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고구려의 광개토태왕은 최대 어디까지 정복했을까?
압록강 북쪽인 길림성 집안(輯安)에서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호태왕비 또는 광개토왕비라고도 부른다)가 발견되어 광개토태왕이 평생에 과연 어디까지 정복했는가 하는 논쟁이 시작되었다.
광개토태왕 당시 고구려의 영향력이 과연 어디까지 뻗쳤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면 지금 조그마한 한반도에 갇혀 왜소해진 우리 국민들의 대륙기질을 잠 깨울 수 있을 것이다.
고구려 최대의 강역을 이룬 광개토태왕이 당시 어디까지 정복했을까 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자긍심과 가능성이 맞물려 있기 때문에 한민족의 영광을 염원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그 위치를 찾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비문의 기록에 나타나는 지명들이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어 광개토태왕 당시 고구려 강역의 범위에 대하여 많은 주장들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이는 대개 다섯 주장으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남쪽으로는 한반도의 한강, 북쪽으로는 흑룡강, 서쪽으로는 요하, 동쪽으로는 연해주에 이르렀을 것이라는 주장이 요하진출설로서 현재 정설로 인정받고 있고,
둘째는 동·남·북쪽은 요하설과 같지만 서쪽으로 요하를 건너 난하까지 진출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난하진출설이며,
셋째는 대흥안령산맥을 넘어 만주리까지 진출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만주리진출설이고,
넷째는 만주리에서 더 나아가 바이칼호수까지 정복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바이칼호수진출설이며,
다섯째는 필자의 주장으로서 가능성을 최대로 넓힌다면 광개토대왕이 북서쪽으로는 바이칼까지, 북쪽으로는 야블로노비산맥스타노보이산맥까지, 남쪽으로는 한반도를 지나 일본열도까지, 동쪽으로는 오오츠크해까지, 서쪽으로는 알타이산맥까지는 정복했을 것이라고 보는 알타이산맥진출설이다.
요하진출설은 광개토태왕 당시 고구려의 도읍이 황성(평양 동쪽 황성) 즉 지금 북한 평양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고, 광개토태왕의 정복지가 압록강 북쪽 만주 일대였으므로 왕이 죽자 그 중심쯤 되는 집안에 능을 조성하고 정복지를 돌에 새겨 비석을 세웠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난하진출설은 역사 기록에 나타나고 있는 고구려의 서쪽 경계는 일반적으로 요수까지인데, 지금의 요하를 옛 기록 속의 요수로 보지 않고 난하를 요수로 보는 시각인데, 이는 전한서지리지 요동군 조의 "大遼水出塞外 南至 安市入海 行一千二百五十里(대요수는 요새 밖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안시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길이가 1,250리이다)라는 기록과 현토군 조의 "遼山(小)遼水所出西南至遼隊入大遼水(요산에서 (소)요수가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흘러 요대(현)에 이르러 대요수로 들어간다)라는 기록을 지금의 난하로 보는 것이다.
☆ 수경에는 요수에 대하여 "大遼水 出塞外衛白平山 東南入塞 過遼東襄平縣西 又 東南過房縣西 又 東過安市縣西南 入於海 又 元莵高句麗縣有遼山 小遼水所出 西南至遼隊縣 入於大遼水也(대요수는 요새 밖 백평산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흘러 요새로 들어가 요동 양평현 서쪽을 지나고, 또 동남쪽으로 흘러 방현 서쪽을 지나고, 또 동쪽으로 흘러 안시현 서남쪽을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 또 원토(현토) 고구려현에 요산이 있는데, 소요수가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흘러 요대현에 이르러 대요수로 들어간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중국 사람들이 말하는 새(塞) 또는 장새(長塞)라고 하는 것은 만리장성을 말하는 것인데, 요수를 설명하면서 만리장성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의 요하는 만리장성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요수가 될 수 없고, 난하가 만리장성을 끊고 흐르고 있으므로 지금의 난하가 곧 옛 기록 속의 요수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주장은 요하가 곧 요수라는 말도 안되는 주장보다는 한결 진취적이기는 하지만 그 서쪽의 조하도 고북구를 통과하여 만리장성을 끊고 흘러 밀운수고로 들어가고, 또 백하도 만리장성을 끊고 흘러 밀운수고로 흘러들며, 다시 그 서쪽 영정하 역시 만리장성을 끊고 흐르고 있으니 난하가 만리장성을 끊고 흐르기 때문에 요수라고 추정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고구려가 난하까지 진출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고구려의 중심 강역을 한반도 또는 부근으로 보기 때문에 서쪽으로 더 나아가지를 못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따라서 이 주장은 기존의 주장에서 요수의 위치만을 새로 비정해 고구려의 강역을 서쪽으로 약간 넓힌 정도의 주장이라 할 수 있다.
만주리진출설은,
호태왕 비문 영락 5년 조의,
"永樂 5年 歲在乙未
영락 5년은 을미년이다
王以碑麗 不歸☆人 躬率往討
왕이 비려가 (붙잡아간) 사람들을 돌려보내지 않으므로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였다
過富山 負山 至鹽水上
부산과 부산을 지나 염수에 이르러
破其三部落 六七百營
세 개 부락 6, 7백 영을 격파하고
牛馬群羊 不可稱數 于是旋駕
셀 수 없을 만큼의 소 말 양떼를 노획하고 개선하는데
因過襄平道 東來 ☆城 力城 北
양평도를 지나 동쪽으로 ..성 역성 북풍을 거쳐왔다
王備獵 遊觀土境田獵而還
왕이 사냥을 준비시켜 경치도 구경하고 사냥도 즐기면서 돌아왔다" 라는 기록을 만주벌판에 대한 기록으로 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이때 광개토태왕이 대흥안령산맥을 넘어 만주리 부근까지 정복했던 기록으로 보는 것이다.
☆ 위서 권100 열전제88 거란 전을 보면, 태화 3년(A.D.479) "高句麗竊與유유謨欲取地豆于以分之(고구려가 유유와 공모해 지두우를 습격해 취한 후 나누려고 했다)"라는 기록이 있어 장수왕 때 고구려가 지두우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지두우와 실위의 정확한 위치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위서의 지두우에 대한 설명을 보면 지두우가 오곡이 재배되지 않는 지역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유목민족이 사는 내몽골 또는 그보다 더 북위도에 위치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바이칼호수진출설은 진서 권97 열전제67 동이 비리 등 10국 조에 기록되고 있는 비리(裨離)를 호태왕비문의 비려(碑麗)와 동일한 곳으로 인식하고 그러한 주장을 하는 것인데, 진서에는 비리가 숙신으로부터 말을 타고 200일을 가야 하는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학자들이 숙신 땅이었다고 하는 지금의 두만강 북쪽으로부터 서북쪽 방향으로 도보로 가는 것이 아니라 말을 타고 200일 쯤 가야하는 거리라면 적어도 바이칼 호수까지는 갔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알타이산맥진출설은 필자가 주장하는 설로써 숙신이 두만강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실은 지금의 흑룡강 최상류인 대흥안령산맥 일대를 차지하고 있었고, 장수왕 때 고구려와 지두우(地豆于)에 대한 접촉기록이 위서에 기록되어 있는데, 위서 권100 열전88에는 지두우에 대하여 "지두우국은 실위 서쪽 천여 리에 있다. 소와 양이 많고 명마가 산출된다.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오곡은 없어 고기와 락(유가공 식품인 치즈, 요구르트 등을 말함)을 먹는다(地豆于國 在失韋西千餘里 多牛羊 出名馬 皮爲衣服 無五穀 惟食肉酪)"라고 기록하고 있어 유목민의 생활방식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고, 실위와 두막루의 남쪽에 숙신이 위치한다고 했으며, 지두우의 북쪽에 오락후가 위치하는데, 오락후에서 서북쪽으로 20일을 가면 북해에 닿는다고 했기 때문에 기록 속의 북해를 지금의 바이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 고구려의 국내성은 지금의 중국 북경 연경현 부근, 평양성은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부근이었다. 따라서 이때 고구려의 강역은 서쪽으로는 지금의 요하나 난하가 아니라 북경을 지나 산서성 북부와 내몽골, 몽골까지, 북쪽으로는 지금의 야블로노비산맥까지, 동쪽으로는 오오츠크해에 닿았을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다.
☆ 광개토대왕 때 고구려가 산서성 북부까지 진출했을 것으로 보는 것은 덕흥리 유주사자 진의 무덤 벽화에 대군(현 산서성 대현) 태수가 업무를 보고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기 때문에 당시 대군이 유주자사의 관할 하에 있었을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광개토대왕은 평생에 어디까지 정복했었을까?
비문의 정복기록 영락 5년(A.D.395) 조를 보면, 이때 왕이 직접 염수(鹽水)까지 가서 비려(碑麗)를 토벌하여 세 개 부락 6, 7백 영(營)을 격파하고는 셀 수 없을 만큼의 소·말·양떼를 노획하고는 동쪽으로 양평길을 지나 돌아왔는데, 도중에 여유 있게 군사들과 함께 사냥도 하고 나라의 서쪽 국경도 구경하면서 돌아왔다고 하는데, 양평이란 북경부근을 말하는 것이고 동쪽으로 양평길을 지나면서 (고구려의) 서쪽 국경도 구경하면서 돌아왔다고 했으므로 이때 광개토대왕은 나라의 서쪽으로 멀리 나아갔다가 돌아왔다고 할 수 있다.
☆ 전한서지리지 요동군 양평현 조에는 "襄平 有牧師官 莽曰 昌平(양평에는 목사관이 있다. 왕망은 창평이라 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영락 6년(A.D.396) 조에는 백잔(대륙백제)을 쳐 아신왕의 항복을 받고 58개 성 7백 개 촌을 빼앗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 백잔을 쳐 58개성, 7백개 촌을 빼앗았다는 것은 옛 후한낙랑군이었던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흥륭현 일원을 빼앗다는 말이다.
영락 8년(A.D.398)조에는 백신토곡(帛愼土谷)에 군사를 보내 남녀 포로를 잡아오자 이때부터 조공을 바치고 업무를 보고하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영락 10년(A.D.400)조를 보면 왜를 쳤다 하고, 영락 14년(A.D.404) 조를 보면, 대방(준화 부근)을 침공한 왜를 격퇴시켰고, 영락 17년(A.D.407) 조를 보면, 후연을 쳐 지금의 산서성으로부터 북경 부근까지의 땅을 차지하게 된 것으로 생각되며, 영락 20년(A.D.410) 조에는 동부여를 쳐 항복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백잔과 대방, 왜는 고구려의 남쪽에 위치했던 나라들이었고, 동부여는 고구려의 북쪽에 위치했으므로 내몽골 정람기부근을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으나 비려나 백신토곡이 과연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진서(晉書)에는 비리국에 대하여,
"裨離國在肅愼西北馬行可二百日領戶二萬 養雲國去裨離馬行又五十日領戶二萬 寇莫汗國去養雲國又百日行領戶五萬餘 一群國去莫汗又百五十日 計去肅愼五萬餘里 其風俗土壤 未詳(비리국은 숙신 서북쪽에 있다. 말을 타고 200일을 가야한다. 백성이 2만 호이다. 양운국은 비리에서 말을 타고 또 50일을 가야한다. 백성이 2만 호이다. 구막한국은 양운국에서 또 100일을 가야한다. 백성이 5만여 호이다. 일군국은 막한(구막한국)에서 또 150일을 가야한다. 합하면 숙신에서 5만여 리이다. 그 풍속토양은 모두 상세하게 알지 못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만주리진출설에서 주장하듯 비려가 곧 진서에 기록되어 있는 비리를 말하는 것이라면 광개토대왕은 흑룡강 상류인 대흥안령산맥 부근의 숙신에서 서북쪽으로 말을 타고 200일이나 가야하는 먼 곳까지 갔다는 말이 되어 우리가 지금 생각하기에 러시아 또는 유럽까지 갔던 기록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으나 옛날 거리 단위라는 것이 정확할 수 없는 점을 감안해 생각하면 비리는 알타이산맥 정도를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광개토대왕이 염수(소금호수)까지 갔다는 기록과 비리가 말을 타고 200일을 가야 할 만큼 먼 거리에 위치했다는 기록을 결부시켜 염수를 사해라고 해석해 광개토대왕이 이때 이스라엘, 요르단까지 갔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이는 너무 심한 비약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로부터 3년 뒤에 광개토대왕이 군사를 백신토곡으로 보내 막사라성, 가태라곡 남녀 3백인을 잡아왔고, 이때부터 그 나라가 조공을 바치며 업무를 보고하게 되었다면 과연 이 백신토곡은 또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약간 확대 해석해 본다면 광개토대왕은 이때 비려로부터 남쪽으로 더 나아가 보도록 명령했고 명을 받은 고구려군은 남서쪽으로 나아가 지금의 신강위그루자치구로 향했던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어떤 사람은 백신(帛愼)을 식신(息愼)으로 보아 숙신(말갈, 여진)으로 보기도 한다.
지금 유럽에는 어느 날 갑자기 동쪽으로부터 홀연히 나타나 1백여 년 간 온 유럽을 무자비하게 약탈해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하다가 또한 어느 날 갑자기 바람같이 사라져 지금까지도 그 실체를 확인하지 못하고 있는 훈족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훈족의 말타는 모습이 우리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나는 수렵도와 유사하고, 그들이 사용했던 활이 우리의 맥궁과 유사하며, 금관이 출토되는 곳은 세계에서 신라와 아프가니스탄 뿐이며, 가야 청동 솥과 훈족의 청동 솥이 비슷하다 하고, 훈족의 생김새가 네모진 얼굴에 광대뼈가 튀어 나왔고, 납작한 코에 옆으로 가늘게 찢어진 눈을 가졌다고 기록하고 있어 틀림없는 몽골리안의 모습이기 때문에 훈족의 원류를 한민족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훈족이 곧 한민족이었을 것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아마 고구려의 팽창 정책으로 중앙아시아를 지나 유럽으로 밀려간 오락후(오라혼, 오라호라고도 한다)의 일부가 훈족이 되었던 것이 아닌가 싶은데, 이는 지금의 헝가리가 훈족이 세운 나라라 하기도 하고, 오라혼이 훈(hun)족으로 전해진 것이 아닌가 싶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의 역사 상식을 뛰어넘는 아주 먼 지역인 몽골, 내몽골, 돈황 등지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고구려의 흔적들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흥안령산맥 너머로 우리 사고의 폭을 넓힐 필요가 있다.
따라서 광개토태왕이전부터 고구려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서정을 감행했다면 광개토태왕 때는 비록 유럽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끝없는 몽골 평원을 지나 알타이산맥까지는 진출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고, 돈황이나 오로목제(우루무치)까지는 진출해 실크로드 천산북로는 장악했을 것으로 보여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후세 고구려의 후예인 고선지도 더 나아가 파미르고원을 넘을 수 있었고, 대제국을 이룬 징기스칸도 광개토대왕 때의 정복지를 지나 유럽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고 본다면 광개토대왕의 정복이 서역으로 진출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광개토대왕은 우리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멀리 진출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넓은 강역을 일구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아직은 설에 머물 수밖에 없지만 이를 명확히 밝힐 수 있는 날 고구려가 새롭게 부각될 수 있을 것이고, 광개토대왕이 지금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넓은 땅을 정복한 위대한 태왕이었음을 다시 인식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