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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새로 옮긴 현토군의 치소는 하북성 장가구 부근 - 최초공개

윤여동 2008. 12. 17. 00:26

 

 윤여동설 - 기원전 75년(元鳳6년)에 새로 옮긴 현토군의 치소는 하북성 장가구 부근 - 최초공개

 

 

 

  원봉(元封) 4년(B.C.107)에 설치된 초기 현토군의 위치는 지금까지도 오리무중이고, 원봉(元鳳) 6년(B.C.75)에 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겼다는 현토군 역시 아직도 어디를 말하는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한반도 북한 평양을 낙랑군으로 인식한 조선시대 사람들은 초기 현토군이 함경도 함흥지역에 설치되었다가 요하 부근으로 옮겨갔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였다.
  그렇지만 옛 고조선, 위만조선의 도읍 왕검성이었고, 전한 낙랑군의 치소였던 곳이 한반도 부근에 위치했던 것이 아니라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이라면 현토군의 위치 역시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하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된다.

   
☆ 우리는 지금 보통 "玄菟郡"이라고 쓰고 "현도군"이라고 읽는데 왜 이렇게 읽게 되었는지 의아하다. "菟(토)" 자는 새삼이라는 식물을 나타내는 새삼토 자이므로 "현토군"이라고 읽어야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동옥저를 떠나 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긴 현토군은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 후한서 지제23 군국5에는 玄菟郡 武帝置  낙陽東北 四千里 六城 戶一千五百九十四 口四萬三千一百六十三(현토군은 무제가 설치했는데 낙양 동북쪽 4천리에 있다. 6성으로서 1,594호(10,594호의 오기가 아닐까?)이고 인구는 43,163명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4천리에 위치했다는 현토군이 한반도 북쪽에 위치할 수는 없는 일이다.

 

  사서의 기록을 한반도를 기준으로 해석할 경우 새로 옮긴 현토군은 요하 부근으로 밖에 비정할 수 없으나, 발상을 획기적으로 전환하여 고대의 요동을 지금의 북경으로, 고구려의 평양성을 하북성 승덕시 부근으로 비정하고, 후한낙랑군을 하북성 승덕시 흥륭현 일원으로 비정한다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 해석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 전개되는 것이다.
  삼국사기 권 제37 잡지 제6 지리4 고구려·백제 편  고구려조에는 "고구려가 처음에는 중국 북쪽 땅에서 살았는데 점점 동쪽의 패수 옆으로 옮겨왔다(高句麗始居中國北地 則漸東遷于浿水之側)"고 하였으므로 고구려의 건국지 졸본이 중국 북쪽지역에 위치했었다는 것은 분명하고 후한의 도읍은 낙양이었다.
  낙양은 동경 112도와 113도 사이(동경112도28분 북위34도41분)에 위치하는데, 그 북쪽이라면  대동, 장가구, 화덕, 상도, 고원, 정람기 등 내몽골 고원지대에 속하는 지역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기록을 지금까지 한반도 압록강 북쪽 지역으로 비정하여 역사를 해석하는 우를 범하고 있었다.
  따라서 졸본은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 후성진 부근으로 비정된다.
  그리고 국내성(연경현 영녕진)이나 환도성(회유현 발해진) 역시 그 부근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후한서 고구려 전을 보면,
  "구려는 일명 맥이라 한다. 별종으로서 소수에 의지하여 살기 때문에 소수맥이라 한다" 라는 기록이 보이고, 또 고구려가 평양성에 도읍하고 있을 때의 위치를 "요동 동쪽 1천리에 있다. 남쪽은 조선과 예맥, 동쪽은 옥저, 북쪽은 부여와 접했다. 땅이 사방 2천리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우리는 이 기록을 한반도를 중심으로 해석하여, 지금의 요동으로부터 동쪽으로 1천리 거리를 지금의 길림성 집안쯤으로 보았고, 남쪽의 조선은 북한 평양부근, 예맥은 강원도 강릉부근, 동쪽의 옥저는 함경남도 함흥부근, 북쪽은 길림성 송원 부근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마침 집안에는 광개토대왕의 능비인 호태왕 비가 서 있고, 송원의 옛 지명이 부여였으므로 그렇게 비정하는 것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집안의 서쪽 방향인 환인을 졸본으로 보았는데, 그곳에도 마침 높은 절벽 위에 세워진 오녀산성이 있어 그곳을 졸본성이라고 하게 되었고, 구려 역시 그 부근에 위치했다고 생각하여 동옥저로부터 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긴 현토를 요녕성 철령시 부근으로 비정했던 것이다.
  

 

☆ 후한서에는,
탁군(涿郡)  낙陽東北 千八百里(낙양동북 1,800리)
어양군(漁陽郡)  낙陽東北 二千里(낙양동북 2,000리)
우북평군(右北平郡)  낙陽東北 二千三百里(낙양동북 2,300리)
대군(代郡)  낙陽東北 二千五百里(낙양동북 2,500리)라 기록되어 있고,
상곡군(上谷郡)  낙陽東北 三千二百里(낙양동북 3,200리)
요서군(遼西郡)  낙陽東北 三千三百里(낙양동북 3,300리)
요동군(遼東郡)  낙陽東北 三千六百里(낙양동북 3,600리)
현토군(玄 郡)  낙陽東北 四千里(낙양동북 4,000리)
낙랑군(樂浪郡)  낙陽東北 五千里(낙양동북 5,000리)라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정작 전한낙랑군의 치소로 사용한 고조선·위만조선의 왕검성이 지금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이었고, 졸본이 하북성 적성현 후성진 부근을 말하는 것이었으니 우리 역사는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것이다.
  아니 우리가 지금 한반도에 살고 있기 때문에 빚어진 착각이었던 것이다.
  구려는 국내성인 연경 부근의 다른 이름으로 보인다.

   따라서 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겼다는 현토군의 치소는 그 서북쪽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현토군은 동쪽의 고구려, 북쪽의 동부여, 서쪽 선비의 중간 지역에 절묘하게 자리를 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이 현토군은 그 동쪽 가까이에서 건국된 고구려와의 접촉 기록이 많이 남겨지게 되고, 동부여와의 접촉기록도 남겨지게 되며, 중국 세력들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 때로는 현토를 지나 공격해오기도 하고, 고구려가 현토군을 공격하기도 하는 것이다.
  
  

[참고] 

 

 

  현토군은 지금 중국 하북성 장가구시 서남쪽에 위치한 회안성진으로서 가로, 세로 각 1.5km의 정사각형 고성터인데, 이 성터가 현토군과 관련 있는 성터로 보인다. 사서의 기록에 중국 세력들이 현토로 나와서 고구려를 침입하였다는 기록이 있을경우  그들은 바닷가를 경유해야 하는 요서, 요동을 통과하지 않고, 북쪽으로 태행산맥을 넘어 산서성 북쪽 내륙을 통과하여 고구려를 침공했다는 기록으로 이해하면 된다. 좌표는 동경 114도28분, 북위40도27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