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최리의 낙랑국은 중국 하북성 승덕시 일원에 위치하고 있었다 - 최초주장
낙랑국(樂浪國) 전한(前漢) 때 처음으로 낙랑군(樂浪郡)을 두었다.
응소(應邵)는 이것이 "고조선국(古朝鮮國)"이라 했다.
신당서(新唐書)의 주에는, "평양성(平壤城)은 옛 한(漢)나라의 낙랑군(樂浪郡)"이라고 했다.
국사(國史 : 삼국사기)에는, "혁거세 30년에 낙랑 사람들이 신라에 투항해 왔다. 또 제3대 노례왕(弩禮王 : 유리왕) 4년에 고구려의 제3대 무휼왕(無恤王 : 대무신왕)이 낙랑을 멸망시키니 그 나라 사람들은 대방(帶方: 북대방)과 함께 신라에 투항해 왔다.
또 무휼왕(無恤王) 27년에 광호제(光虎帝 : 후한 광무제)가 사자를 보내어 낙랑을 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을 삼으니, 살수(薩水) 이남의 땅은 다시 한(漢)나라에 소속되었다"고 했다.
(이상의 여러 글에 의하면 낙랑이 곧 평양성이란 것이 마땅하다. 혹은 말하기를, 낙랑의 중두산(中頭山) 아래가 말갈과의 경계이고, 살수는 지금의 대동강이라고도 하는데, 어느 말이 옳은 지 알 수가 없다)
또한 백제 온조왕의 말에는, "(백제의) 동쪽에 (신라가 있고, 서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 말갈이 있다"고 했다. 이는 아마도 옛날 한(漢)나라 때 낙랑군에 소속되었던 현(縣)일 것이다. 신라 사람들이 역시 이곳을 낙랑이라고 했기 때문에 지금 고려(高麗)에서도 또한 여기에 따라 낙랑군부인(樂浪郡夫人)이라 불렀다.
또 태조(太祖 : 왕건)가 그 딸을 김부(金傅: 경순왕)에게 시집보내면서 역시 낙랑공주(樂浪公主)라 불렀다.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은 글의 제목을 "낙랑국"이라고 붙이기는 했지만 사실 여기에서 낙랑국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횡설수설하고 있다.
기원전 108년에 한 무제는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는 그 땅을 나누어 네 군을 설치했는데, 이것이 지금까지 그 위치를 정확히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 한사군으로서 낙랑군, 진번군, 임둔군, 현토군이다.
그런데 한사군이 설치된 지 26년이 흐른 기원전 82년에 이르러 예가 동쪽으로 이동해 와서 임둔군 땅을 차지하고 독립하게 되고(필자주 : 이것이 동예이다), 진번군 땅에서는 맥이 독립하게 된다.
임둔군은 말갈, 진한과 가까운 지금의 내몽골 고륜기 부근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예가 자신들이 살던 땅을 동부여에게 빼앗기게 되자, 그곳을 떠나 동쪽으로 이동해 와서 임둔군 땅을 차지하게 되었고, 진번군은 능원을 중심으로 그 부근에 설치되었는데, 맥이 그 땅을 차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자 한나라에서는 임둔군과 진번군 두 군을 폐지할 수밖에 없었는데, 특히 북쪽으로부터의 침공 위협에 대비하기 위하여 현토군의 관할지를 구려의 서북쪽인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시 부근으로 이동시켜 동부여, 졸본부여의 침공을 방어토록 조치하게 된다. 물론 요서군과 요동군(북경 부근)이 설치되어 있었겠지만 그들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리고는 옛 현토군의 관할지였던 옥저는 낙랑군에 합하게 된다.
한편 낙랑군에서는 옛 현토군의 관할지를 이관 받고 보니 그 땅이 단단대령이라는 높은 산맥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직접 관할하기가 매우 곤란하자 낙랑동부도위를 새로이 설치하게 되는데, 지금의 내몽골 적봉, 객라심기 일원이다.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기원전 107년에 설치되었다가 기원전 76년에 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겨간 현토군의 옛 땅 일부에 설치된 것이 곧 낙랑동부도위인 것이다.
그러다가 전한이 멸망하고 왕망의 신나라가 서는 어수선한 시기가 되자 최리라는 사람이 그 낙랑군 땅과 낙랑동부도위의 땅을 차지하고 스스로 "낙랑왕"이라 칭하게 된다.
그런데 서기 30년에 이르러 고구려의 대무신왕이 그 낙랑동부도위를 쳐서 그 땅을 빼앗게 되고, 서기 37년에는 최리의 낙랑국 마저 멸망시키고 그 땅을 차지하게 되어 옛 왕검성이었으며 낙랑군의 치소, 낙랑국의 도읍으로 사용했던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부근이 고구려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되고, 한 무제가 설치했던 낙랑은 일단 소멸하게 된다.
그런데 후한의 광무제가 한(漢)나라를 복원하게 되고, 국내를 수습하고는 서기 44년에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옛 낙랑 땅을 침공하였으나 광무제는 옛 낙랑군 땅 전부를 탈환하지 못하고 살수이남 땅 만을 탈환하여 후한낙랑군을 다시 설치하게 된다.
후한낙랑군은 지금의 북경 동북쪽 흥륭 부근으로서 이 후한낙랑군은 313년까지 평양성의 턱 밑에 가까이 자리잡고 있다가 고구려 미천왕에 의해 소멸하게 되고 그 땅이 고구려의 소유가 된다.
어느 사람은 한나라 때의 낙랑군과 최리의 낙랑국의 위치를 중국 하북성 진황도 부근의 낙랑군과 북한 평양 부근의 낙랑국으로 나누기도 하나 이는 매우 잘못된 것이다.
낙랑군과 낙랑국은 모두 한반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일원에 위치하고 있었을 뿐이고, 전한낙랑군과 최리의 낙랑국의 치소는 옛 왕검조선, 위만조선의 도읍이었던 왕검성 즉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부근이었고, 후한낙랑군의 치소는 그 서남쪽인 지금의 고북구 남쪽 하북성 흥륭현 부근이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 역사 학자들은 신라가 차지했던 죽령 서북쪽 500리 땅을 한반도의 충북 단양에서 경북 풍기로 넘어가는 소백산맥 중의 그 죽령의 서북쪽 500리 땅을 말하는 것이라 하며, 이때 신라가 인천까지 진출하여 중국과의 해상교통로를 확보했던 것이라고 역사를 해석하고 그렇게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이렇게 하여 우리 대한민국 젊은이들은 우리의 대륙역사를 알지 못한 채 반도사관에 갇혀 버리게 된 것이고,
잃어버린 대륙의 옛 땅이 중국 땅이 되어 가고 있는데도 그것도 모르고 있다.
아 안타깝다.
어떻게 해야 이 대한민국 사람들의 역사인식을 바꿀 수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