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현토군 41

윤여동설 - 위나라 관구검의 환도성 침공로와 동천왕의 파천로 찾기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위나라 관구검의 환도성 침공로와 동천왕의 파천로 찾기 - 최초주장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11대 동천왕 20년(A.D.246) 조를 보면,  “가을8월 위(魏)나라가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을 보내 1만여 명을 거느리고 현토(玄菟)로 나와서 침입하였다.   왕이 보․기병 2만으로 비류수(沸流水) 상류에서 맞받아 쳐서 적군 3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다시 군사를 이끌고 양맥(梁貊) 골짜기에서 싸워 적군을 쳐부수어 또 3천여 명을 죽이고 붙잡았다. 왕이 모든 장수들에게 말하기를 ‘위나라의 많은 군사가 도리어 우리의 적은 군사만도 못하도다. 관구검은 위나라의 명장이지만 오늘에는 그의 목숨이 나의 손아귀 속에 있도다’하고 곧 철기군 5천을 거느리고 쫓아가서 쳤다.   관구검이 ..

카테고리 없음 2010.06.21

윤여동설 - 전국시대 연장성과 연5군의 위치를 찾았다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전국시대 연장성(燕長城)과 연5군(燕五郡)의 위치를 찾았다 - 최초공개 지금까지도 그 위치가 밝혀지지 않고 있는 전국시대 연5군과 연장성의 위치를 찾아보자. 우리가 이 연5군의 위치를 찾으려 애쓰는 것은 바로 그 곳이 옛 고조선 땅으로서 그 위치를 찾으면 고조선의 서쪽 경계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연5군(燕五郡)”과 "연장성(燕長城)"은 사기 흉노전에 전국시대 연나라의 진개가 동호를 침공하여 1천여리(필자주 : 위략에는 2천여리라 했다)를 빼앗은 후 조양(造陽)으로부터 양평(襄平)까지 장성을 쌓고 그 땅에 설치했다는 어양군, 우북평군(북평군), 상곡군, 요서군, 요동군과 장성을 말하는 것이다. 전한서 권28하 지리지 제8하를 보면, "상곡군(上谷郡)은 진(秦)나라가 설치했다.(필자 주 :..

카테고리 없음 2010.03.21

윤여동설 - 원나라의 대도(大都)는 지금의 북경이 아니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원나라의 대도(大都)는 지금의 북경(北京)이 아니었다? - 최초주장 [위 : 지금 중국에서는 하북성 장가구시 장북에 있는 위 옛 성터를 원나라의 중도성터(원 중도유지)라 한다] [위 : 중국에서 원 중도성터(원 중도유지]라고 하는 곳의 발굴된 현장모습인데, 사실 이곳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왕대의 기록에 나타나는 옛 황룡국의 도읍성터이다][좌표 동경114도37분16초 북위41도17분34초] 일반적으로 우리는 원나라의 대도(大都)가 지금의 중국 북경(베이징)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정작 중국에서는 원나라의 중도(中都)가 북경이 아닌 북경에서 서북쪽으로 700리쯤 떨어져 있는 하북성 장가구시 장북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하며, 지금 “원 중도유지(元 中都遺址, 가로세로 각 550m, 동경..

카테고리 없음 2009.09.14

윤여동설 - 낙랑군과 낙랑국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낙랑군과 낙랑국 - 최초주장 대무신왕은 고구려의 3대왕으로서 2대 유리왕의 셋째 아들이었다. 유리왕의 장자 즉 다물후 송양의 큰딸이 유리왕과 혼인하여 낳은 아들 도절은 일찍 죽었고, 유리왕의 계비 화희가 낳은 둘째아들 해명은 유리왕이 졸본에서 국내로 도읍을 옮기려 할 때 그를 반대하다가 유리왕으로부터 스스로 자결하라는 명을 받고 죽었다. 그리하여 유리왕이 다물후 송양의 작은 딸을 다시 왕비로 맞아들여 낳은 아들이 바로 대무신왕 무휼이었다. 무휼(대무신왕)은 자라 15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라 모본호족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고, 또 갈사왕의 손녀를 둘째 왕비로 맞아들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가 바로 호동왕자였다. 이때까지도 원비였던 모본호족의 딸은 아들을 낳지 못했다가 나중에야 아들을 낳게된다. ..

카테고리 없음 2009.04.21

윤여동설 - 고인돌과 미송리형 토기는 고조선 고유문명의 흔적 아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고인돌과 미송리형 토기는 고조선 고유문명의 흔적 아니다 - 최초주장 지금 학자들은 비파형동검과 미송리형토기 그리고 고인돌을 고조선의 대표적인 3대 표지유물이라 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유물이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곳은 모두 고조선의 강역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필자는 그 중 고인돌과 미송리형토기는 고조선을 대표하는 표지 유물이 될 수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비파형동검이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곳은 한반도가 아니라 지금의 요하서쪽 홍산문화권 지역이고, 고인돌이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곳은 한반도 남부지역이며, 미송리형토기는 압록강변인 평안북도 의주에서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학자들이 고인돌이나 미송리형 토기를 고조선의 표지유물로 규정하게된 것은 북한 평양이 고조선의 도읍 왕..

카테고리 없음 2009.04.10

윤여동설 - 낙랑군과 낙랑동부도위,낙랑남부도위의 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설 - 낙랑군과 낙랑동부도위, 낙랑남부도위의 위치 - 최초공개    "낙랑(樂浪)"에 대하여 누차 언급하는 것은 이 낙랑의 위치를 정확히 찾는 것이 바로 잃어버린 우리의 역사 강역을 찾는 지름길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낙랑군은 기원전 108년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나누어 한사군을 설치할 때 그 도읍인 왕검성(왕험성이라고도 한다)을 낙랑군의 치소로 삼았기 때문에, 낙랑군의 위치를 정확히 찾을 수 있다면 지금까지도 그 위치에 대하여 논란이 많은 고조선(왕검조선)의 도읍 왕검성과 위만조선의 도읍 왕검성을  정확히 찾을 수 있고, 고조선(왕검조선)과 위만조선의 강역을 찾을 수 있을 것이며, 나머지 임둔군, 진번군, 현토군의 위치도 찾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전한서 ..

카테고리 없음 2009.04.07

윤여동설 - 전한낙랑군 - 낙랑국 - 후한낙랑군의 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설 - 낙랑의 위치를 찾아라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전한낙랑군 - 낙랑국 - 후한낙랑군의 위치 싫든 좋든 우리 고대 역사와 “낙랑(樂浪)”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왜냐하면 옛날 고조선 · 위만조선의 도읍이 왕검성(왕험성이라고도 한다)이었고, 한사군 때 전한낙랑군의 치소가 왕검성이었으며, 또 고구려의 평양성과 고려의 서경 역시 같은 장소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왕검성 즉 낙랑군의 치소를 정확히 찾는다면 우리 고대 역사를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낙랑(樂浪)" 이란 말이 원래 어디에서 유래하였는지 확실히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즐거울락(樂)”과 “물결랑(浪)” 자로 이루어진 것을 보면 경치가 좋은 내륙의 큰 강 또는 호수주변이나 큰 바다를 끼고 있는 ..

카테고리 없음 2009.04.03

윤여동설 - 무천(舞天)의 나라 예(濊)는 원래 어디에 있었을까?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무천(舞天)의 나라 예(濊)는 원래 어디에 있었을까? - 최초주장 후한서 예(後漢書 濊 : 동예)전 "예(濊)는 북쪽으로는 고구려와 옥저, 남쪽으로는 진한과 접했고, 동쪽은 대해에 닿았으며, 서쪽은 낙랑까지이다. 예, 옥저, 고구려는 본래 모두 조선 땅이었다. 옛날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기자는 예의와 농사짓는 법과 양잠하는 법을 가르쳤다. 또 8조의 가르침(八條之敎)을 제정하니 그 나라 사람들이 마침내 서로 도둑질하지 않게 되어 문을 닫지 않게 되었고, 부인들은 정조를 지키게 되었다. 음식을 먹을 때는 변두( 豆)를 사용한다. 그 후 40여 대를 지나 조선후 준에 이르러 스스로 왕을 칭했다. 한나라 초기 매우 혼란할 때 연나라·제나라·조나라 사람으로서 그 지방으로 피난해간 사..

카테고리 없음 2009.03.26

윤여동설 - 한반도 최초로 풍수지리설에 따라 조성된 덕흥리 고분

윤여동설 - 한반도 최초로 풍수지리설에 따라 조성된 덕흥리 고분 유주자사진의 묘 유주(幽州)라는 지역이 한반도가 아닌 지금의 중국 산서성 대동 부근으로부터 북경 부근까지를 말한다는 것은 이미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새삼스럽게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북한 평남 덕흥리에서 발견된 고분의 주인공이 바로 그 유주지역을 다스리던 유주자사 진이라는 사람이었고, 주인공의 모습과 13군 태수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자사(刺史)는 지금의 도지사와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이고, 태수(太守)는 군수쯤이 될 것인데, 그의 무덤 속에 13군 태수가 유주자사 진에게 업무를 보고하는 그림을 그려 놓았다는 것은 유주자사 진이 바로 그 유주 13군을 관할하는 직책을 맡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해 준다고..

카테고리 없음 2009.03.06

윤여동설 - 대방군은 한반도 황해도에 없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대방군은 북경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 최초주장 삼국유사 대방군 조의 새로운 해석 북대방(北帶方) 북대방(北帶方)은 본래 죽담성(竹覃城)이다. 신라 노례왕(弩禮王) 4년에 대방(帶方) 사람들이 낙랑(樂浪) 사람들과 함께 신라에 투항해 왔다. (이것은 모두 전한 때에 설치한 두 군의 이름이다. 그 후에 참람하게도 나라라고 불러오다가 이때에 와서 항복한 것이다). 우리 역사를 찾는데 낙랑군의 위치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듯 이 대방군의 위치 역시 우리 역사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대방군은 후한 건안(A.D.196-220) 중에 공손강이 둔유현 남쪽 황무지를 나누어 설치했다고 전해오는데, 전한낙랑군 25개현 중 대방현이 있으니 대방이라는 명칭은 매우 오래 되었을 것이다. 앞서 위만조..

카테고리 없음 2009.03.04

윤여동설 -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윤여동설 -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고구려 대무신왕에게는 호동이라는 아주 잘 생긴 왕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와의 이루지 못한 사랑 이야기가 전설이 되어 전해지고 있어 우리는 그들의 이루지 못한 사랑을 지금까지 매우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어쩌면 그들의 사랑은 애초부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는지도 모른다. 앞서 전한 왕실의 외척이었던 왕망은 서기 9년 1월 10일에 이르러 쇠약해진 전한(前漢)을 없애버리고 새로운 나라인 신(新)나라를 건국하고 황제에 오르는데, 이 혼란기를 틈타 낙랑군태수(조선사람이 그 땅을 되찾아 나라를 세우고 왕위에 올랐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였던 최리는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했던 한사군의 한 군이었던 전한낙랑군 땅과 낙랑동부도위 땅을 ..

카테고리 없음 2009.01.29

윤여동설 - 최리의 낙랑국은 중국 하북성 승덕시 일원에 위치했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최리의 낙랑국은 중국 하북성 승덕시 일원에 위치하고 있었다 - 최초주장            낙랑국(樂浪國)  전한(前漢) 때 처음으로 낙랑군(樂浪郡)을 두었다.    응소(應邵)는 이것이 "고조선국(古朝鮮國)"이라 했다.  신당서(新唐書)의 주에는, "평양성(平壤城)은 옛 한(漢)나라의 낙랑군(樂浪郡)"이라고 했다.  국사(國史 : 삼국사기)에는,  "혁거세 30년에 낙랑 사람들이 신라에 투항해 왔다. 또 제3대 노례왕(弩禮王 : 유리왕) 4년에 고구려의 제3대 무휼왕(無恤王 : 대무신왕)이 낙랑을 멸망시키니 그 나라 사람들은 대방(帶方: 북대방)과 함께 신라에 투항해 왔다.    또 무휼왕(無恤王) 27년에 광호제(光虎帝 : 후한 광무제)가 사자를 보내어 낙랑을 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을..

카테고리 없음 2009.01.23

윤여동설 - 이부란 소제 시원5년 이후의 낙랑군과 현토군을 말하는 것 - 최초주장

윤여동설 - 삼국유사 이부(二府) 조의 새로운 해석이부란 소제 시원 5년 이후의 낙랑군과 현토군을 말하는 것 - 최초주장 이부(二府) 전한서(前漢書)에 이르기를, "소제(昭帝) 시원(始元) 5년(B.C.82) 기해년에 두 외부(外府)를 두었다. 이것은 조선(朝鮮)의 옛 땅인 평나(平那)와 현토군(玄토郡) 등을 평주도독부(平州都督府)로 삼고, 임둔(臨屯)·낙랑(樂浪) 등 두 군(郡)의 땅에 동부도위부(東部都尉府)를 둔 것을 말함이다."라고 했다. [내가 알기로는 전한서 조선전에는 진번·현토·임둔·낙랑 등 네 군郡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지금 이 글에는 평나(平那)가 있고 진번이 없으니 대개 한 지방을 두 이름으로 불렀던 것 같다] 기원전 108년에 한나라는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는 그 땅을 나누어 네 군을 ..

카테고리 없음 2009.01.16

윤여동설 - 새로 옮긴 현토군의 치소는 하북성 장가구 부근 - 최초공개

윤여동설 - 기원전 75년(元鳳6년)에 새로 옮긴 현토군의 치소는 하북성 장가구 부근 - 최초공개 원봉(元封) 4년(B.C.107)에 설치된 초기 현토군의 위치는 지금까지도 오리무중이고, 원봉(元鳳) 6년(B.C.75)에 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겼다는 현토군 역시 아직도 어디를 말하는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한반도 북한 평양을 낙랑군으로 인식한 조선시대 사람들은 초기 현토군이 함경도 함흥지역에 설치되었다가 요하 부근으로 옮겨갔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였다. 그렇지만 옛 고조선, 위만조선의 도읍 왕검성이었고, 전한 낙랑군의 치소였던 곳이 한반도 부근에 위치했던 것이 아니라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이라면 현토군의 위치 역시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하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된..

카테고리 없음 2008.12.17

윤여동설 - 한4군(漢四郡) 은 단단대령(칠로도산)을 중심으로 설치되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한4군(漢四郡)은 단단대령(칠로도산)을 중심으로 설치되었다 - 최초주장 한사군의 설치지역에 대해서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의견들이 서로 달라 아직까지도 명확한 결론을 도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자 어떤 이는 중국 사람들이 위만조선과 한(漢) 나라와의 전쟁에서 실제는 한(漢) 나라가 패했으나 이를 숨기고 한(漢) 나라가 승리했다고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실제 설치된 적도 없는 한사군이라는 유령 군들을 설치했던 것처럼 꾸며 기록했다고 주장하는 사람까지도 나타나게 되었다. 한사군이 실제 설치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정리해보면, 첫째는 사마천 생존시에 쓰여진 사기 조선전에 "조선을 평정하고 네 군으로 만들었다"고 만 기록했을 뿐 구체적으로 낙랑, 진번, 임둔, 현토(필자주 :..

카테고리 없음 2008.12.08

윤여동설 - 동부여는 내몽골 정람기 부근에 위치했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동부여는 내몽골 정람기 부근에 위치했었다 - 최초주장 [위 : 내몽골 정람기 동북쪽에 위치한 대형고성터. 지금 중국에서 원 상도유지라고 하고 있으나 사실 이곳은 옛 예성(濊城)이었을 가능성이 많은 곳이다] [위 : 내몽골 정람기에 위치한 고성터로서 지금 사랑성(四郞城)이라 부르고 있다] 부여는 아주 오래된 나라의 이름이다. 옛날 고조선의 건국시조 단군 왕검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다고 한다. 장자는 부루, 둘째는 부소, 셋째는 부우, 막내는 부여(夫餘, 扶餘)였는데, 단군왕검이 왕검성의 서쪽지역을 부여에게 영지로 내려주게 되어 나라 이름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부여는 고조선이 멸망하자 북부여, 졸본부여, 동부여로 나누어지게 되는데, 북부여는 고구려 왕실에 혈통이 닿아있고, 졸본부여는..

카테고리 없음 2008.06.29

윤여동설 - 위만조선과 한사군의 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위만조선과 한사군은 지금의 어디에 위치했었을까? - 최초공개   [위 : 산의 굴곡을 따라 구불구불하게 축성된 승덕시 피서산장 성벽]  『조선왕 만(위만)은 옛 연나라 사람이다.  연(燕)나라가 강성할 때 진번조선을 공략하여 귀속시키고 관리를 두고 요새를 쌓았었다. 진(秦)나라가 연나라를 멸망 시켰을 때 조선은 요동(遼東)의 외곽에 속하게 되었다.  한(漢)나라가 흥기하자 그곳이 멀고 수비하기가 어렵다하여 요동의 옛 요새를 다시 수리하고 패수(浿水)까지를 경계로 정하여 연나라에 속하게 하였다.  연나라왕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들어가자 만(위만)도 1천여 명의 무리와 함께 상투(추결)를 틀고, 만이의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요새를 넘어 달아나 패수를 건너 망명하여 진나라의 빈땅인 상하..

카테고리 없음 2008.06.17

윤여동설 - 한사군의 원래위치와 2군 1도위로의 변화도 - 최초주장

윤여동설 - 한사군의 원래위치와 2군 1도위로의 변화도 - 최초주장 전한서의 원문과 해석문을 함께 올리는 것은 우리의 일반적인 역사 상식과 같이 옛날 한나라의 현토군이 한반도의 함경도 지방에 위치했는지, 아니면 필자의 주장과 같이 (원래 내몽골 옹우특기 부근에 있다가) 북경(옛 요동군이었다) 서북쪽 부근으로 옮겼는지, 낙랑군이 북한 평양 부근에 설치되었는지 아니면 필자의 주장과 같이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에 설치되었는지를 확인해 보라는 의미이니, 지도를 펴놓고 지명을 짚어가면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현토군(玄토郡) (전한) 무제 원봉 4년(B.C.107)에 설치했다. 고구려를 왕망이 하구려라 했다. 유주에 속한다.[응소는 말하기를 옛 진번조선호(고)국이라 했다] 호수는 45,006호이고, 인구는 221..

카테고리 없음 2008.03.28

윤여동설 - 덕흥리 고분벽화에 그려 있는 유주 13군은 어디를 말하는가? - 최초주장

윤여동설 - 덕흥리 고분벽화에 그려 있는 유주 13군은 어디를 말하는가? - 최초주장                                                                              1976년에 북한 평양의 서남쪽 평남 강서 덕흥리에서 유주자사진(幽州刺史鎭)의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그 무덤 벽화에 유주 13군의 태수들이 유주자사에게 업무를 보고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무덤의 주인공이 광개토대왕 때인 영락 18년(서기 408년)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유주 13군이란 연군, 범양군, 어양군, 상곡군, 광녕군, 대군, 북평군, 요서군, 창려군, 요동군, 현토군, 낙랑군, (대방군?)을 말하는 것이라 보여지는데,  지금 우리의 역사 상식으로 볼 때는..

카테고리 없음 2007.10.08

윤여동설 - 고구려의 광개토태왕은 최대 어디까지 정복했을까?

윤여동설 - 고구려의 광개토태왕은 최대 어디까지 정복했을까?                                                                                          압록강 북쪽인 길림성 집안(輯安)에서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호태왕비 또는 광개토왕비라고도 부른다)가 발견되어 광개토태왕이 평생에 과연 어디까지 정복했는가 하는 논쟁이 시작되었다.  광개토태왕 당시 고구려의 영향력이 과연 어디까지 뻗쳤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면 지금 조그마한 한반도에 갇혀 왜소해진 우리 국민들의 대륙기질을 잠 깨울 수 있을 것이다.       고구려 최대의 강역을 이룬 광개토태왕이 당시 어디까지 정복했을까 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자긍심과 가능성이 맞물려 있기 때문에 한민족..

카테고리 없음 2007.1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