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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요사지리지가 말해주는 요 동경요양부의 위치를 찾아라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3. 26. 22:40

윤여동설 - 요사지리지가 말해주는 요 동경요양부의 위치를 찾아라 - 최초주장

 

 

   우리는 지금 요나라의 동경요양부를 압록강 서북쪽 중국 요녕성 요양(遼陽)으로 비정하여 역사를 해석하고 있는데, 그것은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고 사서들은 말해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 상식을 잠시 접어두고 객관적 입장에서 아래 요사의 기록에 따라 요 동경의 위치를 찾아보자.

 

요사 권38, 지제8, 지리지 2 동경도(東京道)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는 본래 조선(朝鮮)의 땅이다.
  주(周)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석방하여 감옥에서 풀어주자 (기자는) 조선으로 갔고, (무왕은) 이로 인하여 그를 (조선에) 봉했다.  (기자가) 범금팔조(犯禁八條)로서 백성들을 교화하니, (백성들이) 예의를 숭상하고 농사와 양잠으로 부유해져 대문을 닫지 않아도 사람들이 도둑질하지 않았다.
  40여세를 전하여 연(燕)나라가 진번(眞番), 조선(朝鮮)을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어 요새를 설치하였는데, 진(秦)나라 때는 요동의 외곽(외요)에 속하였다.
  한(漢)나라 초기에 연나라 사람 만(滿:위만)이 옛 공지에서 왕이 되었다.
  무제(武帝) 원봉(元封) 3년(B.C.108)에 조선을 평정하고 진번(眞番), 임둔(臨屯), 낙랑(樂浪), 현토(玄菟)의 네 군(郡)을 설치하였다.
  후한(後漢) 때에는 청주(靑州)에 속하기도 하고 유주(幽州)에 속하기도 했다.
  요동군과 현토군은 연혁이 일정하지 않은데, 한나라 말에 공손도(公孫度)가 점거하여 그 아들 공손강(公孫康), 손자 공손연(公孫淵)에게 전했는데, 자칭 연왕(燕王)이라 하고 소한(紹漢)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는데, 위(魏)나라가 멸망시켰다.
  진(晉)나라가 고(구)려를 함락시켰고, 후에는 모용수(慕容垂)에게 귀속하였다. 아들 보(寶)는 고구려 왕 안(광개토대왕)을 평주목(平州牧)에 임명하였다.
  원위(元魏: 북위) 태무제(太武帝)가 그들이 거주하는 평양성(平壤城)에 사신을 보냈으니, 요(遼)나라 동경(東京)이 바로 이곳이다.

 

☆ 고구려의 평양성이 곧 요나라의 동경이라는 기록을 우리의 역사 상식대로 해석하면  평양이 요나라의 동경이었다는 말이 되니 순 엉터리 기록이 되는 것인데, 요사에는 왜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것일까? 물론 고구려의 평양성이 곧 요 동경이었다는 이 요사의 기록은 틀린 것이다.

 

[요 5경]
                                                상경임황부

                                         (내몽골 상도현부근)                                    

 

 


            서경대동부                 중경대정부                  동경요양부 

            (대동부근)          (장가구시 양원현부근)         (북경부근)


 

 

                                                남경석진부

                                         (하북성 역현부근)

 

 

 

  당(唐)나라 고종(高宗)이 고구려를 평정하고 여기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였지만, 나중에 발해(渤海)의 대씨(大氏) 소유가 되었다.

 

☆ 안동도호부가 처음 설치된 곳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이었으나 상황에 따라 수 차례 장소를 옮겨 다녔다.
   
  대씨는 처음 읍루의 동모산(東牟山)을 차지하고 있었다.
  무후(武后: 측천무후) 만세통천(萬歲通天) 년간에 핍박받는 거란(契丹) 진충(李盡忠)을 위해 걸걸중상(乞乞仲象)이 요수(遼水)를 건너 스스로 지키니 무후가 진국공(震國公)에 봉하였다.

  아들 조영(大祚榮)으로 전해져 도읍을 세우고 자칭 진왕(震王)이라 하고 발해 북쪽을 병탄하니 국토가 사방 5천리나 되고, 병사가 수십만이나 되었다.
  중종(中宗)이 (발해가 도읍한 곳을) 홀한주(忽汗州)라 하고 (대조영을) 발해군왕(渤海郡王)에 봉했다.
  12세를 지나 대이진 때에 참람되게 연호를 반포하고 궁궐을 짓고, 5경(京) 15부(府) 62주(州)를 두었으니 요동에서 번성한 나라가 되었다.  홀한주는 바로 옛 평양성으로, 중경현덕부 (中京顯德府)라고도 불렀다.

 

☆ 고구려의 평양성과 발해의 중경현덕부는 비록 서로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는 있었지만, 발해의 중경현덕부가 곧 고구려의 평양성이라는 것은 오기이다.
  발해의 중경현덕부는 지금의 내몽골 파림우기로 비정되는데, 지금 중국에서는 그 남쪽 영성을 요 중경 대정부가 있던 곳이라고 순 엉터리로 해석하고 있다.

    
  
  요나라 태조(太祖: 야율아보기)가 나라를 세우고 발해를 공격하여 홀한성(忽汗城)을 함락하고 그 왕 대인선을 사로잡았다.
  동단왕국(東丹王國)을 세우고 태자 도욕(圖欲)을 인황왕(人皇王)으로 임명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신책(神冊) 4년(A.D.919) 요양(遼陽) 옛 성을 수리하고, 발해사람과 중국인으로 동평군(東平郡)을 만들어 방어주(防禦州)로 삼았다.
  천현(天顯) 3년(A.D.928) 동단국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하고 남경(南京: 후일 동경요양부로 또 고쳤다)으로 승격시켰다.

 

☆ 이때 거란은 옛 발해 상경의 홀한성에 설치했을 동단국을 요양으로 옮기고 남경이라 했다가 천현 13년에 남경을 다시 동경(동경요양부)으로 바꾸게 된다. 
홀한성은 발해의 상경용천부로서 지금의 내몽골 파림좌기 부근이고, 당시의 요 남경(후일의 동경요양부)은 북경 부근을 말하는 것이므로 이때 발해가 거란으로부터 홀한성을 탈환하여 발해의 왕조가 복원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학자들은 이를 후발해라 하기도 한다.   
  
  
 (남경)성의 이름을 천복성(天福城)이라 바꾸었는데 높이가 3장이며 망루가 있으며 둘레가 30리이다.

  8개의 문이 있는데, 동문은 영양(迎陽), 동남은 소양(韶陽), 남문은 용원(龍原), 서남은 현덕(顯德), 서문은 대순(大順), 서북은 대요(大遼), 북문은 회원(懷遠), 동북은 안원(安遠)이다.

   궁성(宮城)은 동북쪽 귀퉁이에 있는데 높이가 3장이며 망루가 있으며 남쪽으로는 누각처럼 생긴 3개의 문이 있어 장려하다. 사방 모퉁이에 각루(角樓)가 있는데 (각루) 사이는 2리이다.
  궁성 담장 북쪽으로는 양국황제(讓國皇帝)의 어용전(御容殿)이 있다. 
  대내(大內)에는 전각이 두 채가 세워져 있고 비빈전은 별도로 설치하지 않았는데, 내성사(內省使)의 부판관(副判官)이 수호한다. 
 

  대동단국(大東丹國)이 새로 세운 남경의 비명(碑銘)은 궁문의 남쪽에 세워져 있다.

  외성(外城)을 한성(漢城)이라고도 하는데, 남시(南市)와 북시(北市)로 나뉘며 중간에는 간루(看樓)가 있다.

 (사람들이) 아침에는 남시에 모이며 저녁에는 북시에 모인다.

  시가지의 서쪽에는 금덕사(金德寺), 대비사(大悲寺), 부마사(駙馬寺)가 있는데, (이곳에는) 철당간도 있다. 또 조두타사(趙頭陀寺), 유수오(留守衙), 호부사(戶部司), 군순원(軍巡院) 등이 있다.
  귀화영(歸化營)의 군인 1천여명이 황하와 삭주에서 망명하였는데, 모두 이곳에 적을 두었다. 

 

  동쪽으로 북오로호극(北烏魯虎克)까지 400리, 남쪽으로 해변 철산(鐵山)까지 860리, 서쪽으로 망평현(望平縣) 해구(海口)까지 360리, 북쪽으로 읍루현 범하(范河)까지 270리이다. 동, 서, 남쪽 3면을 바다가 둘러싸고 있다.
  요하(遼河)는 동북쪽 산어귀에서 발원하여 범하(范河)가 되고, 서남쪽으로 흘러 대구(大口)가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동양하(東梁河)는 동산으로부터 서쪽으로 흘러 혼하(渾河)와 합류하여 소구(小口)가 되어 요하와 만나 바다로 들어가니, 태자하(太子河)라고 하며 또는 대양수(大梁水)라고도 한다.
  혼하는 동양하와 범하 사이에 있다.
  사하(沙河)는 동남산에서 발원하여 서북쪽으로 흘러 개주(蓋州)를 경유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포하(蒲河), 청하(淸河), 패수(浿水)가 있는데, 패수는 니하(泥河) 또는 한우락수라고도 하는데, 강에 한우초가 많기 때문이다.)            

                                                (필자 주 : 이 적색으로 표시한 부분은 기록이 매우 이상하다)  
 

  주필산은 당 태종(太宗)이 고구려를 정벌할 때 그 정상에서 며칠을 머물렀던 곳이다. 

 돌을 다듬어 공을 새겼기 때문에 속칭 수산(手山)이라고도 한다. 

  산꼭대기의 평평한 돌 위에 손바닥 모양의 무늬가 있고 그 가운데에서 샘물이 솟아오르는데, 마르지 않는다.
  또 명왕산(明王山), 백석산(白石山)이 있는데, 백석산은 횡산(橫山)이라고도 한다. 
  천현 13년(938)에 남경을 동경(東京)으로 고쳤는데, 부(府)는 요양(遼陽)이라고 하였다. 
  백성은 40,604호이며, 주(州)·부(府)·군(軍)·성(城) 87개와 9현(縣)을 관할하였다.

 

# 요나라 초기의 남경과  그 후의 요 동경요양부의 치소는 지금의 북경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