支)는 고진(해진)의 손자이다. 모두 도적 위만을 토벌함에 있어 공을 세워 봉함을 받은 바라. 불리지가 서압록(西鴨淥, 필자주 : 서압록이라는 강을 말하는지, 서쪽의 압록강을 말하는지, 압록강 서쪽을 말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을 지나다가 우연히 하백의 딸 유화(柳花)를 만나 즐겨 고주몽(필자주 : 해주몽이다)을 낳게 하였는데, 때는 임인 5월 5일이라. 곧 한(漢)나라 불릉(弗陵) 원봉(元鳳) 2년(B.C.79)이다. 불리지가 죽으니 유화는 아들 주몽을 데리고 웅심산(熊心山, 필자주 : 삼국유사에는 웅신산이라 하였다)으로 돌아왔으니 지금의 서란(舒蘭)이다.
주몽이 성장하여 사방을 주유하다가 가섭원(필자주 : 동부여를 말함이다)을 택하여 그곳에서 살다가 관가에 뽑혀 말지기로 임명되었는데, 얼마 안 되어 관가의 미움을 받아 오이, 마리, 협보와 함께 도망하여 졸본(卒本)으로 왔다.
때마침 부여왕(필자 : 졸본부여 2대 부여무서왕을 말하는 것이다)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주몽이 마침내 사위(부마, 필자주 : 둘째공주와 혼인했다고 한다)가 되어 대통을 이으니 이를 고구려의 시조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상황을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기록해 놓았는데, 삼국유사의 압록강변 웅신산(熊神山)과 태백일사의 압록강변 웅심산(熊心山)은 같은 산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런데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고대의 요동(遼東)은 지금의 북경(北京) 일원을 말하는 것이고, 고대의 마자수(압록강)는 지금의 북경 북쪽을 흐르는 백하(白河)를 말하는 것이고, 살수는 지금의 조하(潮河)를 말하는 것으로서 일반적으로 두 강이 합류하는 지금의 밀운수고(密雲水庫) 부근을 압록강이라 하였다.
따라서 유화의 고향인 압록강변 웅신산(또는 웅심산)은 지금의 북경 동북쪽 밀운수고 부근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고, 고구려 왕릉들의 조성지인 “고국(故國)” 역시 그 부근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기록되어 있는 고구려 왕릉들의 조성위치를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다.
시조 추모왕(鄒牟王) : 용산(龍山) : 도읍 졸본(홀본)
※ 호태왕비문에는 홀본(忽本) 동쪽에서 황룡을 타고 승천하였다고 하였다.
2대 유리명왕(瑠璃明王) : 두곡동원(豆谷東原) : 도읍 국내성
3대 대무신왕(大武神王) : 대수촌원(大獸村原)
4대 민중왕(閔中王) : 민중원석굴(閔中原石窟)
5대 모본왕(慕本王) : 모본원(慕本原)
6대 태조대왕(太祖大王) : 기록없음
7대 차대왕(次大王) : 기록없음
8대 신대왕(新大王) : 고국곡(故國谷)
9대 고국천왕(故國川王) : 고국천원(故國川原)
10대 산상왕(山上王) : 산상릉(山上陵) : 도읍 환도성
11대 동천왕(東川王) : 시원(柴原) : 도읍 평양성
12대 중천왕(中川王) : 중천지원(中川之原)
13대 서천왕(西川王) : 서천지원(西川之原)
14대 봉상왕(烽上王) : 봉산지원(烽山之原)
15대 미천왕(美川王) : 미천지원(美川之原)
16대 고국원왕(故國原王) : 고국지원(故國之原) : 도읍 평양동황성
17대 소수림왕(小獸林王) : 소수림(小獸林)
18대 고국양왕(故國壤王) : 고국양(故國壤)
이후에는 고구려왕릉 조성위치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지 않고, 한 결 같이 그 기준 위치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지도 않다. 즉 당시의 도읍인 국내성, 환도성, 평양성 등으로부터의 방향이나 거리 등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고 왕릉 조성지 자체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19대 광개토대왕부터는 그 마저도 기록되어 있지 않아 왕릉의 조성위치에 대하여 전혀 알 수가 없다.
☆ 지금 한반도 압록강 북쪽 집안의 태왕릉이라는 고총과 장군총이라는 고총은 고구려 광개토왕릉과 장수왕릉이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요동반도는 고대 왜국의 강역이었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19대 광개토왕(호태왕)부터 왕릉 조성 위치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은 이유를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추정해본다면, 고구려는 16대 고국원왕 때인 342년에 전연 모용황의 침공을 받아 환도성을 함락 당하고 선왕인 15대 미천왕의 유골을 탈취당한 적이 있어, 그때의 쓰라린 경험 때문에 왕릉 조성지에 대하여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미천왕 때 고구려의 도읍은 평양성(平壤城)이었다.
따라서 일반적인 왕조의 관행대로라면 미천왕의 능이 조성된 미천지원(美川之原)은 당시의 도읍이었던 평양성 부근에 위치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전연 모용황이 환도성을 함락시킨 후 돌아갈 때 고구려의 반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고국원왕의 선왕(아버지)인 미천왕의 유골을 파 가져갔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필자도 혹시 이 기록이 오기가 아닐까 생각하여, 모용황이 파 가져갔던 고구려 선왕의 유골은 환도성에 도읍했던 시기에 조성된 10대 산상왕의 유골을 파 가져갔을 것으로 추정했었다.
왜냐하면 환도성에서 평양성까지는 천리나 떨어진 곳이고, 당시 전연 모용황은 평양성까지는 침공하지 않고 환도성만 함락시킨 후 선왕의 유골과 왕의 어머니인 주씨 그리고 왕비를 포로로 잡아 돌아갔다고 하기 때문에 평양성 부근에 조성되었을 미천왕의 유골을 파 가져갈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전연 모용황이 파 갔던 유골이 고구려 15대 미천왕의 유골이었던 것이 사실이라면, 미천왕의 능이 조성된 미천지원(美川之原)이 평양성 부근에 위치했던 것이 아니라 환도성(丸都城) 부근에 위치했었다는 말이 되고, 또한 전연 모용황의 침공을 받고 환도성을 함락 당했던 당사자였던 16대 고국원왕의 능도 당시의 도읍이었던 평양 부근에 조성하지 않고 고국지원(故國之原)에 조성했고, 그 아들인 18대 고국양왕의 능도 고국양(故國壤)에 조성되는 것이다.
이를 보면 고구려 중기 이후의 고구려 왕릉들은 일정한 장소 즉 "고국(故國)" 부근에 조성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필자는 졸본 동쪽 용산에 조성한 시조 추모왕릉(주몽왕릉)을 비롯한 2대 유리왕릉, 3대 대무신왕릉 등 일부 왕릉을 제외하고는, 많은 고구려왕릉들이 “고구려고국(高句麗故國)” 즉 지금의 북경 동북쪽 밀운수고 부근에 조성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된 것이다.
이는 신당서 발해전에, “고구려의 옛 땅(高句麗故地)으로서 서경(西京)을 삼으니 압록부인데, 신주, 환주, 풍주, 정주 4주를 다스린다(高句麗故地爲西京曰鴨淥府 領神,桓,豊,正四州)”고 기록되어 있었고,
요사에도 “녹주압록군절도는 본래 고구려고국(高句麗故國)인데, 발해에서는 서경압록부(西京鴨淥府)라고 불렀다” “환주(桓州)는 고구려의 중도성(中都城, 필자주 : 환도성을 말하는 것이다)이다.......(녹주압록군절도의) 서남쪽 2백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즉 고구려고국(高句麗故國)은 압록강과 가까운 환도성, 안시성이었던 지금의 북경시 회유구 발해진으로부터 동북쪽으로 200리 지점을 말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곧 지금의 밀운수고 부근지역으로 비정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구려왕릉들은 동천왕이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에도 당시의 도읍이었던 평양 부근에 조성했던 것이 아니라 도읍이전과는 상관없이 북부여 해모수 천제의 고향이었으며, 유화태후의 고향이었던 압록강변 “고구려고국(高句麗故國)” 부근에 조성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한 것이다.
[지금도 밀운수고 북쪽에 "영락촌(永樂村)"이라는 곳이 있는데, 혹시 이곳이 원래 광개토왕(호태왕)의 능이 조성된 곳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하고, 많은 고구려 왕릉들은 지금의 북경 동북쪽 밀운수고 부근에서 찾아야 할 것으로 여겨지며, 고구려 왕릉들을 조성했다는 소수림, 동천, 중천, 서천, 미천 등도 지금의 밀운수고 주변 지형과 연결시켜 찾아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필자의 새로운 주장이 역사적 사실로 밝혀질 경우,
앞으로 북경 동북쪽 밀운수고 부근에서 고구려 중기 이후의 왕릉들이 줄줄이 발견될 가능성이 많다.
다만 건국시조인 추모왕(주몽왕)의 능은 옛 졸본(卒本, 필자주 : 홀본이라고도 한다)이었던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 후성진(后城鎭) 부근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고,
2대 유리왕릉과 3대 대무신왕릉 그리고 4대 민중왕릉 등은 당시의 도읍이었던 국내성(연경 영녕진) 부근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기다려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