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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천년의 의문 “요택(遼澤)”의 위치찾기 - 최초주장

윤여동 2012. 5. 28. 10:10

윤여동설 - 천년의 의문 “요택(遼澤)”의 위치찾기 - 최초주장

 

 

  요택(遼澤)의 위치는 지금까지 의문의 장소였다.

  정확한 요택의 위치를 찾지 못해 우리의 역사해석은 한없는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가야만 했다.

  그런데 자치통감에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했다가 안시성에서 철군할 때의 기록이 일자별로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자치통감 권198 당기14 태종문무대성대광효황제 조를 보면,

“․(貞觀 十九年 九月) 癸未 敕班师 先拔辽․蓋二州户口渡辽 乃耀兵於安市城下而旋

(서기 645년 9월18일 (안시성에서) 경사로 회군할 것을 명하였다.

요주, 개주 두 주의 백성을 먼저 요수를 건너게 하고 안시성 아래에서 시위하고 개선하였다)

 

․乙酉 至辽东(9월20일 요동에 이르다)

 

☆ 안시성에서 요동성까지 2일이 걸렸다.

 

․丙戌 渡辽水 辽泽泥潦车马不通 命长孙无忌将万人剪草填道 水深处以车为梁

(9월21일 요수를 건너다. 요택이 진흙과 웅덩이로 수레와 말이 통할 수 없었다. 장손무기에게 명하여 1만 명으로 하여금 풀을 베어 길에 펴고 물이 깊은 곳은 수레로 다리를 만들었다)

 

․冬十月 丙申朔 上至蒲沟驻马 督填道 诸军渡渤错水[蒲溝渤錯水皆在遼澤中] 暴風雪 士卒沽濕多死者 勅然火於道以待之

(10월1일 포구에 도착하여 행군을 멈추고 길 메우기를 독려하였다. 모든 군사가 발착수[주: 포구와 발착수는 모두 요택 가운데 있다]를 건너니 폭풍이 불고 눈이 내려 사졸들의 옷이 젖어 많은 사람들이 죽으므로 명을 내려 길에 불을 피우고 (눈보라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 요수를 건너고 요택을 지나 포구에 도착할 때까지 10일이 걸렸다.

 

․丙午 至营州 诏辽东战亡士卒骸骨並集柳城东南 命有司设太牢 上自作文以祭之

(10월11일 영주에 도착하여 요동전쟁에서 사망한 사졸의 유해를 유성 동남에 모으고 유사에게 명하여 큰 울타리를 만들고 스스로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

 

☆ 포구로부터 발착수를 통과하여 영주 유성에 도착하는데 또 10일이 걸렸다.

  

․丙辰 上聞太子奉迎將至 從飛騎三千人馳入臨渝關 道逢太子 上之發定州也 指所御褐袍

(10월21일 황제가 태자가 영접을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음을 듣고 날랜 기병 3천을 이끌고 임유관으로 들어가 길에서 태자를 만났다. 황제가 출발했던 정주에 이르러서야 옷을 갈아입었다)”

 

☆ 영주(유성)에서 임유관을 통과하여 정주까지 가는데 또 10일이 걸렸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은 당 태종이 안시성을 공격하다가 날씨가 추워져 더 이상 전쟁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철군을 명령한 후 요동성으로 진군하던 길을 따라 퇴군할 때의 기록이다.

  기록을 요약해보면,

  9월 18일 안시성을 출발하여 요동까지 가는데, 2일이 걸렸고,

  9월 21일 요동을 출발하여 요수를 건너 요택을 통과하기 위하여 풀을 베어 길을 메꾸고 웅덩이에는 수레로 다리를 놓아가며 나아가 포구에 도착할 때까지 10일이 걸렸고,

  10월 1일 포구로부터 길을 메꾸며 나아가 발착수를 건너 영주까지 또 10일이 걸렸으며,

  10월 11일 영주에 도착하여 유성 동남쪽에서 전사자의 유해를 묻고 출발하여,

  10월 21일에 출발지 정주에 도착하기까지 또 10일이 걸렸다.

 

  위 기록 속에는 많은 지명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안시성, 요동, 요수, 요택, 포구, 발착수, 영주, 유성, 임유관, 정주 등이다.

  그런데 지금 위 지명들은 아직 그 위치가 어디인지 아무도 알지 못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밝혀졌다.

  역사 기록과 위 지도를 잘 비교해 보면 그 진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