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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동부여는 내몽골 정람기 부근에 위치했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6. 29. 22:42

윤여동설 - 동부여는 내몽골 정람기 부근에 위치했었다 - 최초주장

 

 

[위 : 내몽골 정람기 동북쪽에 위치한 대형고성터. 지금 중국에서 원 상도유지라고 하고 있으나 사실 이곳은 옛 예성(濊城)이었을 가능성이 많은 곳이다]  

 

[위 : 내몽골 정람기에 위치한 고성터로서 지금 사랑성(四郞城)이라 부르고 있다] 

 

  부여는 아주 오래된 나라의 이름이다.
  옛날 고조선의 건국시조 단군 왕검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다고 한다.
  장자는 부루, 둘째는 부소, 셋째는 부우, 막내는 부여(夫餘, 扶餘)였는데, 단군왕검이 왕검성의 서쪽지역을 부여에게 영지로 내려주게 되어 나라 이름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부여는 고조선이 멸망하자 북부여, 졸본부여, 동부여로 나누어지게 되는데, 북부여는 고구려 왕실에 혈통이 닿아있고, 졸본부여는 백제왕실과, 동부여는 신라왕실에 혈통이 닿아있다.

 

☆ 고구려시조 주몽왕(추모왕)은 북부여의 건국시조인 천제 해모수의 고손자(또는 5세손자)이고, 백제시조 온조왕은 졸본부여의 건국시조인 동명왕의 증손자이며, 신라시조 혁거세거서간은 동부여의 건국시조 해부루왕의 외손자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부여의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하고는, "부여국(필자주 : 동부여를 말하는 것이다)은 현토의 북쪽 1천리에 있는데, 남쪽은 고구려, 동쪽은 읍루, 서쪽은 선비와 접했고, 북쪽에는 약수가 있다" 라는 후한서 부여국전의 기록과 "부여는 장성의 북쪽에 있는데, 현토에서 1천리 떨어져 있다. 남쪽은 고구려, 동쪽은 읍루, 서쪽은 선비와 접했고 북쪽에는 약수가 있다" 라는 삼국지 부여전의 기록을 한반도 북쪽에 적용하여 해석함으로써 부여가 백두산 북쪽으로부터 흑룡강사이의 땅에 넓게 위치했다고 이해한다.

 

☆ 약수가 어디를 말하는지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는데, 역사학자들은 이 약수를 지금의 흑룡강이라 하고 있으나, 재야 역사연구자들 사이에서는 바이칼 호수를 약수라고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삼국지에는 부여가 장성의 북쪽에 위치했으며, 현토군에서 1천리쯤 떨어진 곳에 위치했다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삼국지에서 말하는 부여란 시기적으로 동부여를 말하는 것이고, 중국 사람들이 말하는 장성이란 지금의 만리장성을 말하는 것인데, 지금의 만리장성은 하북성 진황도 산해관 노룡두에서 시작되어 중국 대륙의 북쪽을 가로질러 서쪽의 감숙성 가욕관까지 무려 1만리에 뻗쳐 있다.
  실제 동부여가 한반도 백두산 북쪽에 위치했었고, 중국 사가들이 바보가 아니라면 만리장성과 수천 리 떨어져 있어 아무 관련도 없는 백두산 북쪽을 장성의 북쪽이라 기록했을 리는 없고, 실제 부여(동부여)가 만리장성의 북쪽 방향인 지금의 내몽골에 위치했기 때문에 그러한 기록이 남겨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부여(동부여)의 위치를 찾는 또 하나의 기준점인 현토군은 과연 지금의 어디에 위치했던 것일까?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나누어 처음 설치했던 한사군은 지금의 난하를 중심으로 설치되었었다. 위만조선의 도읍이었던 왕검성(현 하북성 승덕시 부근)은 낙랑군의 치소였고, 초기 현토군은 왕검성의 동북쪽에 위치했던 옥저성(필자주 : 현 내몽골 옹우특기 부근)에 치소를 두었었고, 진번군은 왕검성의 동쪽인 삽현(현 능원 부근)에 치소를 두었으며, 임둔군은 동이현(현 고륜기 부근)에 치소를 두었었다.

 

[한사군의 위치] 

 

                                                                         초기현토군                               임둔군

                                                                         (옥저성)                                  (동이현)

                       
                                                               단                                  
                                                                                                     
                                낙랑군                       단                            
   현토군                    (왕검성)                                              
(구려 서북쪽)                                               대                               진번군
                   요동군                                                                      (잡현)                                        
                                                               령
                                                                                                                       

 

   그러다가 기원전 82년에 이르러 임둔군은 예(동예)가 되고, 진번군은 맥국이 되어 두 군이 폐지되기에 이르자, 한나라에서는 현토군의 관할지를 낙랑군에 이관하고 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기게 되는데,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부근으로서, 대개의 역사서에는 이곳을 현토군으로 표기하고 있다.
  요동군의 치소로 비정되는 지금의 북경 부근으로부터 서북쪽으로 몇 백리 떨어진 곳이고, 고구려의 건국지 졸본으로 비정되는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 후성진의 서쪽에 해당되는 곳이다. 
  한편 현토군으로부터 관할지를 이관받은 낙랑군에서는 그 땅 즉 단단대령 동쪽 7개 현을 따로 나누어 낙랑동부도위를 설치하게 된다.
  

 

☆ 요동군이 지금의 요동반도 부근으로 인식하는 사람이 많지만 지금의 요동은 옛 요동이 아니고, 요하는 옛 요수가 아니다. 지금의 요동반도 부근은 옛 왜국이었다. 또한 고구려의 건국지 졸본(홀본)은 오녀산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 후성진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새로 옮긴 현토군으로 비정되는 하북성 장가구부근으로부터 북쪽(필자주 : 동북쪽이다)으로 1천리 거리에 동부여가 위치했었다는 말이 되는데, 지금의 내몽골 정람기 부근에 해당한다.  
  그곳은 평원초원지역으로서 농사와 유목을 병행하는 곳인데, 후한서 부여전을 보면, "(부여는) 동이지역 중에서 가장 평탄하고 넓은데, 토질은 오곡이 잘된다. 명마와 적옥과 담비와 삵쾡이 가죽, 대추만큼 큰 구슬이 생산된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지금 현황과 일치한다. 
  우리가 백두산 북쪽에 위치했다고 생각했던 동부여가 엉뚱하게도 내몽골 정람기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북부여 해모수의 고손자로서 동부여에서 태어나 자란 주몽은 동부여에서 모종의 사건에 연루되어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되자 그곳에서 도망쳐 동명왕이 세웠던 남쪽의 졸본부여로 가서 아들 없이 딸만 셋 있던 졸본부여왕의 둘째 공주와 혼인하였고, 왕이 죽자 그 왕위를 물려받아 졸본부여의 왕위에 올랐다가 국호를 고구려로 바꿈으로써 졸본부여는 자연스럽게 소멸하게 되었고, 고구려가 새로이 건국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주몽의 손자인 3대 대무신왕 때인 서기 22년에 이르러 고구려가 동부여를 쳐서 대소왕을 죽였다고 하고, 삼국유사에는 이때 동부여가 멸망했다고도 기록되어 있으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21대 문자왕 3년(A.D.494) 조를 보면 "봄 2월 부여왕(동부여왕)이 처자를 데리고 와서 나라를 바치고 항복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동부여는 시조인 해부루왕, 2대 금와왕, 3대 대소왕으로 왕위가 이어졌으나 고구려 대무신왕의 침공을 받아 대소왕이 죽고 패전하게 되어 나라가 멸망할 위기에 처하기는 하였으나 이때 완전히 멸망했던 것이 아니라 왕조가 계속되다가 문자왕 때에 이르러서야 고구려에 투항함으로써 역사에서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 기록상 북부여는 기원전 239년에 건국되어 7년 후인 232년에 해모수가 천제의 자리에 올랐으나 기원전 86년에 이르러 졸본부여에게 멸망당했고, 동부여는 북부여 4대왕이었던 해우루왕의 동생인 해부루가 기원전 86년에 예(창해군)의 땅이었던 가섭원에 건국하여 서기 494년까지 580년 간 왕조가 이어지다가 고구려에 투항함으로써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졸본부여는 기원전 108년에 동명왕이 건국하였으나 북부여 해모수의 고손자인 주몽이 기원전 37년에 국호를 졸본부여에서 고구려로 바꿈으로써 나라가 없어졌다. 
 
  그렇다면 북부여와 졸본부여는 또 어디에 위치했던 것일까?

   동부여가 지금의 정람기 부근이라면 북부여나 졸본부여 역시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했을 것인데, 고구려의 건국지가 바로 졸본(홀본이라고도 한다)이었고, 고구려의 평양성은 패수 가까이에 위치했다고 했다.
  우리는 지금 고구려의 건국지 졸본을 압록강 북쪽 환인이라고 하며 그 부근의 오녀산성이 바로 졸본성이었을 것이라고 하고 있고, 집안을 국내성이라 하며, 북한 평양을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이었다고 하고 있으나, 사실 옛 왕검성이며, 낙랑군의 치소이었으며, 고구려의 평양성은 북한 평양이 아니라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필자주 : 열하행궁)이고, 국내성은 북경시 연경현의 영녕진이고, 패수는 지금의 난하를 말하는 것이다.
  고구려가 적성 후성진 부근(졸본)으로부터 점점 동쪽의 난하 가까이로 도읍을 옮긴 것이 된다.

  그리고 북부여의 위치에 대해서는 위서 권100 열전 제88 두막루 조에, "두막루국은 물길국 북쪽 천리에 있는데, 낙양에서 6천리 떨어져 있다. 옛 북부여인데 실위의 동쪽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지금의 바이칼 동남쪽인데, 이는 후대 북부여가 졸본부여에게 멸망 당한 후 위치를 이동한 후의 위치로 보이고, 원래의 북부여는 졸본부여의 바로 북쪽인 지금의 하북성 장구시 적성현 일원에 위치했었을 것이다. 지금의 적성이 옛 부여(북부여)의 도읍으로 비정되는 곳이다. 

  기록을 보면, 북부여는 졸본부여의 침공을 받고 왕이 죽고 멸망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그러자 북부여 왕의 동생이었던 해부루가 유민들을 이끌고 가섭원이라는 곳으로 옮겨가서 다시 나라를 세우고 동부여라 했다고 전하기 때문에 뿌리를 찾아 올라가면 지금의 몽골, 내몽골과 우리는 모두 환인, 환웅, 단군의 후예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 역사에 나타나는 세 부여는 한반도의 압록강 북쪽에 위치했던 것이 아니라 지금의 북경 북쪽 하북성과 내몽골에 넓게 존재했던 나라였던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옛 기록을 잘못 해석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 한민족과 몽골, 내몽골 사람들이 비록 서로 멀리 떨어져 살고 있지만 생김새가 같고, 정신적, 문화적 기반이 동일하며, 상호 거부감이 없이 동족 의식이 남아 있는 것은 아주 먼 옛날 혈통이 같은 동족이기 때문일 것이다.
  몽골, 내몽골과 우리는 피를 나눈 형제국이다. 
  지금이라도 몽골, 내몽골과 우리나라가 국가 연합을 이루거나 그것이 어렵다면 어떠한 형태로든 몽골, 내몽골의 자원과 한국의 자본을 결합시킬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여 생산으로 이어진다면 모두에게 득이 될 것이고, 민족의 재통합을 자연스럽게 이룰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제 국운 상승을 위해 정부는 이들과 협력을 적극적으로 검토할 시점이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실용을 표방하는 현 정부에서 반드시 이루어내야 하는 과제이다.
  지금 우리는 하찮은 미국산 쇠고기 따위에 발목잡혀 있을 한가한 때가 아니다.

  더 큰 비젼을 가지고 국가의 천년 대계를 설계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