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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한반도 최초로 풍수지리설에 따라 조성된 덕흥리 고분

윤여동 2009. 3. 6. 08:02

윤여동설 - 한반도 최초로 풍수지리설에 따라 조성된 덕흥리 고분 유주자사진의 묘

 

 

 

                                                          

 

 

 

 

   유주(幽州)라는 지역이 한반도가 아닌 지금의 중국 산서성 대동 부근으로부터 북경 부근까지를 말한다는 것은 이미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새삼스럽게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북한 평남 덕흥리에서 발견된 고분의 주인공이 바로 그 유주지역을 다스리던 유주자사 진이라는 사람이었고, 주인공의 모습과 13군 태수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자사(刺史)는 지금의 도지사와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이고, 태수(太守)는 군수쯤이 될 것인데, 그의 무덤 속에 13군 태수가 유주자사 진에게 업무를 보고하는 그림을 그려 놓았다는 것은 유주자사 진이 바로 그 유주 13군을 관할하는 직책을 맡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해 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벽화에 그려져 있는 유주 13군 태수의 그림 옆에

연군태수,

범양내사,

어양태수,

상곡태수,

광녕태수,

대군내사,

북평태수,

요서태수,

창려태수,

요동태수,

현토태수,

낙랑태수,

대방태수(?)라 쓰여 있었다.
  이는 우리가 지금 북한 평양 부근이라 인식하고 있는 낙랑군이 바로 북경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고, 우리가 황해도에 위치했었다고 역사를 해석하는 대방군 역시 북경 부근임을 알 수 있으며, 우리가 지금 요하 동쪽 요동반도 부근이라 인식하고 있는 요동군도 북경부근을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 본 블로그 "윤여동설 - 덕흥리 고분 벽화에 그려있는 유주 13군은 어디를 말하는가?" 참조요망
     
  이는 우리가 지금 우리 역사를 너무도 잘못 해석하고 있다는 말이 되지만, 필자는 오늘은 그러한 것을 따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유주자사 진의 무덤이 한반도 최초로 풍수지리설에 따라 조성된 무덤으로 추정된다는 것을 말하려고 한다. 
 

 

 

  덕흥리 고분 유주자사 진의 초상화 위쪽에서 묵서명이 발견되었는데, 그 묵서명을 해석해 보면, 

 

 "□□군 신도현 도향 [중]감리 사람으로 석가모니의 제자인 □□씨 진은 벼슬이 건위장군국소대형, 좌장군용양장군요동태수, 사지절동이교위유주자사에 이르렀다. 
  진은 77세에 죽어 영락 18년(A.D.408) 무신년 12월 25일 을유일에 (무덤을) 완성하여 영구를 옮겨 안치했다.
  주공의 무덤과 비슷한 곳에 땅을 골랐고, 유교의 법식에 따라 날짜를 택했으며, 무왕의 장례 절차에 따라 때를 정했다.
  모든 것이 한결같이 좋으므로 장례 후 부유함은 7세에 미치고, 자손이 번창하고, 관직도 날마다 올라 벼슬은 후왕에 이를 것이다. 
  무덤을 만드는데 1만 명의 공력이 들었다.
  날마다 소와 양을 삶았고, 술과 쌀(백미), 소금(간장)이 떨어지는 일이 없었다.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노니 영원무궁하리라" 

 

  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무덤의 주인공인 유주자사 진의 출생지와 종교, 생전의 벼슬, 죽을 때의 나이와 무덤조성 경위와 매장한 날짜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기록을 보면, 주공, 공자, 무왕 등이 언급되고 있는데, 이는 실제 주공이 묘자리를 잡아 주었고, 공자가 택일하여 주었으며, 무왕이 때(時)를 잡아주었다는 말이 될 수는 없으므로, "주공상지(周公相地)"는 "주공이 묻힌 무덤과 상응하다"는 의미로서 주공의 무덤과 비슷한 산세에 묘자리를 잡았다는 의미일 것이고, "공자택일(孔子擇日)"이란 유교의 교리에 따라 장례날짜를 잡았다는 의미일 것이며, "무왕선시(武王選時)"는 무왕이 죽어 장례를 치룰 때의 하관시간과 같은 때에 맞추어 유주자사 진의 영구를 안치했다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중국의 역사는 삼황오제, 하· 은· 주· 진· 한으로 이어지는데, 팔괘(八卦)라는 것은 삼황오제 때 태호복희씨가 처음 만들었다고 전해지며, 주 문왕이 다시 조정했다고 한다.
  팔괘는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되고, 이 팔괘라는 것은 뒤에 주역과 풍수지리설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 태호복희씨가 만든 것을 선천팔괘라 하고, 주 문왕이 다시 조정했다고 하는 것이 후천팔괘이다.
팔괘는 건(乾), 곤(坤), 간(艮), 손(巽), 태(兌), 진(震), 감(坎) 리(離)를 말하는 것으로서 이들을 둘씩 짝지어 만들어 낸 것이 주역 64괘이다. 세상 우주 만물은 결국 모두 이 64괘로 설명할 수 있다는 논리인데, 글쎄.............
  

 

  그리고 주공은 주 무왕의 동생으로서 무왕이 죽었을 때 왕위를 찬탈할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고 무왕의 아들인 어린 조카 성왕을 왕위에 올리고 7년 간 섭정을 하면서 주나라의 기초를 튼튼하게 다져 놓고 섭정에서 물러난 인물인데, 공자는 그를 신하들이 본받아야 할 표상이라 하였다.
  그런데 유주자사 진이 바로 이러한 위치에 있는 주공의 묘자리와 비슷한 곳에 잡았거나 혹은 그가 정치적으로 주공과 비슷한 위치에 있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주자사 진은 광개토대왕을 왕위에 올리고 정치를 가르쳤고, 그를 도와 강역을 넓히는데 많은 공을 세웠을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고, 그리하여 그의 생전의 벼슬이 유주자사에까지 오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무덤 축조공사를 하면서 1만 명의 인력을 동원할 수 있었고, 매일 소와 양을 삶았으며, 술과 쌀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라 생각해 볼 수 있다. 
  유주자사 진이라는 사람은 당시 대단한 권력을 누리다가 죽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후한서와 삼국지에 "고구려 사람들은 금·은과 재물을 많이 써서 장례를 매우 후하게 치룬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유주자사 진의 무덤조성 경위를 보면 그 기록이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판단된다. 
  1만 명의 품값과 먹거리 그리고 기타 비용을 합친다면 이때 유주자사 진의 무덤을 조성하는데 지금 인건비나 물가 등을 기준하여 환산해 본다면 적어도 10억-20 억원 정도는 소요되었을 것이다.
  이때 그의 후손들은 유주자사 진의 장례를 매우 호화롭게 치루었던 것이고, 호화묘를 조성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묵서명 중에 "모든 것이 한결같이 좋으므로 장례 후 부유함은 7세에 미치고, 자손이 번창하고, 관직도 날마다 올라 벼슬은 후왕에 이를 것이다" 라고 기록해 놓았다는 점이 이채롭다. 
  이는 지금도 묘자리를 잡을 때 지관들이 흔히 "이 묘자리는 당대에 부자가 될 자리"라던가 "이 묘자리는 후손이 번창할 자리"라고 하거나 혹은 "후손 중에 장관이 나올 자리"라고 현혹하는 말과 아주 유사하기 때문에 이 유주자사 진의 무덤이 기록상으로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조성된 한반도 최초의 무덤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필자가 덕흥리 유주자사 진의 무덤에 직접 가보지 못했지만 그의 묘자리를 풍수전문가가 가서 본다면 풍수지리상 분명 대단한 명당에 해당하는 곳에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하기야 영락 18년이라면 서기 408년인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1600년 간이나 그 무덤이 온전히 보존되었고, 앞으로도 계속 잘 보존될 것임을 감안하면 유주자사 진의 무덤은 분명 좋은 묘자리 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나 풍수지리상 그렇게 좋다는 자리에 묻혔음에도 고구려의 멸망과 함께 그의 후손들은 지금 사라져버려, 그의 무덤에 찾아와 제사지내 주는 후손도 없을 테니 나라가 멸망하면 명당도 함께 그 지기가 쇠약해지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