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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수 양제의 고구려 침공로와 당 태종의 고구려 침공로 - 최초주장

윤여동 2012. 6. 18. 07:39

윤여동설 - 수 양제의 고구려 침공로와  당 태종의 고구려 침공로 - 최초주장 

 

 

수 양제와 당 태종은 직접 고구려를 침공했던 사람들이다.

군사들의 출발지가 탁군(涿郡)과 정주(定州)로 달랐을 뿐 고구려 요동성(遼東城)을 향하여 진군했던 것도 같고, 진군 도중에 갈석산(碣石山)에 올랐던 것도 같으며, 결국 고구려 침공에 실패했던 것도 같다.

 

 

삼국사기 고구려 영양왕 22년(A.D.611)조를 보면,

“봄2월에 수나라 양제가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여름4월에 양제의 행차가 탁군(涿郡 : 지금의 탁주시 부근)의 임삭궁(臨朔宮)에 이르니 사방의 군사들이 모두 탁군으로 모여들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4년(A.D.645) 조를 보면,

“봄 정월에 당 태종이 정주(定州)를 떠나서..........” 라고 기록함으로써 수 양제의 출발지는 탁군이었고, 당 태종의 출발지는 정주였음을 알게 한다.

 

  ☆ 수서 권4 제기 제4 양제 하 대업 8년(A.D.612) 조를 보면,

“좌 제1군은 누방도, 제2군은 장잠도, 제3군은 해명도, 제4군은 개마도, 제5군은 건안도, 제6군은 남소도, 제7군은 요동도, 제8군은 현토도, 제9군은 부여도, 제10군은 조선도, 제11군은 옥저도, 제12군은 낙랑도로 진군하고,

우 제1군은 점선도, 제2군은 함자도, 제3군은 혼미도, 제4군은 임둔도, 제5군은 후성도, 제6군은 제해도, 제7군은 답돈도, 제8군은 숙신도, 제9군은 갈석도, 제10군은 동이도, 제11군은 대방도, 제12군은 양평도로 진군하여 평양으로 총집결하라”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 평양성까지 진군했던 것은 우문술이 지휘하는 좌9군의 30만 5천명의 군사들 뿐이었다.

 

 

   그리고 영양왕 23년(A.D.612) 조를 보면, 수양제가 군사들을 출발시키기 전에 상건수(桑乾水 : 지금의 상간하)가에서 토지신에게 제사를 지냈고, 임삭궁 남쪽에서 상제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계성 북쪽에서 마조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어 수 양제가 고구려를 침공하기 위하여 군사들을 출발시킨 곳이 상건수변에 있는 탁군(涿郡)임을 알게 한다.

그리고 요동을 향하여 진군한 수나라군은 요수 서쪽에 도착한 후 간신히 요수를 건너 요동성으로 집결하여 고구려 요동성을 공격했으나 요동성은 좀처럼 함락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수나라군은 다시 길을 나누어,

좌익위대장군 우문술군 : 부여도

우익위대장군 우중문군 : 낙랑도

좌효위대장군 형원항군 : 요동도

우효위대장군 설세웅군 : 옥저도

우둔위장군 신세웅군 : 현토도

우어위장군 장근군 : 양평도

우무후장군 조효재군 : 갈석도

탁군태수검교좌무위장군 최홍승군 : 수성도

검교우어위호분낭장 위문승군 : 중지도로 나와서 압록강 서쪽에 집결하였다가 다시 압록강을 건너 동쪽으로 향하여 살수(薩水)를 건너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平壤城)에서 30리 떨어진 지점까지 진군하여 진을 치고 평양성을 공격할 준비를 하게 된다.

  그런데 이때 을지문덕 장군이 사람을 보내 우문술에게 거짓으로 항복하겠다고 하자 우문술은 그를 믿고(사실 이때 수나라군도 식량이 떨어져 굶고 있었다) 전군을 철군시키게 되고, 고구려군은 철군하는 수나라군을 뒤쫓아 수나라군이 살수(薩水)를 반쯤 건넜을 때 공격하자 수나라군은 대오가 무너지게 되었고, 수나라 군사들은 각자 살길을 찾아 도망치게 되어 하루밤 하루낮에 압록강(필자주 : 요동성의 오기일 것이다)까지 450리[필자주 : 지금의 고북구에서 북경까지의 거리가 120km쯤되는데,  옛날의 거리 단위인 10리를 2.3km로 환산하면 500여리쯤 된다] 를 갔다고 하고, 9군이 처음 요동에 도착했을 때는 30만 5천명이었으나 평양까지 갔다가 요동으로 다시 되돌아온 군사가 겨우 2,700명 뿐이었다고 하니 고구려군과의 전투 중에 30만명 이상이 죽거나 포로로 잡혔다는 말이 되니 이때 수나라군은 처절하게 패전했던 것이다.

그러자 화가 난 수 양제는 우문술 등을 쇠사슬로 묶어 612년 7월 25일 계묘일에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4년(A.D.645) 조를 보면,

  645년 정월에 정주(定州)를 출발한 당 태종은 요동을 향하여 진군하여 요택과 요수를 건너 마수산(馬首山)에 진을 치고는 요동성을 공격하여 간신히 함락시킨 후 안시성으로 향하였으나 안시성은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고 10월에 이르자 날씨가 추워져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철군하게 되는데, 이때 당 태종은 조그만 성 하나를 함락시키지 못한 것이 창피스러웠던지 비록 적장이지만 안시성을 잘 지킨 공을 치하한다며 안시성 성주에게 상품으로 비단 백필을 보내주는 객기를 부려보기도 한다. 이때 당나라군은 요수는 건넜으나 압록강은 건너보지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