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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구려 “신성(新城)” 위치찾기 - 최초공개

윤여동 2011. 10. 21. 23:43

 

 

 

윤여동설 - 고구려 “신성(新城)” 위치찾기 - 최초공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13대 서천왕 조를 보면,

  “7년(A.D.276) 여름4월 왕이 신성[新城 혹자는 말하기를 신성은 나라 동북에 있는 큰 진이라 한다]에 가서 사냥을 하다가 백록을 잡았다.

  가을8월에 왕이 신성으로부터 돌아왔다”

  19년(A.D.288) 여름4월에 왕이 신성에 갔다.

  겨울 11월에 왕이 신성으로부터 돌아왔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14대 봉상왕 조를 보면,

  “2년(A.D.293) 가을8월에 모용외가 와서 침노하였다.

  왕이 신성(新城)으로 가서 적을 피하려고 곡림까지 갔는데 모용외가 왕이 달아난 것을 알고 군사를 이끌고 추격하여 거의 잡히게 되매 왕이 두려워하였다.

  이때에 신성성주인 고노자가 기병5백을 거느리고 나와서 왕을 영접하고 적군을 맞받아치니 모용외의 군사가 패하여 물러났다. 왕이 기뻐하여 고노자의 작위를 높여 대형으로 삼고 또한 곡림을 주어 그의 식읍으로 삼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신성이라는 성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16대 고국원왕 5년(A.D.335) 조를 보면, “봄정월에 나라 북쪽에 신성을 쌓았다(築國北新城)

  9년(A.D.339) 연나라 임금 황(모용황)이 내침하여 그의 군사가 신성(新城)까지 이르렀는데 왕이 맹약을 청하니 곧 돌아갔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에야 신성을 쌓았다고 되어 있고, 고구려 강역의 북쪽 방향에 신성이 위치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리하여 김부식도 신성에 대하여 “혹자는 말하기를 신성은 나라 동북에 있는 큰 진이라 한다”고 주를 달아 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고국원왕 5년 조의 신성(新城)이란 “새로운 성을 쌓았다”는 의미이지 “신성(新城)”이라는 성을 이때 쌓은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신성이라는 성은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신성(新城)”은 실제 어디에 위치했던 것일까?

   645년 당태종이 직접 고구려를 침공했을 때의 기록을 보면,

   처음에 이세적이 통정으로부터 요수를 건너 현토를 지나 신성에 이르렀다고 한 것으로 보아 고구려의 신성은 고구려의 서쪽에 위치한 성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후 당나라 군사들이 요동성을 공격하기 위해 요동성으로 집결하자 고구려에서도 신성과 국내성의 보기병 4만명을 보내 지원하게 되는데, 이를 보면 신성과 국내성은 요동성 가까이 위치한 성이었음을 알 수 있고,

   또 요동성을 함락시키고 나서 안시성을 공격하는데 좀처럼 함락시킬 수가 없자 장수들이 안시성을 그대로 두고 지나쳐 오골성을 치고 압록강을 건너 평양으로 진군하자는 의견을 내었는데, 이때 장손무기가 말하기를 “천자께서 친히 원정을 하는 것은 보통 장수들과 달라서 모험을 하면서 요행을 바랄 수는 없습니다. 지금 건안과 신성의 적들이 10만이나 되는데, 우리가 만일 오골성으로 우회한다면 고구려 군사들이 반드시 우리의 배후를 추격할 것이니 먼저 안시를 깨뜨리고, 건안을 빼앗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한 뒤에 군사를 멀리 몰고 나아가는 것이 만전의 계책입니다” 하게 되어 안시성을 공격하였으나 결국 안시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철군하게 되는데, 이때 장손무기가 한 말 중에서도 신성과 건안성이 요동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했던 안시성 부근에 위치한 성이었음을 알게 한다.

  결국 신성, 요동성, 안시성, 건안성, 오골성 등은 고구려의 서쪽으로부터 서남쪽 변경에 위치한 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요동성은 지금의 북경 부근으로 밝혀졌고, 졸본은 하북성 적성현 후성진(后城鎭) 일원, 안시성(환도성)은 북경 북쪽 회유구 발해진 일원, 국내성은 연경구 영녕진 일원으로 추정되므로 신성은 그 부근에 위치했을 것인데, 지금 하북성 장가구시 선화고성이 옛 고구려의 신성이 아니었나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