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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한반도 북한 평양은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이 아니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4. 9. 22:54

윤여동설 - 한반도 북한 평양은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이 아니다 - 최초주장

 

 

 피서산장 옥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조를 보면,
 『서기 666년 겨울12월 (당)고종이 이세적으로 요동도행군대총관 겸 안무대사를 삼고, 사열소상 백안륙과 학처준으로 이를 보좌케 하고, 방동선과 설필하력으로 요동도행군부대총관 겸 안무대사를 삼고 기타 수륙군 모든 부대의 총관들과 전량사들인 두의적, 독고경운, 곽대봉 등은 모두 이세적의 지휘를 받게 하고 하북 여러 주들의 조세는 모두 요동으로 보내어 군용에 사용하도록 하였다.
  26년 정묘(A.D.667) 가을9월 이세적이 신성을 함락시키고 설필하력을 시켜 지키게 하였다.
  앞서 이세적이 요수(遼水)를 건너와서 모든 장수들에게 이르기를 "신성은 고구려 서쪽 변경의 요충이기 때문에 이것을 먼저 빼앗지 않으면 다른 성들을 쉽게 빼앗을 수 없다" 하고 신성을 치니 신성사람 사부구 등이 성주를 결박하여 가지고 성문으로 나와서 항복하였던 것이다.
  이세적이 군사를 이끌고 진격을 계속하여 16개성이 모두 항복하였다.
  이때 방동선과 고간이 아직 신성에 있으므로 막리지가 군사를 보내어 그들의 병영을 습격하였더니 좌무위장군 설인귀가 우리군사를 쳐서 깨뜨렸다.
  고간이 금산(金山)으로 나와서 우리군사와 싸워 패하였다.
  우리 군사가 이긴 기세를 타서 패배한 당군을 추격하였더니, 설인귀가 군사를 이끌고 측면으로 공격하여 우리 군사 5만여 명을 죽이고 남소성(南蘇城), 목저성(木 城), 창암성(蒼 城)등 3개성을 함락시키고 천남생의 군사와 합세하였다.
  곽대봉은 수군을 이끌고 패수(浿水)를 따라 평양(平壤)으로 왔다.

 

☆ 중국 세력들의 고구려 침공루트는 옛부터 변하지 않는다. 즉 육군은 요수를 건너 요동 또는 현토를 경유하여 동쪽으로 공격하는 것이고, 수군은 산동반도에서 서북쪽으로 발해를 건너 패수를 타고 올라가는 것이다.
  이는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공격할 때, 수 양제가 고구려를 공격할 때, 당 태종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 모두 같은 전술이었다.
 
  이세적이 별장 풍사본을 시켜 군량과 병기를 싣고 가서 곽대봉을 지원하게 하였는데 배가 풍랑을 만나 부숴져 기일을 놓쳤으므로 대봉의 군중에서 군사들이 굶주려 이세적에게 편지를 보내려다가 적에게 그것이 들어가 사실이 알려질까 두려워 이합시를 지어 이세적에게 보냈더니, 이세적이 화를 내며 "군사의 상황이 급박한 이때에 시가 무엇인가? 당장 목을 베어 버리겠다" 하였다.
  행군관기통사 사인 원만경이 시의 뜻을 해석하여 주니 이세적이 그 때에야 다시 식량과 병기를 보내 주었다.
  만경이 격문을 써서 천남건에게 보내어 말하기를 "압록강(鴨 江)의 요충을 지킬 줄을 모르는가?" 하였다. 천남건이 답하기를 "삼가 명령대로 하겠다"하였다.
  고종이 이 말을 듣고 만경을 영남으로 귀양 보냈다. 
  학처준이 안시성(安市城) 밖에서 미처 군사대열을 짓지 못하였을 때에 우리 군사 3만 명이 들이치니 당나라 군사들이 크게 당황하였는데, 처준이 의자에 앉아서 식사 중에 있다가 정예한 군사를 선발하여 우리 군사를 쳐서 깨뜨렸다.
  27년 무진(A.D.668) 봄정월 고종이 우상 유인궤로 요동도부대총관을 삼고, 학처준과 김인문 등을 보좌관으로 하였다,
  2월 이세적 등이 우리의 부여성(夫餘城)을 함락시켰다.
  설인귀가 이미 금산에서 우리 군사를 격파하고 이긴 기세를 타서 군사 3천명을 인솔하여 부여성을 치려하니 여러 장수들이 자기편의 군사가 적다하여 중지하라고 하였다.
  설인귀가 말하기를 "군사는 반드시 많아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군사를 어떻게 쓰느냐에 달렸을 뿐이다"하고 드디어 자기가 앞으로 나가 진두에 서서 우리 군사와 싸워 이기고 우리 군사를 죽이고 사로잡았으며 또한 부여성을 함락시키니, 부여천 안에 있는 40여성이 모두 자청하여 항복하였다.
 
 시어사 가언충(賈言忠)이 고종이 내린 임무를 마치고 요동으로부터 돌아가니, 고종이 묻기를 "군대내부 상황이 어떠한가?" 하니 가언충이 대답하기를 "이번 전쟁은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전일에 선제(당 태종)께서 고구려의 죄를 추궁하였을 때에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은 적들에게 빈틈이 없었던 까닭입니다. 속담에 '군대는 동조자가 없으면 중도에 회군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제 남생이 형제끼리 다투어 우리의 앞잡이가 되었으므로, 적의 내부상황을 우리가 훤히 알게 되었으며, 또한 장수들은 충성스럽고, 군사들은 힘을 다하고 있기 때문에 제가 반드시 이긴다고 말씀 올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구려의 비기에 '900년이 될 때에 80대장에게 멸망당할 것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고씨가 한(漢)나라 때부터 나라가 있어 지금 꼭 900년이 되었고, 이적(이세적)의 나이가 지금 80세 입니다. 적들은 흉년을 거듭 만났으며, 백성들은 늘 약탈당하고 팔려가며 지진으로 땅이 갈라지며 이리와 여우가 성에 들어오고 두더지가 문지방 밑에 구멍을 뚫으며 인심이 사나우니 이번 가면 다시 가야 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 가언충이 고구려가 건국된 지 900년이 되었다고 말한 것은 기원전 232년 북부여 해모수가 천제에 오른 때로부터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까지를 말한 것이다.

 

 

  천남건이 다시 군사 5만을 보내어 부여성을 구원하는데, 설하수(薛賀水)에서 이세적 등과 마주 싸우다가 패하여 3만여 명이 죽었고, 이세적은 대행성(大行城)으로 진격하였다.

 

☆ 기록 속의 부여란 동부여를 말하는 것으로서 동부여는 내몽골 정람기 부근에 위치했던 나라였다.

 

 
  여름 4월 혜성이 필성과 묘성 사이에 나타났다, 당나라 허경종이 말하기를 "혜성이 동북방에 나타나는 것은 고구려가 장차 멸망할 징조이다" 라고 하였다.
  가을9월 이세적이 평양을 함락 시켰다.
  앞서 이세적이 이미  대행성에서 이기니 다른 방면으로 나갔던 여러 부대들이 모두 이세적에게로 모여 압록책으로 진군하여 오므로 우리 군사가 대항하여 싸우다가 이세적 등이 이겨 2백여 리를 쫓아와서 욕이성(辱夷城)을 함락시키니 여러 성들에서 도망치고 항복하는 자가 많이 발생하였다.
  설필하력이 먼저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 밖까지 도착하고 이세적의 군사가 뒤따라 와서 한 달이 넘도록 평양을 포위하였다.

 

 

☆ 평양성은 지금의 한반도 북한 평양이 아니라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보장왕이 천남산을 보내어 장수 98명과 함께 백기를 들고 이세적에게 항복하니 이세적이 예를 갖추어 맞아 들였다.  그러나 천남건은 성문을 닫고 항거하여 지키면서 자주 군사를 보내 나가 싸웠으나 모두 패하였다.
  남건이 중 신성(信誠)에게 군사에 관한 일을 맡겼는데, 신성이 소장인 오사, 요모 등과 함께 이세적에게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어 내응할 것을 알리고 5일 후에 신성이 성문을 열어 놓으니 이세적이 군사를 풀어 성위에 올라 북을 두드리고 성에 불을 질렀다.
  남건은 제 손으로 죽으려고 하였으나 죽지 못하였고, 당나라 군사가 왕(보장왕)과 천남건 등을 붙잡았다.    겨울10월 이세적이 돌아가려 할 때 당나라 고종이 그에게 명령하여 우선 고구려 임금 등을 데려다가 소릉(당 태종의 능)에 바치고, 군사의 위풍을 갖춘 다음 개선가를 부르면서 장안으로 들어와 태묘에 바치게 하였다.
  겨울12월 당 고종이 함원전에서 포로들을 받는 의례가 있었다.
  고구려왕은 정치를 그가 한 일이 아니라 하여 사면하고 사평태상백원외동정을 삼고, 천남산은 사재소경을 삼고, 중 신성은 은청광록대부를 삼고, 천남생은 우위대장군을 삼았다.
  이세적 이하에게는 벼슬과 상을 차등 있게 주었다.
  그리고 천남건은 검주로 귀양 보냈다.
  고구려 지역의 5부 176성 69만여 호를 9도독부 42주 1백1현으로 만들고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여 통치하게 하였다.
  우리 장수들 중에서 공이 있는 자들을 발탁하여 도독, 자사, 현령을 삼아 중국 사람들과 함께 정치를 하도록 하고, 우위위대장군 설인귀를 검교안동도호를 삼아 군사 2만을 거느리고 이 지역을 진무하게 하니 이 때가 고종 총장 원년 무진년(A.D.668)이었다』
    이렇게 대제국 고구려가 어이없이 멸망하고 말았는데, 상황이 불리해져 갔을 때 보장왕이 왜 평양성을 빠져나와 피신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이때 고구려는 설령 평양성을 잃는다고 하더라도 아직 엄청나게 큰 땅을 가지고 있었을 것인데 그러한 고구려가 갑자기 항복해 버리는 것이다.
  하여튼 고구려의 멸망은 수수께끼이며, 안타까운 일인데, 우리는 지금 이 기록을 한반도 북한 평양을 중심으로 역사를 해석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고구려의 평양성은 지금의 한반도 북한 평양이 아니라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으로서 그곳이 옛 왕검성이었고, 현토군은  장가구 부근을 말하는 것이고, 부여는 내몽골 정람기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요수는 북경 서북쪽에 위치한 지금의 관청수고로 흘러드는 양하와 그 하류인 영정하를 말하는 것이고,

  압록강은 지금의 백하, 밀운수고를 말하는 것이며,

  살수는 지금의 조하를 말하는 것이고,

  패수는 지금의 난하를 말하는 것으로서 당나라 수군이 평양성을 공격하러 가기 위해서는 산동반도에서 서북쪽으로 발해를 건너 난하를 타고 올라가 지금의 반가구수고를 지나야 한다.  
  그리고 요동은 북경부근을 말하는 것이고, 신성은 장가구 선화고성을 말하는 듯하고, 안시성은 북경 북쪽 발해진을 말하는 것으로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그리고 당나라 수군은 산동반도에서 북서쪽으로 향하여 발해를 건너 난하(패수)를 타고 올라갔던 것이다.
  우리가 인식을 바꾸지 못하고 한반도 북한의 평양을 고구려의 평양성이라 하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해석한다면 천년이 지나도 고구려 역사의 진실을 밝힐 수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