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고구려의 살수(薩水)는 지금의 북경 동북쪽 조하(潮河) - 최초공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20년(A.D.37) 조를 보면, “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이를 멸망시켰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27년(A.D.44) 조를 보면, “가을 9월 한나라 광무제가 군사를 보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정벌하여 그 땅을 취하여 군현으로 만드니 살수(薩水)이남 지역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 고구려 대무신왕이 최리의 낙랑국을 쳐서 멸망시키고 그 낙랑국 땅을 차지하자 7년 뒤에 후한의 광무제가 군사를 보내 옛 낙랑국 땅의 일부인 살수이남 땅을 고구려로부터 다시 탈환하여 낙랑군을 부활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리하여 필자는 전한 무제가 기원전 108년에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나누어 설치했던 낙랑군은 전한낙랑군이라 하고, 최리가 전한낙랑군 땅을 차지하고 왕위에 올랐던 나라를 낙랑국이라 하며, 후한 광무제가 살수이남에 다시 설치한 낙랑군을 후한낙랑군이라 부르는데, 전한낙랑군을 비롯한 후한낙랑군 그리고 살수의 위치에 대하여는 논란이 많아 아직 정설이 없다.
그러나 살수를 정확히 찾을 수 있다면 그 남쪽에서 후한낙랑군의 위치도 자연스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살수는 보살살(薩)과 물수(水)로 표기되고 있는데, 삼국사기에서 단 다섯 번만 언급된다.
살수(薩水)에 대한 첫 기록은 위에 언급한 대무신왕 27년(A.D.44)조의 기록이고,
두 번째 기록은 태조대왕 4년(A.D.56)조의 "가을 7월 동옥저를 쳐서 그 땅을 빼앗아 성읍을 만들고, 동쪽으로는 창해까지, 남쪽으로는 살수(薩水)에 이르기까지 국경을 확장하였다"라는 기록이며,
세번째 기록은 신라본기 소지왕 16년(A.D.494) 조에, “가을7월 장군 실죽 등이 살수(薩水)벌판에서 고구려와 전투했으나 이기지 못하여 퇴각하여 견아성을 지켰는데 고구려군에게 포위당했다. 백제왕 모대(동성왕)가 군사 3천을 보내포위를 풀어주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기는 한데 이때 신라가 살수까지 진출하여 고구려와 전쟁을 했다는 것이 통 믿어지지 않아 혹시 패수의 오기가 아닌가 싶기는 하지만 하여튼 그렇게 기록되어 있고,
네 번째 기록은 백제본기 동성왕 16년(A.D.494) 조에, “가을7월 고구려와 신라가 살수(薩水)벌판에서 교전하여 신라가 이기지 못하고 견아성으로 퇴각하여 방어하고 있다가 고구려군에게 포위당하매 왕이 군사3천을 보내 포위를 풀어주었다” 라는 신라본기 소지왕 조의 기록과 동일한 사건에 관한 기록이다.
다섯 번째 기록은 고구려본기 영양왕 23년(A.D.612) 조에서 수양제가 고구려를 침공하여 우문술이 군사들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평양성으로 갈 때인 6월 조에 살수(薩水)를 건너갔다고 하고, 또 퇴각할 때인 7월 조를 보면, “우문술의 군사가 살수(薩水)에 이르러 군사들이 반쯤 건넜을 때에 우리 군사가 후방으로부터 그들의 후미부대를 공격하니 적장 우둔위장군 신세웅이 여기서 전사하였다. 이때에 여러 부대들이 한꺼번에 무너져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장수와 군졸들이 도망치는데 1일1야(一日一夜)에 압록강까지 450리를 갔다...............처음 9군이 요동에 도착했을 때는 총30만 5천명이었는데 요동성으로 돌아갔을 때는 겨우 2,700명 뿐이었다..........양제가 화가 나서 우문술 등을 쇠사슬로 묶어가지고 계묘일(7월25일)에 돌아갔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그 살수의 위치를 확실하게 알지 못하고 있어 수 양제가 고구려를 침공할 때의 기록을 세밀히 분석하여 그 위치를 찾아볼 필요가 있다. 즉 이때 수나라 군사들이 어디를 출발하여 어느 길을 따라 어디로 향하였고, 어느 길을 따라 고구려 평양성까지 왔다가 톼각하였는지를 알면 살수를 찾을 수 있을 것이고, 그 남쪽에서 후한낙랑군의 위치도 찾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수 양제가 612년 정월에 고구려를 침공하기 위하여 출발한 곳은 탁군이었다.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탁주라고 한다.
이때 수 양제는 고구려의 요동성을 향하여 진군했는데, 요동성은 지금의 북경 부근으로 비정된다.
따라서 탁주에서 출발하여 동북쪽에 있는 고구려의 요동성을 향하여 가려면 요수(현 영정하)를 건너야 요동성을 공격할 수 있다.
그리하여 결국 수나라군은 요동성을 함락시키고는 평양을 향하여 진군하게 되는데, 이때 우문술이 이끄는 9군은 을지문덕의 유인작전에 속아 압록강과 살수를 건너 평양성으로 향하여 평양성에서 (서쪽으로) 30리 떨어진 곳에 진을 쳤으나 군사들의 사기가 저하되어 있고(사실은 군량이 떨어져 굶고 있었다), 평양성이 험하고 튼튼하여 빠른 기간에 함락 시킬 수 없다고 판단하고는 ‘만약 군사를 돌려 세운다면 왕을 모시고 황제가 있는 곳으로 가서 예방하겠다’는 을지문덕의 말을 핑계삼아 살수와 압록강을 되건너 요동으로 철군하게 되는데, 이때 수나라군은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게 되어 거의 전멸당하게 된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도읍이었던 평양성은 어디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일까?
고구려의 평양성은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부근으로 비정되므로 우문술은 요동성이었던 지금의 북경 부근을 출발하여 동북쪽으로 향하여 백하(압록강 :밀운수고)를 건너고, 조하(潮河)를 건너 하북성 승덕시 부근까지 갔을 것인데, 그곳은 산세가 매우 험하므로 강을 따라 갔을 것이다.
즉 지금의 북경을 출발하여 동북쪽으로 밀운수고에 도착한 후 조하(살수)를 타고 올라가 고북구를 통과한 후 다시 방향을 바꾸어 난평을 지나 하북성 승덕시 부근에 위치했을 평양성으로 향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옛날 을지문덕 장군이 살수의 강을 막아 물을 저장하여 두었다가 수나라군에게 수공을 펼쳤다고 전설처럼 전해지는 살수는 바로 지금의 조하(潮河)였고 수공을 펼친 곳은 지금의 고북구 였을 것이다.(사실 사서에는 수공을 펼쳤다는 기록은 없고, 강을 건너고 있는 수나라군을 공격하였다는 기록만 전한다)
그런데 삼국사기 잡지 제6 지리 편을 보면, 삼국시대 이름은 전해졌으나 그 위치를 자세히 알 수 없는 곳(三國有名未詳地分) 356개 지명 중에 살수(薩水)가 들어 있으니 삼국사기 편찬당시 살수라는 지명이 이미 다른 이름으로 바뀌어 있어 그 위치를 알 수 없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신라말 또는 고려초에 이미 청천강으로 그 이름이 바뀌어 버렸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