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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원나라의 대도(大都)는 지금의 북경이 아니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09. 9. 14. 08:05

윤여동설 - 원나라의 대도(大都)는 지금의 북경(北京)이 아니었다 - 최초주장

 

[위 : 지금 중국에서는 하북성 장가구시 장북에 있는 위 옛 성터를 원나라의 중도성터(원 중도유지)라 한다] 

 

[위 : 중국에서 원 중도성터(원 중도유지]라고 하는 곳의 발굴된 현장모습인데, 사실 이곳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왕대의 기록에 나타나는 옛 황룡국의 도읍성터이다][좌표 동경114도37분16초 북위41도17분34초]

 

   일반적으로 우리는 원나라의 대도(大都)가 지금의 중국 북경(베이징)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정작 중국에서는 원나라의 중도(中都)가 북경이 아닌 북경에서 서북쪽으로 700리쯤 떨어져 있는 하북성 장가구시 장북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하며, 지금 “원 중도유지(元 中都遺址, 가로세로 각 550m, 동경114도37분16초 북위41도17분34초)”로 지정되어 있다.

 

[필자 주 : 이 유적지를 원 중도요, 원 대도로 보기에는 규모(가로,세로 각 550m정도)가 너무 작다. 따라서  이것 역시 역사적 사실은 아닌듯 하다. 필자가 보기에는 이 성은 고구려 초기 졸본 부근에 존재했던 옛 황룡국의 왕성으로 생각된다] 

 

  이는 언뜻 보기에는 별의미가 없는 듯 하지만 알고보면 매우 심각한 역사적 의문이 그 "원 중도유지" 속에 내포되어 있다.  

  금나라를 이어 일어난 몽골 즉 원나라는 쿠빌라이칸이 5대 황제에 오른 후 연경(燕京)에 도읍하고 중도(中都)라 했다가 후일 그곳을 대도(大都)로  이름을 바꾸며 원래 자신의 봉토였던 개평부에는 상도(上都)를 설치하였다고 한다.

 

* 많은 사람들이 지금의 하북성 당산시 개평구를  사서의 기록에 나타나는 개평으로 잘못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 말은 곧 연경이 원나라의 중도이자 대도라는 말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원나라의 대도가 지금의 북경으로서, 원나라 때의 궁궐터가 북경 자금성 자리일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으나 사실 지금 중국에서는 하북성 장가구시 장북 서북쪽 만두영(饅頭營)부근에서 원나라 때의 중도유지(元 中都遺址, 좌표 동경114도 37분16초,북위41도17분33초)를 발굴했다고 선전하고 있으니 지금의 북경이 연경이요, 원나라의 중도요, 대도였다는 것을 스스로 부정하고 있는 셈이다.

 

  연경(燕京)이란 옛 춘추전국시대 연나라의 도읍을 이르는 말이다.

  춘추전국시대 연나라는 선비족으로서 지금의 북경 서남쪽 하북성 중부에 걸쳐 있던 나라였다.

  그리하여 그 동쪽 난하를 중심으로 위치했던 우리 역사기록에 서쪽으로 선비(鮮卑), 연(燕), 위(魏)와의 접촉기록이 많은 것이다. 

 

☆ 많은 학자들이 춘추전국시대의 연나라가 북경 부근으로부터 지금의 요하까지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주장하나 이는 명백하게 잘못된 주장이고, 북경부근으로부터 요하까지는 고조선으로부터, 삼한, 삼국, 고려의 중심 강역이었다.

 

  그런데 춘추전국시대 연나라의 도읍이었을 연경(燕京)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그 원래의 위치를 잃어버리고 말았으나 옛 춘추전국시대의 연나라가 하북성 중부를 중심으로 존속했으니 그 도읍 연경은 그 중심지역에 위치했었을 것이다.

  발해를 멸망시키고 일어난 거란은 원래 자기들이 살던 요택부근(요수 상류를 말하는 듯 하다)을 중심으로 일어나 연운 16주를 후진으로부터 할양받은 후 대제국이 되어 국호를 요(遼)라 하고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를 설치하고, 이어 동경요양부(처음에는 상경의 남쪽에 위치했다 하여 남경이라 불렀으나 강역이 넓어져 중경, 서경, 남경을 설치하게 되자 동경으로 고쳤다), 중경대정부, 서경대동부, 남경석진부(연경)를 설치하게 된다.

 

  또한 요나라를 이어 일어난 금(金)나라는 회령[필자주 : 현 대흥안령 산맥의 내몽골 파림좌기 부근]에서 일어나 서남쪽의 요나라를 병합하고, 다시 또 남쪽으로 나아가 송나라의 도읍 개봉을 공격하여 빼앗음으로써 대제국이 되어 회령에 상경회령부(上京會寧府)를 설치하게 되고, 옛 요나라의 중경대정부에 북경대정부(北京大定府)를 설치하게 되며, 옛 요나라의 남경석진부(연경)에 중도대흥부(연경, 탁주부근)를 설치하게 되고, 동경요양부(북경부근), 서경대동부(산서성 대동부근)를 설치하고, 송나라의 옛 도읍 개봉에 남경개봉부를 설치하게 된다.

 

[원나라 때의 고지도인 혼일제도지도인데, 위 지도에서 산동 북쪽에 "동경(東京)"으로 표기된 곳이 지금의 북경이다. 따라서 그 서쪽 방향에 표기된 "대도(大都)"가 지금의 북경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금나라를 이어 일어난 원나라 역시 연경(燕京)에 도읍하고 중도(中都)라 했다가 후일 대도(大都)로 이름을 고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또 원(元)나라가 멸망한 후 명(明)나라는 처음에 남경에서 건국되었다가 연경으로 도읍을 옮기고, 북경순천부라 하였고, 이것이 다시 청(淸)나라로 이어졌는데, 청나라 역시 북경이라 하게 된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연경이 하북성 탁주시 부근에서 갑자기 지금의 북경으로 바뀌어 버렸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또 지금의 북경을 연경이라 부르게 되었고, 그것이 현재까지 전해지게 되어 사람들은 지금의 북경이 곧 춘추전국시대 연나라의 도읍 연경이었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사서의 기록에 나타나는 연경에 대한 기록들을 모두 지금의 북경을 중심으로 해석하게 되었던 것이다. 

 

[고대 의무려산이었던 지금의 북경시 방산구의 상방산]

 

 

  예를 들어 삼국사기 권제37 잡지 제6 지리4 고구려 조를 보면, “옛날 대요(요나라)가 아직 멸망하지 않았을 적에 요의 임금이 연경(燕京: 남경석진부)에 있었는데, (지금의 발해 북쪽 하북성 관성현에 도읍하고 있던) 우리(고려)의 입조 사신들이 동경(요 동경요양부로서 지금의 북경)을 통과하고, (서쪽으로 향하여) 요수를 건너서 하루 이틀 사이에 의주[의무려산(방산 상방산)이 있던 곳으로서 지금의 탁주시 부근]에 당도하여 연경, 계주로 향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사실 이 기록은 발해 북쪽 하북성 난하 부근에 위치했던 고려의 도읍 개경(현 하북성 관성현)을 출발한 고려의 사신들이 서남쪽으로 향하여 지금의 북경(동경요양부)을 지나고, 요수인 지금의 영정하를 건너, 요나라의 연경(남경석진부)으로 가는 여정을 기록했던 것인데, 우리는 지금까지 고려의 사신들이 한반도 개성에서 북경으로 가는 기록이라 이해했다.

  그러니 역사적 사실과는 아주 다른 해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지금의 중국 북경은 춘추전국시대 연나라의 도읍 연경이 아니고,

  요나라 때의 연경(남경석진부)도 아니며,

  금나라 때의 연경(중도대흥부)도 아니고,

  원나라 때의 연경(대도)도 아니다.

  지금의 북경은 고대로부터 요동이었고, 요, 금, 원의 동경요양부였던 곳으로서 요동성의 흔적들이 남겨져 있는 것인데,  명, 청 때부터 요동을 지금의 요하 동쪽으로 옮기고, 북경을 연경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