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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한4군(漢四郡) 은 단단대령(칠로도산)을 중심으로 설치되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12. 8. 08:50

윤여동설 - 한4군(漢四郡)은 단단대령(칠로도산)을 중심으로 설치되었다 - 최초주장

 

 

  

  한사군의 설치지역에 대해서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의견들이 서로 달라 아직까지도 명확한 결론을 도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자 어떤 이는 중국 사람들이 위만조선과 한(漢) 나라와의 전쟁에서 실제는 한(漢) 나라가 패했으나 이를 숨기고 한(漢) 나라가 승리했다고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실제 설치된 적도 없는 한사군이라는 유령 군들을 설치했던 것처럼 꾸며 기록했다고 주장하는 사람까지도 나타나게 되었다. 
  한사군이 실제 설치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정리해보면, 


  첫째는 사마천 생존시에 쓰여진 사기 조선전에 "조선을 평정하고 네 군으로 만들었다"고 만 기록했을 뿐 구체적으로 낙랑, 진번, 임둔, 현토(필자주 : 현도라고 하는 것은 글자를 잘못 읽은 것이다)라고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약 한(漢) 무제가 기원전 108년에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나누어 낙랑군, 진번군, 임둔군, 현토군이라는 네 군을 설치했던 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당시 살아있던 사마천이 그를 정확히 기록하지 않았을 리가 없을 것인데, 그는 "조선을 평정하고 네 군으로 만들었다"라고만 기록했을 뿐이고, 그로부터 200여 년이 흐른 후에야 낙랑·진번·임둔·현토라는 네 군의 이름이 전한서에 기록되었다는 것이 수상쩍다는 것이고,   

 

  둘째는 한(漢)나라가 삼을 홰청후에, 한음을 적저후에, 왕겹을 평주후에, 최를 온양후에, 우거왕의 아들 장을 기후에 봉한 것은 한(漢)나라가 위만조선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형식상 투항해온 그들을 그 땅의 제후로 봉했을 뿐인데, 후대 반고가 전한서를 쓰면서 그를 바꾸어 진번·임둔·낙랑·현토라고 기록함으로써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한사군이라는 네 군으로 둔갑시켰다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는 이 조선과 한(漢)나라간의 전쟁에 참여했던 장수들이 한결같이 모두 벌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이유로 들고 있다. 즉 위산과 공손수는 전쟁 중에 처형당했고, 전쟁이 끝난 후 육군을 이끌었던 순체는 목이 잘려 저자거리에 매달리는 형벌을 받았고, 수군을 이끈 양복은 간신히 사형을 면하고 속죄금을 물고 서민으로 강등되었는데, 위만조선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한사군을 설치했다면 상을 받아야지 왜 벌을 받느냐는 것이다.
  따라서 이때 실제는 조선이 승리했고 한(漢)나라가 패했는데, 살아서 그를 지켜본 사마천이 한(漢)나라가 전쟁에서 패했다고 사실대로 기록하지 않고, 그냥 어정쩡하게 조선을 평정하고 네 군으로 만들었다고 한(漢)나라가 승리한 척 왜곡하여 기록했으며, 후대 반고에 의해 사기의 기록을 구체화시키는 과정에서 낙랑군, 진번군, 임둔군, 현토군이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전한낙랑군의 치소는 하북성 승덕시 부근

 

  한사군의 설치 위치를 찾는다는 것은 곧 위만조선을 찾는 것이고, 옛 고조선을 찾는 일이며, 후세의 삼한과 삼국, 발해 그리고 고려의 위치까지를 찾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 역사연구에 있어서는 어느 지역보다 앞서 밝혀야 할 매우 중요한 곳이다. 특히 그 중에서도 낙랑군과 현토군의 위치는 우리 역사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그 위치를 정확히 찾고 그 치소도 찾아야 우리 역사를 정확히 해석할 수 있게 된다.   
  낙랑군이 한반도의 평양 부근에 위치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북한 평남 용강군 해운면에 있는 점제현신사비가 바로 낙랑군 점제현이 한반도 평남 용강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증거라고 했으나, 이는 낙랑군의 위치를 평양 부근으로 확정 시키기 위해 일제강점기에 원래 갈석산 부근에 있던 비석을 떼어내 한반도로 옮겨 놓고 그곳에서 발견한 것같이 연출하여 그 동네 어린이를 옆에 세워 놓고 사진을 찍어 세상에 공개한 것이라고 하고, 또 하나의 증거품으로 회자되는 낙랑 봉니(封泥)는 위조품이거나 오히려 평양 부근이 낙랑군이 아니라는 점을 확실하게 해주는 것이라는 주장이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봉니라는 것은 문서를 보내는 곳에서 중간에 개봉할 수 없도록 봉하는 것이므로 문서를 받는 곳에서 발견되는 것이 당연한데, 북한 대동강 유역에서 낙랑태수장, 낙랑대윤장, 낙랑장사 등의 명문이 있는 봉니가 발견되었다면 이는 평양이 낙랑이 아니라 낙랑으로부터 보내온 문서를 받는 곳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낙랑에 대한 논란은 최근에 이르러 더욱 가열되기에 이르렀다.      
  조선시대에는 북한의 평양이 낙랑군이었다고 하는 것은 아주 일반적인 상식에 속하는 것이었고, 정약용은 평양을 낙랑군, 강원도 춘천을 낙랑남부도위라고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근세에 이르러 국권 회복 후 우리 스스로 삼국사기를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평양에 낙랑군을 설정할 경우 수많은 옛 사서의 기록들을 완벽하게 충족할 수 없게 되자 평양낙랑설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어 낙랑의 위치에 대한 논쟁이 가열된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한사군이 한반도 북부에 설치되었을 것으로 인식해 왔고, 낙랑군의 위치에 대하여 조선시대에 쓰여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라 역사를 해석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평양이 곧 낙랑군이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수백 년 간 이를 아무 의심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었는데, 이를 평양낙랑설이라 한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평안도 평양부 건치연혁에는,
  本三朝鮮高句麗之故都 唐堯戊辰歲 有神人降太伯山檀木下 國人立爲君 都平壤 號檀君 是爲前朝鮮 周武王克商封箕子于此 是爲後朝鮮 傳至四十一代孫準 燕人衛滿奪其地 都王險城[險一作儉卽平壤] 是爲衛滿朝鮮 其孫右渠不肯奉漢詔 武帝元封二年 遣將討之定爲四郡 以王險爲樂浪郡(본래 삼조선과 고구려의 옛 도읍이다. 당요 무진년에 신인이 태백산 단목아래로 내려와 나라 사람들이 임금으로 추대했다. 도읍을 평양에 정하고 단군이라 불렀는데 이것이 전조선이다. 주 무왕이 상나라를 없애고 기자를 이곳에 봉했는데 이것이 후조선이다. 41대손 준에 이르렀는데 연나라 사람 위만이 그 땅을 빼앗아 왕험성[왕검성이라고도 한다]을 도읍으로 했는데 이것이 위만조선이다. 그 손자 우거가 한나라에 반하자 무제 원봉 2년에 장수를 보내 평정하고 네 군으로 만들었는데, 왕험(왕검성)은 낙랑군이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평양이 곧 낙랑군이라고 하는 것은 조선시대에는 설이 아니라 진리와도 같이 받아 들여졌는데, 북한의 평양에 낙랑군을 설정할 경우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3년(B.C.6) 조에 기록되어 있는 "백제의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 말갈이 있다"고 말한 온조왕의 말을 설명할 수 없게 된다.[필자주 : 온조왕이 말했다는 이 말은 사실은 "백제의 동쪽에 신라가 있고, 서쪽에는 낙랑이 있으며,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서......"의 오기이다]
  그러자 조선 후기 정약용은 강원도 춘천이 낙랑남부도위라는 주장을 펴기도 했던 것이다. 백제의 건국지를 서울 부근이라고 생각한 조선시대 사람들은 서울의 동쪽인 강원도 춘천부근에 또 하나의 낙랑이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백제시조 온조왕이 백제의 동쪽에 낙랑이 있다고 말했을 것이라고 정약용의 주장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다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낙랑왕 최리"라는 기록이 나타나자 춘천을 낙랑국이라고도 주장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소위 춘천낙랑설이다.
  지금 춘천낙랑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평양의 낙랑군과 춘천의 낙랑국은 별개로 존재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한나라가 설치한 낙랑군의 책임자라면 낙랑태수라고 호칭하는 것이 마땅한데 삼국사기에 어떻게 최리를 낙랑왕이라 기록할 수 있었겠느냐고 하며, 이는 세월이 흐르면서 평양의 낙랑군이 분열하여 그 일파가 춘천부근으로 남하하여 독립적으로 낙랑국을 세우고 칭왕을 했으므로 삼국사기에 최리를 낙랑왕이라고 기록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27년(A.D.44) 조의, "한나라 광무제가 군사를 보내 바다를 건너와 낙랑을 치고 그 지역을 빼앗아 군·현을 만드니 살수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라는 기록이 그 명백한 증거라고 하기도 한다.
  즉 전한 무제가 설치한 낙랑군을 후한의 광무제가 다시 칠 리는 없으므로 광무제가 친 낙랑은 춘천 부근의 낙랑국을 말하는 것이고, 이 낙랑국이 후한의 통치를 거부하고 칭왕을 하며 독립하려 했기 때문에 후한에서 춘천의 낙랑국을 쳐서 빼앗아 살수이남까지 한나라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록 속에 살수라고 기록된 것은 대수의 오기일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런데 다른 주장은 "낙랑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고, 장성이 시작된 곳"이라는 태강지리지의 기록을 시작으로 나타나고 있는 중국 사서들의 기록에 따라 갈석산이 있고 만리장성이 시작된 지금 중국 하북성 갈석산 부근이 낙랑군 수성현이었으므로 원래의 낙랑군은 바로 그 부근을 말하는 것이라는 것이 곧 창려낙랑설이다. 
  그러다가 창려 부근에 있던 낙랑군 세력의 일부가 후세에 한반도 평양으로 이동하여 나라를 세우고 낙랑국이라 했기 때문에 사서에 북한 평양이 낙랑이라 기록될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위만조선은 한반도에 위치했던 것이 아니라 창려 부근에 위치했으므로 위만조선은 우리의 역사가 아니며, 기자조선 역시 한반도에 위치한 적이 없었다고 설명한다.
  이는 우리 민족이 은나라 사람이라는 기자와 연나라 사람으로 기록되고 있는 위만 등 중국 세력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다고 하기 위한 민족주의적인 주장으로 이해할 수 있으나 역사를 그렇게 해석할 경우 옛 왕검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과 후대의 역사를 연결 지어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위만조선의 도읍으로서 우거왕이 도읍으로 했던 왕검성(왕험성)이 곧 낙랑군의 치소가 되었다가 고구려의 평양성이 되었으며, 고구려의 남쪽에 백제가 위치하고 있었고, 고구려의 동남쪽에 신라가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고조선·위만조선의 도읍 왕검성이었으며 낙랑군의 치소가 지금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이라는 필자의 주장으로서 이를 승덕낙랑설이라 이름짓는다.
  필자는 우리 고대 역사의 중심지는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 하북성에 있는 난하 부근으로서 고조선으로부터 고려까지의 역사가 바로 이 난하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고 본다.          
  이는 얼핏 들으면 허무맹랑한 주장으로 생각될 수도 있겠으나 지금까지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었던 우리 역사 모두를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다. 

 

☆ 자치통감에는 "樂浪郡治朝鮮縣蓋以右渠所都爲治所也(낙랑군의 치소는 조선현으로서 우거가 도읍으로 했던 곳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위만조선이 멸망한 후 왕검성이 낙랑군의 치소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한낙랑군의 경우 기원전 108년에 설치되어 하북성 승덕시에 치소를 두었는데, 바로 고조선, 위만조선의 도읍이었던 왕검성이었다.
  그러다가 36년이 흐른 기원전 82년에 이르러 임둔군은 예(동예)가 차지하게 되고, 진번군은 맥이 차지하게 되자 한(漢)나라에서는 두 군을 폐지하고, 원래 현토군의 관할지인 동옥저와 임둔군이었던 예(동예)의 7개현을 낙랑군에 이관하고 현토군을 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기게 된다.
  한편 원래의 현토군 관할지였던 동옥저와 임둔군이었던 예(동예)를 이관 받은 낙랑군에서는 그곳에 낙랑동부도위를 설치하고 도위로 하여금 다스리게 했는데, 전한, 신, 후한으로 이어지는 혼란기에 최리라는 사람이 전한낙랑군 땅과 낙랑동부도위 땅을 차지하고 스스로 낙랑국을 세우고 칭왕을 하게 되어 낙랑국이 등장하게 된다.
  그러다가 후한 건무 6년인 서기 30년에 이르러 낙랑동부도위가 고구려에 복속되고, 서기 37년에 이르러서는 낙랑국 마저 고구려 대무신왕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어 낙랑이 일단 소멸하게 된다.

 

☆ 한 무제가 설치했던 전한낙랑군은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일원이었다. 그리고 낙랑동부도위는 지금의 칠로도산(단단대령) 동쪽을 말하는 것으로서 그곳이 바로 예와 동옥저였다.

 

  삼국지 동옥저 전을 보면,
  "한 무제 원봉 2년(B.C.109)에 조선을 정벌하여 위만의 손자 우거를 죽이고 그 땅을 나누어 네 군으로 만들었는데, 옥저성을 현토군으로 하였다.

 

☆ 원봉 2년은 조선과 한나라가 전쟁을 시작한 해이고, 약 1년 간의 전쟁에서 조선이 패하게 되어 한사군이 설치된 해는 원봉 3년 즉 기원전 108년 쯤으로 추정이 가능한데, 전한서지리지에는 현토군의 설치 년도를 원봉 4년 즉 기원전 107년이라 기록하고 있다.
  먼저 낙랑군, 진번군, 임둔군을 설치한 후 1년 후에 현토군을 추가로 설치함으로써 네 군을 모두 설치했던 듯 한데, 추정해 보면 이때 옥저가 한나라에 반기를 들어 그 세력을 완전히 평정하는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뒤에 이맥의 침략을 받아 군을 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겼는데, 지금 소위 현토의 옛 부라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옥저는 다시 낙랑에 속하게 되었는데 한나라는 그 땅이 넓고 멀어 단단대령 동쪽을 나누어 (낙랑)동부도위를 설치하고 치소를 불내성에 두어 별도로 대령의 동쪽 일곱 개 현을 관할하게 하였다. 이때 옥저 역시 모두 현이 되었다.
  (후한)건무 6년(A.D.30) 변경의 군을 줄일 때 도위를 폐지하고 그 후 모두 현의 거수로서 현후를 삼으니 불내, 화려, 옥저 등의 여러 현이 모두 후국이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20년(A.D.37) 조에 "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이를 멸망시켰다" 라는 기록은 필자의 주장을 뒷받침 해주는 기록들이다. 

  그러면 위와 같은 상황들을 머릿속에 넣고 중국사서의 기록들은 낙랑에 대하여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 검토해보자.
  사마천의 사기(史記) 권2 하본기의 주에는 "太康地理志云 樂浪遂城縣有碣石山長城所起(태강지리지에는 낙랑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고 장성이 시작된 곳이라고 했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이연수의 진서지리지(晉書地理志)에는 "樂浪郡遂城縣 秦築長城之所起(낙랑군 수성현은 진나라 때 쌓은 장성이 시작된 곳)"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 진서 14  지제4 지리 상에는,
"樂浪郡[漢置統縣六 戶三千七百] 朝鮮[周封箕子地] 屯有 渾彌 遂城[秦築長城之所起] 鏤方 駟望(낙랑군[한나라가 설치했고 6개 현을 통치한다. 백성은 3천7백호이다] 조선(현)[주나라가 기자에게 봉한 땅이다] 둔유(현), 혼미(현), 수성(현)[진나라 때 쌓은 장성이 시작된 곳이다] 누방(현), 사망(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두우의 통전에는 "碣石山 在漢樂浪郡遂成縣 長城起於此山 今驗長城東截遼水而入高麗 遺址猶存(갈석산은 한나라 때의 낙랑군 수성현에 있는데, 장성이 이 산에서 시작되었다. 지금 장성이 동쪽으로 요수를 가로질러 고(구)려로 들어가는데 옛 터가 남아 있다) 라고 기록하고 있고,
  사마광의 자치통감에는 "以故遂定朝鮮 爲樂浪·臨屯·玄토·眞番 四郡 樂浪郡治朝鮮縣蓋以右渠所都爲治所也(조선을 평정하고 낙랑·임둔·현토·진번 네 군으로 만들었다. 낙랑군의 치소는 조선현으로서 우거가 도읍했던 곳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 자치통감 권21 한기 13 세종효무황제 원봉 3년 조에
  茂陵書臨屯郡治東이縣去長安六千一百三十八里領十五縣 玄토郡本高句麗也旣平朝鮮倂開爲郡治沃沮城後爲夷貊所侵徙郡句驪西北 眞番郡治삽縣去長安七千六百四十里 領十五縣余據後廢臨屯眞番二郡(무릉서에는 임둔군의 치소는 동이현으로서 장안에서 6,138리이고, 15현을 다스렸다. 현토군은 본래 고구려였는데, 조선을 평정하고 군을 설치할 때 옥저성을 군의 치소로 했다가 후에 이맥의 침공을 받아 군을 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겼다. 진번군의 치소는 삽현으로서 장안에서 7,640리이고, 15현을 다스렸다. 얼마 후 임둔, 진번 두 군을 폐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모든 기록들이 한결같이 낙랑군 수성현의 위치를 한반도 평양이 아닌 갈석산이 있고, 만리장성이 시작된 부근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이 중국 사서들의 기록들이 사실일 경우 우리는 지금까지 아주 커다란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3년 조에 왕이 "나라의 동쪽에는 [신라가 있고, 서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서 변경을 침공하기 때문에 평안한 날이 적다" 라고 말한 기록이 있고,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8년 조에도 왕이 "서쪽으로는 백제와 이웃하고 남쪽으로는 가야를 접하였다" 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고구려, 백제, 신라는 물론 가야까지도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므로 결국 앞 시대인 고조선, 부여, 위만조선, 삼한도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며, 후 시대인 삼국, 고려까지도 대륙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로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자 사실이 이러할 경우 우리의 역사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