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진번군(眞番郡)의 진짜위치 찾기 - 최초주장
전한서 권6 무제기(武帝紀) 제6 원봉 3년(B.C.108) 조의 주를 보면, “臣瓚曰 茂陵書 臨屯郡治東暆縣 去長安六千一百三十八里 十五縣, 眞番郡治霅縣 去長安七千六百四十里 十五縣(신찬이 무릉서에는 임둔군의 치소는 동이현(東暆縣)으로서 장안에서 6,138리 떨어져 있고 통현은 15현이고, 진번군의 치소는 삽현(霅縣)으로서 장안에서 7,640리 떨어져 있고, 통현이 15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말했다)”라고 임둔군과 진번군의 위치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특히 진번군(眞番郡 필자주 : 사실은 番의 음이 普安反이라 하였으니 진반군이라 읽어야 옳다)의 위치에 대한 정설이 아직까지도 정립되어 있지 못하다.
아직까지 역사학자들조차 진번군의 위치를 정확히 찾지 못하고, 정설이 없다는 것은, 그 위치를 비정하기가 매우 까다롭다는 반증일 것이다.
위 전한서에 인용된 무릉서의 기록대로라면 진번군이 임둔군보다 무려 1,500리나 더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말이 되는데, 그 위치가 과연 지금의 어디쯤이었느냐를 놓고 각각의 주장들만 난무하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정설이 정립되지 못했던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겠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진번군이 장안에서 7,640리 떨어져 있었다(去長安七千六百四十里)”는 기록은 “장안에서 5,640리 떨어져 있었다(去長安五千六百四十里)”는 기록의 오기로 판단된다. 당초에 한자 五와 七을 잘못 썼거나 또는 인출할 때 흐릿하게 인쇄되어 五를 七로 잘못 읽게 되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진번군은 장안에서 6,138리 떨어져 있었다는 임둔군보다 500여리쯤 가까운 곳에 위치했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는 삼국유사 위만조선 조에 “연나라왕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망명하자 연나라 사람 위만도 무리 천여명을 모아 요동의 요새지를 넘어 도망하여 패수를 건너 고조선으로 망명하고는 진나라의 옛 빈터인 상하장에서 살았다. 차츰 진번(眞番), 조선(朝鮮 : 고조선)과 또 옛날 연(燕)과 제(齊)에서 망명해온 자들을 자기에게 소속시켜 왕이 되고, 왕검에 도읍했다.
위만은 군사의 위력으로 이웃의 조그만 읍들을 침략하여 항복시켰다.
이에 진번(眞番)과 임둔(臨屯)이 모두 복종해 와서 그에게 예속되니 사방이 수천리나 되었다.
위만은 아들에게 왕위를 전하고, 손자 우거에 이르렀는데, 진번(眞番)과 진국(辰國)이 한나라에 글을 올려 입조하려 하였으나 우거는 길을 막고 지나지 못하게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위만조선의 주요강역이 조선국(고조선), 진번국, 임둔국 등이었음을 알게 하고, 또 위만조선이 진번과 진국(진한)의 통행을 통제할 수 있는 위치였다고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고조선, 위만조선의 도읍 왕검성이 피서산장(열하행궁)이 있는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로 비정되고, 또 후세 백제의 시국처는 마한의 동북쪽 변방에 해당하는 곳이었는데 그곳이 대수(帶水)와 패수(浿水)를 건넌 곳이라고 했고, 또 진번지간(辰番之間 필자주 : 진국(辰國)과 진번국(眞番國) 사이지역이라는 의미일 것이다)이라고도 하고, 한산(漢山) 부근이라고도 전해오기 때문이다.
아마 백제의 건국지가 마한과 옛 진번군(진번국에 설치한 한4군 중 하나)과의 중간 접경 지역 쯤에 위치했고, 그 부근에 한산이라는 산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기록이 남겨졌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또 중국 사서들에는 요동 동쪽 1천여리에 고구려와 백제가 위치했었다는 기록도 많다.
이는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3,600리쯤에 위치했었다는 요동군에서 1천리쯤 더 먼 4,600리쯤에 백제가 위치했었다는 말이 되는 것인데, 장안에서 5,640리 떨어져 있었다는 진번군(진번국), 6,138리 떨어져 있었다는 임둔군(임둔국)보다 백제가 요동에 가까이 위치했었음을 알 수 있다.
☆ 진번군(진번국에 설치한 군)은 기원전 108년에 설치되었다가 소제 시원5년인 기원전 82년에 폐지하였는데, 진번(맥국), 동옥저, 동예에는 말갈족이 함께 섞여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백제 역사 내내 백제를 괴롭힌 말갈은 바로 백제 북쪽에 위치했던 진번(맥국)에 섞여 살던 말갈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찾고 보니 지금의 영정하가 옛 요수였고, 그 동쪽 북경 부근이 고대의 요동으로 비정되는 곳이었다.
그리고 고구려의 평양성(필자주 : 옛 고조선, 위만조선의 도읍 왕검성이며, 고려의 서경이다)은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였으며, 백제의 첫 도읍 위례성과 한성은 지금의 하북성 진황도 도산(都山) 남쪽으로 비정되고, 바로 이 도산이 백제의 북한산(北漢山)이었고, 한산(漢山)은 그 남쪽 지금의 오봉산(五鳳山)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하여 사서들에 백제와 고구려가 함께 요동 동쪽 1천여리에 위치했다고 기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한4군 중의 진번군(眞番郡)은 백제의 시국처인 지금의 진황도 도산 부근 보다는 요동(현 북경)에서 더 먼 곳에 위치했음을 알 수 있고 또 임둔군으로 비정되는 내몽골 고륜기 부근보다는 요동에 가까운 곳에 위치했을 것이므로 결국 진번군은 지금의 능원(凌源) 일원으로 비정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능원은 우리 환인, 환웅, 고조선과 관련 있는 우하량 선사유적지가 발견된 곳이다.
필자가 이렇게 알려줘도 믿는 사람보다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이 더 많을테니............................
아 우리 역사를 어이하면 좋을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