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창해군 사건 - 위만조선 멸망 - 한사군 설치 - 이군으로 축소 - 삼국(고구려·백제·신라)의 흥기- 최초주장
후한서 예전을 보면,
“원삭 원년(B.C.128)에 예군 남려(南閭) 등이 우거(위만조선의 우거왕)를 배반하고 28만구를 이끌고, 요동으로 내속하였으므로 (한) 무제가 그 땅을 창해군(蒼海郡)으로 만들었다가 수년 후에 폐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사기 권55 유후세가 제25 장량 전에 창해군(倉海郡) 관련 기록이 있고,
전한서 권6 무제기 제6에는,“元朔元年 秋 東夷薉君南閭等 口二十八萬人降 爲蒼海郡
元朔三年 春 罷蒼海郡” 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한서 권24하 식화지 제4하에는, “彭吳穿濊貊 朝鮮 置滄海郡 則燕齊之間靡然發動.............
東置滄海郡“ 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후한서 권85 동이열전 제75 예 전에는,“元朔元年 濊君南閭等 畔右渠 率二十八萬口詣遼東內屬 武帝以其地爲蒼海郡 數年乃罷”라고 기록되어 있다.
기원전 108년 전한(前漢) 무제가 순체와 양복이라는 장수를 보내 위만조선을 쳐 멸망시키고 그 땅을 나누어 4군을 설치하였는데, 낙랑군 · 진번군 · 임둔군 · 현토군이다. 그런데 그 설치 위치가 낙랑군은 위만조선의 도읍이었던 왕검성에 치소를 두었고, 옥저 땅에 현토군을 설치하였으며, 임둔(필자주 : 후일 동예가 된다) 땅에 임둔군을, 진번 땅에 진번군을 설치하였다고 하였다.
☆ 자치통감 권21 한기13 세종효무황제 원봉 3년(B.C.108) 조의 주를 보면,
“낙랑군의 치소는 조선현이다. 우거가 도읍으로 하고 다스리던 곳이다.
신찬은 말하기를,무릉서에 임둔군의 치소는 동이현으로서 장안에서 6,138리 떨어져 있는데 영현은 15개이다.
현토군은 본래의 고구려이다. 조선을 평정하고 함께 설치했던 군인데 치소는 옥저성이다. 후에 이맥의 침공을 받아 (현토)군을 구려(句麗:필자 주 : 졸본 부근에 구려라는 나라가 있었고 그 구려를 후세 사람들이 고씨의 구려라는 의미로 고구려라고 불렀던 것으로 생각된다. 왕검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 이씨조선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의 서북쪽으로 옮겼다.
진번군의 치소는 삽현으로서 장안에서 7,640리 떨어져 있고 영현은 15개이다. [필자 주 : 진번군이 임둔군보다 더 멀리 떨어졌다는 것은 오기로 보인다. 바꾸어 잘못 기록된 것 같다]
얼마 후 임둔과 진번 2개군을 폐지하였다.
반고의 한서지리지에는 동이현은 낙랑에 속했고, 삽현에 대해서는 상고할 수 없다라고 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낙랑군의 치소는 조선현(朝鮮縣), 임둔군의 치소는 동이현(東暆縣), 초기 현토군의 치소는 옥저성(沃沮城), 진번군의 치소는 삽현(霅縣)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후한서에는 낙양으로부터 요동군(遼東郡)은 낙양동북 3,600리, 현토군(玄郡)은 낙양동북 4,000리(시원 5년에 구려의 서북쪽으로 새로 옮긴 현토군), 낙랑군(樂浪郡)은 낙양동북 5,000리 라고 기록되어 있다.
후한서 예전을 보면,
“소제 시원 5년(B.C.82)에 임둔과 진번을 폐하여 낙랑과 현토에 병합했다. (B.C.75) 현토를 다시 구려로 옮겼으며 단단대령 동쪽의 옥저와 예맥(필자주 : 옛 임둔군 땅이 예, 맥이 되었다)은 모두 낙랑에 속하게 했다가 뒤에 그 지역이 넓고 멀어 다시 단단대령 동쪽의 7개현을 나누어 낙랑동부도위를 설치하였다.”고 하였다.
☆ 소제 시원 5년에 임둔과 진번을 폐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는 이때 예족이 원래 자기들이 살던 땅(창해군)을 동부여에게 빼앗기고, 동쪽으로 이동하여 임둔군 땅을 차지하고 다시 나라를 세웠는데, 그리하여 이들을 동예라 불렀고, 진번은 맥국이 된다. 그리고 B.C.75년에 이르러 현토군을 요동군의 서북쪽으로 옮기게 되고, 원래 현토군의 남은 땅 7개현으로 낙랑동부도위를 설치하고 후일 마한과 진번의 접경지역에서 백제가 건국된다.
그리고 후한서 동옥저 전을 보면,
“한 무제가 조선(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옥저 땅으로 현토군을 만들었다. 뒤에 이맥의 침략을 받아 현토군을 고구려(필자주 : 구려의 오기가 아닐까?)의 서북쪽으로 옮기고는 옥저를 현으로 고쳐 낙랑동부도위에 속하게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새로 옮긴 현토군이 구려 즉 졸본부여(후일의 고구려)의 서북쪽에 치소를 두었음을 알게 하고, 옛 현토군의 나머지 땅으로 낙랑동부도위를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후한서 예전을 보면,
“건무 6년(A.D.30) 낙랑동부도위를 폐지하고 단단대령 동쪽의 땅을 포기하고 그 거수로서 현후를 삼고 때때로 조하하도록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 낙랑동부도위가 소멸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고구려 미천왕이 313년에 낙랑군을 축출했는데, 중국 사서에는 낙랑에 관한 기록이 계속되고, 사기 하본기의 주에 “갈석산은 북평 려성현 서남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진 태강지리지에 “낙랑 수성현(遂城縣)에 갈석산이 있고 (진나라 때 쌓은) 장성이 시작된 곳이다”라고 하였으며, 수경에는 (갈석산은) 요서 임유현 서남쪽 물 가운데 있다”고 하였는데 지금 하북성 보정시 북쪽에 수성진(遂城鎭)이 있고, 요서군은 지금의 영정하 서남쪽 방산 부근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원래 갈석산은 지금의 하북성 보정 부근에 있었고, 고구려 미천왕에 의해 313년에 축출된 낙랑군이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부근으로 교치되었음을 알 수 있고, 이때 교치된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위치하고 있었음을 알게 하는데, 갈석산은 지금의 낭아산으로 비정된다.
[진 태강지리지에 낙랑 수성현에 있다고 기록된 갈석산의 추정위치]
[갈석산으로 추정되는 낭아산(狼牙山) 전경]
☆ 진 태강(太康)이란 서진 무제 사마염의 연호로서 오나라가 진에 항복해온 해를 기념하여 연호를 함녕에서 태강으로 바꾸었다.
서기 280년으로부터 289년까지를 말하는데, 태강지리지에는 태강연간 이후에 관한 기록도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계속적인 증보가 이루어졌던 듯 하다.
그리고 갈석산에 관하여 사마천의 사기 하본기의 주에는,
“갈석산은 북평 려성현 서남에 있다[색은] (索隱 地理志云 碣石山在北平 驪城縣西南)”
“낙랑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고 장성이 시작된 곳이다[태강지리지] (太康地理志云 樂浪遂城縣有碣石山長城所起)”
“갈석산은 요서 임유현 남쪽 물 가운데에 있다[수경] (水經云 在遼西臨渝縣南水中)”
라고 주가 달려 있는데, 지금까지 아무도 갈석산을 정확히 찾은 사람은 없고, 각각 추정 만 무성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