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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덕흥리 고분벽화에 그려 있는 유주 13군은 어디를 말하는가? - 최초주장

윤여동 2007. 10. 8. 18:08

윤여동설 - 덕흥리 고분벽화에 그려 있는 유주 13군은 어디를 말하는가? - 최초주장

 

                                   

 

 

                                                               

 

  1976년에 북한 평양의 서남쪽 평남 강서 덕흥리에서 유주자사진(幽州刺史鎭)의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그 무덤 벽화에 유주 13군의 태수들이 유주자사에게 업무를 보고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무덤의 주인공이 광개토대왕 때인 영락 18년(서기 408년)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유주 13군이란 연군, 범양군, 어양군, 상곡군, 광녕군, 대군, 북평군, 요서군, 창려군, 요동군, 현토군, 낙랑군, (대방군?)을 말하는 것이라 보여지는데,  지금 우리의 역사 상식으로 볼 때는 그 지역이 한반도 황해도로부터 중국 산서성까지의 넓은 지역에 걸친 지역명이 나타나기 때문에 그 무덤의 주인공의 신분과 유주 13군의 위치논쟁이 시작되었다.   

  유주자사진의 벽화고분에 13군 태수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 것과 관련하여 그 무덤 주인공의 신분에 대한 논쟁은 대체적으로 세 주장으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유주자사진이 어느 땐가 연(후연)으로부터 고구려로 망명해 오자 그를 낙랑군과 대방군을 다스리는 직책으로 임명했고, 그가 요동군과 현토군 태수를 설득하여 고구려에 귀복시켰기 때문에 그가 죽자 연나라에 있었을 때의 관할지 태수들과 고구려에서의 관할지 태수 그리고 그가 고구려에 귀복시킨 군의 태수 그림이 함께 벽화에 그려졌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귀화인설이고,


  둘째는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연(후연)의 유주를 치자 유주자사진이 고구려에 투항했고 광개토대왕이 그를 그대로 유주자사로 다시 임명했고, 요동군, 현토군, 낙랑군, 대방군은 그와는 직접관련이 없으나 그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그냥 그려 넣었을 것이라는 투항설이며,


  셋째는 유주자사진이 원래 고구려 사람이었고, 그의 최종 직위가 유주자사였으며, 13군이 우리의 역사 상식과 달리 모두 산서성과 하북성 중부, 북경 부근에 위치했다는 필자가 주장하는 고구려인설이다.   

 

  유주자사진이 연(후연)나라 사람일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생각은 기본적으로 지금 요하의 서쪽지역이 고구려 땅이 아니라는 고정관념이 바닥에 깔려 있다.
  이들은 대방을 한반도 황해도로, 낙랑을 한반도 평양 또는 춘천 부근으로, 요동이나 현토는 한반도 북쪽 지금의 압록강 북쪽으로, 요서는 지금의 요하 서쪽으로, 창려는 지금의 갈석산이 있는 하북성 창려현으로, 범양, 어양, 연군, 상곡, 북평은 지금의 북경부근으로, 대군, 광녕은 지금의 산서성 지역으로 인식한다.  따라서 무덤벽에 그려져 있는 13군 태수그림의 공통점을 찾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인 것이다.
  그리하여 그를 설명하기 위해 온갖 상상력을 동원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우리의 착각이다.
  필자가 착각이라고 하는 것은 고구려의 평양성은 한반도 북한의 평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이 바로 고구려의 평양성이었기 때문이다.[필자주 : 그곳의 지금 피서산장 자리가 옛 왕검성이요, 평양성이었던 곳이다] 
  한 무제가 기원전 108년에 육군의 순체와 수군의 양복을 보내 위만조선을 침공할 때 수군인 양복이 발해에 배를 띄워 패수를 타고 올라가 왕검성의 남쪽을 공격했다는 것은 바로 양복이 산동반도에서 발해를 북서쪽으로 가로질러 난하를 타고 올라가 지금의 반가구수고에 배를 정박시켜 놓고 승덕시를 공격했던 것이고, 육군의 순체가 요동에서 군사들을 출발시켜 패수를 건너 왕검성의 서북쪽을 공격했다는 것은 지금의 북경 부근에서 출발하여 동북쪽으로 향하여 승덕시 부근에 도착했다는  말이다. 그들은 한반도 평양을 공격했던 것이 아닌 것이다. 
  한반도의 대동강 부근이 전한 낙랑군이 아니라 지금 중국 하북성에 있는 승덕시 부근이 바로 한 무제가 설치했던 전한낙랑군이었고, 전한낙랑군의 치소는 위만조선의 도읍이었던 왕검성에 두었던 것인데, 그곳이 곧 후세 고구려의 평양성인 것이다.
  자 그렇다면 우리 역사는 모두를 처음부터 다시 해석하고 다시 비정해야 하고, 여기서 논하려고 하는 유주 13군의 위치 역시 처음부터 다시 검토해야 하는 것이다.
  유주 13군 기록 속의 낙랑군은 북한의 평양 부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전한낙랑군의 치소는 하북성 승덕시 부근이었고, 후한낙랑군의 치소는 하북성 승덕시의 남쪽에 위치한 흥륭 부근이었다.

  그런데 고구려 미천왕 때인 313년에  그 후한낙랑군이 고구려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자 서진에서는 그 낙랑군의 치소를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수성진 부근으로 옮겨 명목상이나마 낙랑군을 유지시켰는데, 태강지리지의 기록 즉 "낙랑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고, 장성이 시작된 곳이다"라는 기록은 바로 서진 말기의 상황기록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갈석산을 찾지 못함으로써 한없이 헷갈렸던 것이다.

 

☆ 전한낙랑군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에 치소를 두었는데, 전한이 신나라, 후한으로 바뀌는 혼란기를 이용해 최리라는 사람이 전한낙랑군을 낙랑국으로 만들고 나라를 세워 스스로 칭왕을 하자 고구려의 대무신왕이 서기 37년에 그를 쳐 없애버리게 된다.
  그러자 후한 광무제가 서기 44년에 고구려를 침공하여 옛 낙랑을 쳐 그 일부인 살수 이남 땅을 탈환하여 그곳에 다시 낙랑군을 부활시키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후한낙랑군이었다.
  이 후한 낙랑군이 고구려와 백제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와 백제는 건국이후 400여 년 간 국경이 접하지 않아 전쟁이 없었다. 
  후한 낙랑군의 위치는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흥륭현 일원이었고, 고구려는 그 북쪽이었으며, 백제는 그 남쪽 당산, 진황도 일원이었다.
  이 후한 낙랑은 서기 44년부터 서기 313년까지 존속하다가  고구려의 미천왕에 의해 고구려의 강역으로 편입되자 서진은 그 낙랑군을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수성진 부근으로 옮겨  서진낙랑군을 유지시켰고,  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는 옛 후한낙랑군 땅을 놓고 다투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낙랑군은 갈석산이 있는 하북성 진황도 부근에 위치했고, 최리의 낙랑국은 한반도 평양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하기도 하나 이는 잘못된 주장이다. 한반도에는 어떠한 형태의 낙랑도 위치한 적이 없었다.    


 
  창려군은 지금 하북성 진황도 갈석산 부근에 창려현이 있으나 그곳은 원래 고구려 땅이 아니라 가야 또는 임나였고, 후일 신라 땅이 되었으므로 유주 13군에 포함될 수 있는 곳은 아니다.

  옛 창려군은 고죽국이 있었던 지금의 방산 유리하진 부근으로 비정해 볼 수 있다.

 어양군은 석가장 부근을 말하는 것이고,
  상곡군, 연군, 북평군은 하북성 역현 부근으로 비정되고,
  범양군은 옛 탁주로서 하북성 탁주시 부근이다.
  요동군은 북경 부근을 말하는 것이고,
  요서군은 영정하 서남쪽 방산 부근을  말하는 것이며,
  현토군은 하북성 장가구 회안 부근이고,
  광녕군은 북경 서쪽 산서성 광령이며,
  대군은 산서성 옛 대왕성 부근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랬을 경우 유주자사진의 무덤 벽화에 그려져 있는 13군 태수들은 모두 산서성 북부와 하북성 중부, 보정부근을 중심으로 하는 그 부근 지역 군의 태수들이었다는 말이 되고, 그들이 모두 유주자사의 휘하에 있었으므로 그가 죽자 무덤에 그들 13군 태수들이 업무를 보고하는 그림을 그려놓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무덤에 써진 묵서(붓으로 쓴 먹글씨)에 의하면 덕흥리 고분의 주인공은 서기 332년에 ○○郡 信都 彰都鄕(○○군 신도 창도향)에서 태어나 소형, 대형, 좌장군, 용양장군, 요동태수, 사지절동이교위유주자사의 벼슬까지 올랐음을 알 수 있는데, 그가 태어난 332년은 고구려 16대 고국원왕 2년에 해당하는 해이고, 그가 성장해 관직에 나갈 때는 고구려가 연나라 모용황의 침공을 받아 환도성이 함락되어 도읍을 평양동황성으로 옮긴 이후였고, 355년에 이르러서는 연과도 관계가 정리되고 오히려 고구려가 동진으로부터 요동, 요서, 영주까지를 빼앗았던 때였다.
  그러다가 369년에 이르러서는 백제와 갈등을 빚어 371년 10월에 이르러서는 고국원왕이 고구려를 침공한 백제군과의 평양성 전투에서 백제군이 쏜 화살에 맞아 죽게 되고, 고구려가 동진으로부터 빼앗았던 요서 땅을 백제에게 빼앗기게 되어 주춤하게 되나 광개토대왕 때인 영락 14년(A.D.404)에 이르러서는 대방을 치고, 영락 17년(A.D.407)에 요서를 쳐 그 땅을 도로 빼앗은 후 유주를 설치하고 덕흥리 고분의 주인공을 유주자사로 임명하여 주변의 13군을 다스리도록 했는데, 영락 18년(A.D.408) 무신년 12월 25일에 이르러 77세의 나이로 죽고 말았던 것이다. 
  그가 고구려의 소형, 대형 등의 벼슬을 거쳐 장군의 반열에 오르고 요동태수를 역임했으며, 지금의 도지사격인 유주자사의 벼슬까지 오를 수 있었다는 것은 그가 젊은 시절부터 관직에 나가 단계를 거쳐 승진했음을 알게 하고, 그가 하북성 보정 부근에 위치했던 유주자사의 벼슬을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무덤이 한반도 북한 평양 부근에서 발굴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의 원래 고향이 평남 대안시 부근이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그가 임지인 유주에서 죽자 수천 리 멀리 떨어진 한반도까지 운구하여 무덤을 조성했다는 것은 그의 고향이 한반도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연나라 사람이 아니라 원래 고구려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는 한반도 출신이었고, 고국원왕, 소수림왕, 고국양왕, 광개토왕 4대의 왕을 모신 고구려의 고위 관리였고, 고구려에 불교가 들어오자 불교신자가 되었던 사람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