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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낙랑군과 낙랑동부도위,낙랑남부도위의 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 2009. 4. 7. 22:13

윤여동설 - 낙랑군과 낙랑동부도위, 낙랑남부도위의 위치 - 최초공개

 

 

  "낙랑(樂浪)"에 대하여 누차 언급하는 것은 이 낙랑의 위치를 정확히 찾는 것이 바로 잃어버린 우리의 역사 강역을 찾는 지름길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낙랑군은 기원전 108년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나누어 한사군을 설치할 때 그 도읍인 왕검성(왕험성이라고도 한다)을 낙랑군의 치소로 삼았기 때문에, 낙랑군의 위치를 정확히 찾을 수 있다면 지금까지도 그 위치에 대하여 논란이 많은 고조선(왕검조선)의 도읍 왕검성과 위만조선의 도읍 왕검성을  정확히 찾을 수 있고, 고조선(왕검조선)과 위만조선의 강역을 찾을 수 있을 것이며, 나머지 임둔군, 진번군, 현토군의 위치도 찾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전한서 권28하 지리지 제8하의 낙랑군 조에는, “무제 원봉 3년(B.C.108)에 처음으로 설치했는데, 유주에 속했다. 62,812호이고, 인구는 406,748명이다. 운장이 있고, 25개 현이다. 조선현(낙랑군치소), 남한현, 패수현, 함자현, 점제현, 수성현, 증지현, 대방현, 사망현, 해명현, 열구현, 장잠현, 둔유현, 소명현(남부도위 치소), 누방현, 제해현, 혼미현, 탄열현, 동이현, 불이현(동부도위 치소), 잠태현, 화려현, 사두매현, 전막현, 부조현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후일 만들어진 대방군은 바로 이 대방현을 중심으로 설치되었을 것이다.

        

  자치통감 권21 한기13 세종효무황제 원봉 3년(B.C.108) 조의 주를 보면,
  “낙랑군의 치소는 조선현이다. 우거가 도읍으로 하고 다스리던 곳이다.
  신찬은 말하기를, 임둔군의 치소는 동이현으로서 장안에서 6,138리 떨어져 있는데 영현은 15개이다.
  현토군은 본래의 고구려(구려의 오기)이다. 조선을 평정하고 함께 설치했던 군인데 치소는 옥저성이다. 후에 이맥의 침공을 받아 (현토)군을 구려(句麗:필자 주 : 고구려가 건국되기 전에 졸본 부근에 구려라는 나라가 있었고 그 구려에서 고구려라는 국호가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의 서북쪽으로 옮겼다.
  진번군의 치소는 삽현(잡현)으로서 장안에서 7,640리 떨어져 있고 영현은 15개이다. 얼마 후 임둔과 진번 2개군을 폐지하였다
  반고의 한서지리지에는 동이현은 낙랑에 속했고[필자주 : 동이현은 임둔군의 치소였는데 낙랑에 속했다는 것은 잘못된 것 같다], 삽현(잡현)에 대해서는 상고할 수 없다라고 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낙랑군의 치소는 조선현(朝鮮縣), 임둔군의 치소는 동이현(東暆縣), 초기 현토군의 치소는 옥저성(沃沮城), 진번군의 치소는 삽현(霅縣, 필자주  : 잡현으로 읽어야 옳다)이었음을 알 수 있다.

     

☆ 전한서지리지에는 진번군의 치소인 삽현(잡현)의 위치를 이미 잃어버린 상태였다고 했는데, 후대에 쓰여진 자치통감에는 진번군의 치소인 삽현(잡현)의 위치가 장안에서 7,640리 떨어져 있고, 영현이 15개였다고 했으니 후대에 이르러 어떻게 잃어버렸던 삽현(잡현)에 대한 기록을 찾았던 것일까? 그리고 진번군이 임둔군보다 1500리 정도 더 멀리 떨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매우 이상하다.필자가 보기에는 임둔군과 진번군의 거리기록을 바꾸어 기록했거나, 진번군이 장안으로부터 5,640리 떨어져 있었다는 기록의 오기가 아닐까? 혹시 五千六百四十里를 七千六百四十里로 잘못 기록한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그리고 후한서에는 낙양에서부터 각 군까지의 거리를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상곡군(上谷郡) 낙양동북 3,200리
요서군(遼西郡) 낙양동북 3,300리
요동군(遼東郡) 낙양동북 3,600리
현토군(玄郡) 낙양동북 4,000리 : 시원 5년에 구려의 서북쪽으로 새로 옮긴 현토군
낙랑군(樂浪郡) 낙양동북 5,000리 

 

[후한서에 의한 5군의 위치]

 

                                                                                                             낙랑군(5.000리)

 


                                                                    

                                                                               현토군(4,000리)

  

 

 

                                                                                    요동군(3,600리)

 

 

                                                                         요서군(3,300리)   


                                                                

                                                               상곡군(3,200리)

              

                        
                                                         ↗

 

                                    낙양[하남성 낙양에서 동북쪽은 지금의 북경 방향이다.]

     

  낙랑군은 기원전 108년 한무제가 순체와 양복이라는 두 장군을 보내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왕검성을 치소로 삼고 설치했던 4군 중의 1개 군인데, 소제 시원 5년인 기원전 82년에 이르러 한번의 변화를 겪게 된다.
  이때 한사군 중 임둔군과 진번군이 폐지되고, 또 기원전 75년에 이르러서는 옥저성을 치소로 삼았던  현토군(한서에는 현토군은 낙랑군보다 1년 뒤인 기원전 107년에 설치되었다고 했다)이 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김으로써 그 관할지를 바꾸게 되는데,, 원래 현토군과 진번군의 관할이었던 단단대령 동쪽의 7개현은 낙랑군에 소속된 낙랑동부도위가 되고, 또 낙랑군의 남쪽지역 일부는 낙랑남부도위가 되었다가 후한낙랑군과 대방군이 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 역시 지금 우리는 그 위치를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

 

[기원전 82년 이후의 낙랑군과 낙랑동부도위 그리고 낙랑남부도위의 위치]

 

                            단
               낙랑군        단            낙랑동부도위
            (치소 조선현)     대        (치소 불이현)       
                                       령         
           

         

            낙랑남부도위
            (치소 소명현)

 

  그런데 고구려의 평양성은 옛 고조선의 왕검성이었고, 위만조선의 도읍이었으며, 전한 낙랑군의 치소였는데, 후한서 고구려전에는, “고구려는 요동 동쪽 1천리에 있다. 남쪽은 조선, 예맥, 동쪽은 옥저, 북쪽은 부여와 접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고구려가 초기 현토군의 치소였던 옥저성의 서쪽에 위치했다는 것을 알게 하고, 
  수서 고(구)려전에는, “고구려의 도읍은 평양성으로서 장안성이라고도 하는데, 동서가 6리로서 산의 굴곡을 따라 성곽을 쌓았고, 남쪽으로는 패수에 닿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평양성이 패수가에 위치했고, 산 능선을 따라 구불구불하게 쌓은 성이라는 것을 알게 하며, 구당서 고(구)려전에는, “고구려의 도읍은 평양성인데 곧 한나라 낙랑군의 옛 땅이다. 장안에서 동쪽(필자주 : 동북쪽의 오기)으로 5,100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후한서는 하남성 낙양에서 후한낙랑군까지의 거리가 5,000리라고 하였는데, 구당서는 장안(섬서성 서안)에서 고구려 평양성까지 5,100리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발해에서 하북성 당산시와 진황도시의 경계를 가르며 흐르는 난하를 타고 올라가면 천안, 천서를 지나 만리장성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지나며, 하북성 승덕시와 당산시의 경계를 이루는 반가구수고에 이르게 되고, 더 올라가면 승덕현(하판성진)과 상판성진을 지나, 무열하(武烈河)가 난하와 합류하는 곳인 풍영자진(馮營子鎭)에 이르게 되는데, 이때 무열하를 타고 올라가면 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열하행궁)에 이르게 되고, 난하를 계속 타고 올라가면 승덕시의 서쪽을 지나 내몽골 다륜, 정남기에 이르게 되는데, 그 북쪽에 옛 동부여가 위치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피서산장(열하행궁)은 중국 성들처럼 평지에 사각형태로 반듯하게 성을 쌓은 것이 아니라 산등성이를 따라 구불구불 성을 쌓았고, 그 성의 내부 면적이 170만평이나 되는 어마어마하게 넓은 성이고, 남쪽은 여정문(麗正門)이라 하고 서북쪽에는 서북문(西北門)이 있는데, 이 성이 바로 고조선, 위만조선의 왕검성, 전한낙랑군의 치소, 고구려의 평양성으로 비정되는 곳으로서, 사서들에 장안에서 5,000여리 떨어졌다고 기록했던 곳이다.

 

☆ 피서산장의 남문인 여정문(麗正門)이라는 명칭에 고구려의 흔적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고 생각되고, 위만조선 침공시 수군인 양복은 산동반도에서 서북쪽으로 발해를 건너 패수(현 난하)의 하류에서 강를 타고 올라가 바로 이 피서산장(옛왕검성)의 남문 앞에 주둔했고, 순체는 요동(현 북경부근)에서 동북쪽으로 나아가 왕검성 서쪽을 흐르는 패수를 지키는 위만조선군을 격파하고 강을 건너 피서산장의 서북문 앞에 주둔했었다.


 

  그렇다면 결국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일원이 곧 전한낙랑군이었음을 알 수 있으니 남부도위와 동부도위는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즉 낙랑남부도위는 승덕시 피서산장(열하행궁)의 남쪽인 지금의 흥륭, 밀운, 평곡, 준화 부근에 설치되었을 것이고, 낙랑동부도위는 피서산장(열하행궁)의 동쪽이며 칠로도산(필자주 : 옛 단단대령이다) 너머인 지금의 적봉, 영성, 능원 부근에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으니 남부도위의 치소였다는 소명현은 지금의 흥륭현을 말하는 것이라 생각되고, 동부도위의 치소였다는 불이현은 지금의 내몽골 객라심기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한 무제가 설치했던 낙랑군이 북한의 평양부근이라 이해함으로써 낙랑남부도위는 그 남쪽인 황해도에, 낙랑동부도위는 북한 평양의 동쪽 백두대간 너머 함경남도와 강원도 일원에 위치했었다고 역사를 해석하고 있으니 세상에 이런 엉터리가 있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