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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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위만조선과 한4군은 북경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15. 7. 24. 18:36

윤여동설 - 위만조선과 한4군은 북경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 최초주장

 

 

 

 

 

  낙양 동북 3,600리에 위치했던 옛 요동군은 지금의 북경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후한서 권85 동이열전 제75 예전을 보면,

  “원삭 원년(B.C.128) 예군 남려(南閭) 등이 우거(위만조선의 왕)를 배반하고 28만구를 이끌고 요동(요동군)으로 내속하였으므로 무제(전한 무제)는 그 땅을 창해군(蒼海郡)으로 만들었다가 수년 후에 폐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때 무제는 요동군에서 예까지 도로를 개설하려고 했고, 이에 드는 비용을 연()과 제()에서 조달토록 했는데, 워낙 비용이 많이 소요되었기 때문에 연과 제지역이 매우 소란스러웠다고 한다. 그런데 이 창해군은 불과 2년여 만에 폐지되는데, 그 명확한 이유는 전해지지 않았고, 이 창해군 사건이 결국은 20여년 후 위만조선이 멸망하는 단초로서 작용하게 된다.

 

  한 무제는 원봉 2년인 기원전 109년 가을에 이르러 5만의 군사를 좌장군 순체에게 주어 요동(지금의 북경 부근)을 출발하여 위만조선의 도읍인 왕검성(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으로 향하게 하고, 또 누선장군 양복에게도 7천의 군사를 주어 제(지금의 산동반도)에서 발해에 배를 띄우게 했다.

  결국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은 멸망하게 되고, 그 땅이 네 군으로 나뉘어지게 되는데, 이것이 소위 한사군(漢四郡)이라 일컫는 낙랑군(樂浪郡), 진번군(眞番郡), 임둔군(臨屯郡), 현토군(玄菟郡)이다.

 

  초기 한4군의 배치는 바로 위 그림과 같았는데, 26년 후인 소제 시원 5년 즉 기원전 82년에 이르자 진번군과 임둔군은 폐지하기에 이르게 되고, 옛 임둔군의 땅에는 예(濊 : 동예)가 나타나고, 진번군의 땅에는 맥(貊)이 나타난다.

  진번군의 맥국이 독립했을 것이고, 예는 창해군을 떠나 임둔군 땅으로 옮겨 온 것인데, 그것은 동부여가 창해군을 침범하여 그 땅을 차지하였기 때문에 대대로 그곳에 살던 예는 그에 밀려 동쪽의 임둔군 지역으로 옮겨 갔을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의 승덕시 일원의 낙랑군과 옹우특기 일원의 현토군 두 군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그랬다가 기원전 75년에 이르자 초기 현토군이었던 옹우특기 부근의 옥저가 또 독립을 하게되자 현토군을 구려의 서북쪽인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 부근으로 옮기게 되고 단단대령 동쪽의 옥저와 예와 맥의 남은 땅 7개현은 낙랑동부도위를 설치하여 소속시키게 된다. 

  단단대령이란 지금의 칠로도산산맥을 말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백제의 온조왕은 나라의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 말갈이 있어서 변강을 침공하기 때문에 편안한 날이 적다고 하면서 도읍을 위례성에서 남한성으로 옮겼고, 신라의 파사이사금은 서쪽으로는 백제를 이웃하고 남쪽으로는 가야를 접하였다고 말했으며, 혁거세거서간 30년에는 낙랑 사람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침범하였다.

 

  그런데 이 낙랑동부도위는 건무 6년인 서기 30년에 이르러 폐지되기에 이르는데, 고구려의 대무신왕에게 그 땅을 빼앗겼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리고 서기 37년에 이르면 대무신왕이 낙랑도 쳐서 멸망시키게 되는데, 이때의 낙랑은 최리라는 사람이 전한 - 왕망의 신 - 후한으로 이어지는 혼란기를 틈타 그 땅을 차지하고 왕위에 올라 있던 낙랑국이었다.

  고구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이야기는 바로 이때 일어난 일이었다.

 

  그런데 광무제가 왕망의 신나라를 없애고 다시 한나라(후한)를 복원하고는 서기 44년에 이르러 고구려가 빼앗아 차지하고 있던 낙랑 땅을 침공하여 살수 이남 땅을 다시 고구려로부터 탈환하여 낙랑군을 다시 부활시켰는데, 이 후한낙랑군은 후한이 멸망한 후에도 조위시대를 지나 서진 말기인 서기 313년까지 유지하게 된다.

  그랬다가 고구려 미천왕이 313년에 낙랑군을 쳐서 없애게 되는데, 낙랑군은 끈질기게도 다시 그 위치를 갈석산 부근으로 옮겨 상당기간 더 존속하게 된다.

  진 태강지리지에 "낙랑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고, 장성이 시작된 곳"이라고 기록된 낙랑은 낙랑군이 갈석산 부근으로 옮겨진 이후의 기록이다.

 

  그리고 진번군은 지금의 진황도 도산(都山) 북쪽 일원을 말하는 것으로서 바로 이 마한의 동북쪽에 위치한 진번군(맥국)과 마한의 접경지대에서  백제가 건국되는데, 이때 마한의 도읍 월지(후일의 금마, 금마저)는 지금의 하북성 당산시 풍윤을 말하는 것이다.

 

☆ 백제의 북쪽에 위치했었다는 말갈은 맥국(貊國)을 말하는 듯한데, 이 맥국은 말갈족과 섞여 살았던 듯하다.

 

   그리고 임둔군은 지금의 내몽골 고륜기 부근에 설치되었던 듯 하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요녕성 금서에서 임둔태수장이라는 봉니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마한은 지금의 하북성 당산시, 진황도시 일원,

  진한은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일원,

  변한은 요녕성 호로도시, 흥성시 일원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말은 곧 우리의 삼한인 마한, 진한, 변한이 한반도가 아닌 지금의 발해 북쪽, 북경 동쪽 부근에 위치했었다는 말이고, 삼국인 고구려, 백제, 신라 그리고 가야가 발해북쪽, 북경 북쪽, 동북쪽, 동쪽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이며, 삼국을 통일했다는 고려 역시 북경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이러한 우리의 고대 대륙역사 기록을 한반도에 적용하여 한반도에서 그 흔적을 찾으려하니 찾아질 리가 없는 것이다.

  신라의 건국지가 어디인데 한반도 경주가 서라벌(금성)일 수 있을까?

  백제의 건국지가 어디인데 한반도 서울의 풍납토성이 위례성일 수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