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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려 사신들의 연경(燕京) 사행로를 밝힌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10. 6. 28. 00:53

윤여동설 - 고려 사신들의 연경(燕京) 사행로를 밝힌다 - 최초주장

 

 

   삼국사기 권제37 잡지 제6 지리4 고구려 백제 조를 보면,

 『통전에 이르기를

  “주몽이 한나라 건소2년에 북부여[필자주 : 동부여의 오기이다]로부터 동남방[필자주 : 서남쪽의 오기이다]으로 가서 보술수를 건너 흘승골성에 이르러 자리잡고 국호를 구려라 하고 고로써 성씨를 삼았다” 고 하였으며,

 

☆ 삼국사기 찬자들이 인용했다고 밝히고 있는 통전의 기록이란 통전 권186 변방2 동이하 고구려 조를 말하는 것으로서 그곳에는 “朱蒙棄夫餘 東南走渡普述水 至紇升骨城 遂居焉 號曰句麗 以高爲氏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의미는 ”주몽이 부여를 버리고 동남쪽으로 달아나 보술수를 건너 흘승골성에 이르러 자리를 잡고 국호를 구려라 하고 고로서 성씨를 삼았다” 라는 뜻이다. 그런데 기록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한나라 건소2년이라는 기록은 찾을 수 없고, 또 부여라고 했지 북부여라 하지 않았다. 삼국사기 찬자들이 사서의 기록을 인용하면서 원문을 그대로 인용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기(古記)에는 이르기를, 

  “주몽이 부여[필자주 : 동부여이다]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에 이르렀다”고 하였으니 흘승골성과 졸본은 거의 같은 곳인 듯하다.

  한서지에 이르기를,

  “요동군은 낙양에서 3,600리 떨어져 있고,

  속현에 무려(無慮)가 있은 즉 주례 북진 의무려산인데, 대요에서 그 아래에 의주(醫州)를 설치하였다.

[필자 주 : 의무려산(醫巫閭山)은 이렇게 쓰는데, 무려(巫閭)와 무려(無慮)가 무슨 관련이 있다고 이러한 글을 남겼는지 의문이다. 북진 의무려산은 원래 요서군에 있던 산인데 혹시 삼국사기 찬자들이 착각한 것이 아닐까?] 

  현토군은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4천리 떨어져 있고, 소속된 현이 셋인데 고구려가 그 중의 하나이다“ 라고 했으므로 소위 주몽이 도읍으로 정한 곳이라고 하는 흘승골성과 졸본이라는 곳은 대개 한나라 현토군의 경계로서 대요국 동경의 서쪽인 듯하니 한서지의 소위 현토군의 속현 고구려가 이것일 것이다. 

 

  옛날 대요가 아직 망하지 않았을 때에 요나라 임금이 연경(燕京 : 요 남경석진부))에 있었는데, 우리의 입조 사신들이 (요) 동경을 통과하고 요수(遼水)를 건너 하루 이틀 만에 의주(醫州)에 당도하여 연경, 계주로 향하였기 때문에 한서지의 기록이 옳음을 알 수 있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글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듯하다.

  왜냐하면 이 글에서 언급되고 있는 지명들의 위치를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에 지금의 어느 지역에 관한 기록인지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기본적으로 북부여의 위치를 알아야 하고, 요동군과 현토군의 위치를 알아야 하며, 요나라의 도읍 연경과 고려의 도읍 개경을 알아야 고려 사신들의 요 연경 사행로를 찾을 수 있게 되고, 요나라 동경, 요수, 의주의 위치도 찾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위 삼국사기지리지의 기록에 나타나는 지명들은 한결같이 그 위치가 불분명한 곳들이다.

  아니 불분명한 곳들이 아니라 그 기록을 지금 많은 사람들이 잘못 이해하고는 엉뚱한 곳에서 찾았기 때문에 그 정확한 위치를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요 나라의 연경(남경석진부)을 지금의 북경, 옛 요수를 지금의 요하로 인식하고 있고, 요의 동경을 지금의 요녕성 요양이라 하며, 고려의 개경을 한반도 황해도 개성이라 했다.

  그러다보니 고려의 사신들이 요나라를 갈 때 지금의 한반도 황해도 개성을 출발하여 북쪽으로 평양을 경유하여 압록강을 건너고 요양을 지나 요하를 건너고 의무려산을 지나고, 산해관을 통과하여 연경인 지금의 북경으로 갔다고 기록을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러한 해석이 심히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연경은 지금 북경의 서남쪽인 하북성 역현(易縣) 부근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후세 사람들은 그곳을 연나라의 도읍이라는 의미로 "연경(燕京)"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지금은 바뀌어 북경을 연경이라 하고 있으니 정말 웃기는 일이다.

 

 

[역현 : 도시계획을 할 때 이곳이 연경(燕京) 임을 나타내기 위해 도시 북쪽에 새(제비)의 형상을 그려 놓았다. 중국인 다운 발상이다] 

 

  그런데 요나라는 처음에 옛 연경에 도읍한 것이 아니라 연경에서 한참 북쪽에 위치한 지금의 내몽골 상도(商都) 부근에 도읍하고 상경임황부로 삼게 되고, 다시 그 남쪽 장가구 부근에 중경대정부, 또 그 남쪽 역현(연경) 부근에 남경석진부를 설치하게 된다.

  그리고 고려의 도읍 개경은 한반도 황해도의 개성이 아니라 지금의 중국 하북성 관성현(관성만족자치현)을 말하는 것이고, 고려의 서경은 하북성 승덕시(열하행궁)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고구려나 고려의 중심강역은 한반도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요수는 지금의 영정하를 말하는 것이고, 요 동경(요양부)은 지금의 북경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위 삼국사기지리지의 기록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고, 고려 사신들의 요 연경 사행로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고려 사람인 이승휴가 원나라의 대도(大都 : 연경)에 사신 일행으로 갔다가 돌아와서 쓴 사행록인 “빈왕록(賓王錄)”을 보면,

  1273년 윤6월 9일 개경 출발          

           6월 11일 패강(浿江) 도하

           6월 12일 황해도 평산군 금암면 통과                  

           6월 29일 원 동경 요양(遼陽) 도착

           7월 9일 심주(瀋州) 도착

           7월 16일 악두참(渥頭站) 도착

           7월 29일 신산현(神山縣) 도착

           7월 30일 병풍산 경유 황애봉 등정        

           8월 4일 원나라의 대도인 연경(燕京) 도착

 

# 중국에서는 지금 원나라의 중도유적이 중국 하북성 장가구시 장북현에서 발굴되었다고 하면서 그곳을 원중도유지(元中都遺址)라 부르고 있는데, 그곳은 원 중도유적이 아니라 옛 황룡국의 왕성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원 중도가 곧 후일의 원 대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원나라의 대도는 연경으로서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역현 부근이었을 것인데, 원나라가 요, 금 때의 도읍을 철저하게 파괴하고 새로이 연경(대도)을 건설했다고 하였으니 같은 장소는 아닐 것이지만 그 부근임은 틀림없을 것이다.

 

  으로 나타나는데, 이때 이승휴는 한반도의 개성을 출발하여 지금의 북경으로 갔던 것이 아니라, 사실은 개경(하북성 관성현)을 출발하여 서남쪽으로 향하여 패수(난하)를 건너고 요동군(원 동경요양부, 지금의 북경 부근)을 지나고 요수(지금의 영정하)를 건너 하북성 보정시 역현 부근까지 갔다 온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전인 요나라 때도 고려 사신들은 이승휴가 갔던 길과 비슷한 길을 따라 요나라의 도읍 연경(남경: 현 하북성 역현부근)까지 갔다 왔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