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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인돌과 미송리형 토기는 고조선 고유문명의 흔적 아니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09. 4. 10. 05:42

윤여동설 - 고인돌과 미송리형 토기는 고조선 고유문명의 흔적 아니다 - 최초주장

 

 

 

 

 

 

 

 

                                          

  지금 학자들은 비파형동검과 미송리형토기 그리고 고인돌을 고조선의 대표적인 3대 표지유물이라 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유물이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곳은 모두 고조선의 강역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필자는 그 중 고인돌과 미송리형토기는 고조선을 대표하는 표지 유물이 될 수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비파형동검이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곳은 한반도가 아니라 지금의 요하서쪽 홍산문화권 지역이고, 고인돌이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곳은 한반도 남부지역이며, 미송리형토기는 압록강변인 평안북도 의주에서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학자들이 고인돌이나 미송리형 토기를 고조선의 표지유물로 규정하게된 것은 북한 평양이 고조선의 도읍 왕검성(왕험성이라고도 한다)이었을 것이라는 착각에서부터 비롯되었을 것이다.
  학자들의 주장대로 한반도의 북한 평양이 고조선의 천년도읍 왕검성이었다면 평양 부근에서 비파형동검도 가장 많이 출토되어야 하고, 고인돌도 평양 부근에 가장 많이 조성되어 있어야 하는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를 않은 것이다.
  비파형동검은 내몽골 적봉, 요녕성 조양, 부신 부근에서 집중적으로 발굴되고 있고, 고인돌은 한반도 남부지역에 밀집되어 조성되어 있다.
  적봉에서부터 한반도 남부까지는 수천리나 떨어져 있는 곳이므로 적봉에서부터 한반도 남부에 이르는 전 지역을 고조선의 중심 강역이라 할 수는 없는 노릇아닌가?


  그렇다면 실제 고조선은 지금의 어디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일까?
  지금 북경 동북쪽 하북성 북부와 내몽골 적봉시를 가르는 곳에 칠로도산(七老圖山)이라는 산맥이 있고, 적봉시와 요녕성 조양시를 가르는 곳에는 노로아호산(努魯兒虎山)이라는 산맥이 있는데, 그 부근이 고조선의 표지유물이라 하는 비파형동검이 가장 많이 출토되는 곳이다.
  비파형동검이 고조선의 표지유물임이 확실하다면 그 부근이 고조선의 중심강역이었다는 말이 되는데, 칠로도산의 의미는 "일곱노인이 그림처럼 노니는 산"이라는 의미이고, 노로아호산이라는 의미는 "어리석은 호랑이가 사람이 되어보려고 노력한 산"이라는 의미이다.
  일곱노인이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호랑이가 사람이 되어보려고 노력했다"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누구나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전해진 곰과 호랑이가 쑥과 마늘을 먹고 사람이 되어보려고 하였으나 곰은 여자가 되었고, 호랑이는 사람이 되지 못했으며, 사람이 된 웅녀가 환웅천왕과 혼인하여 단군왕검을 낳았다는 단군탄생설화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인데, 그러한 의미를 가진 산이 한반도 평양부근이 아닌 북경 동북쪽에 있는 것이다.

 

★ 환국은 7명의 환인이 대를 이어 나라를 다스렸다고 하는데, 바로 그곳에 일곱노인이 그림처럼 노니는 산이라는 의미의 칠로도산(七老圖山)이 있고, 노로아호산(努魯兒虎山)이 있으니 우연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그 부근이 환인국, 환웅국의 중심 강역이었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는데, 바로 그 부근에서 중국 문명보다 시기적으로 훨씬 앞서고 훨씬 발달되었으며, 중국 문명과는 전혀 이질적인 홍산문화가 발견된 것이다.
  그리하여 학자들은 그 문명이 동이문명일 것이라 추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기원전 194년에 위만은 고조선 준왕의 왕검성을 공격하여 그곳을 빼앗아 위만조선을 세워 그 손자인 우거왕까지 이어졌는데,  기원전 108년에 이르러 한 무제의 침공을 받아 나라가 멸망했고, 한 무제는 위만조선의 강역을 네 조각으로 나누어 네 개의 군을 설치했는데, 이것이 소위 말하는 한사군으로서 낙랑군 · 진번군 · 임둔군 · 현토군이었다. 
  그런데 그 한사군의 위치가 지금까지도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중국 사서들은 한결같이 낙랑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고,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우리의 신라가 위치하고 있었다고 하고, 신라의 서쪽에 백제가 위치했으며, 백제의 동쪽(필자주 : 서쪽의 오기이다)에 낙랑이 위치했었으며, 신라, 백제의 북쪽에 고구려가 위치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북한 평양에 위치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역사를 해석했던 한나라 때의 낙랑군이 한반도가 아닌 하북성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지금까지 아주 커다란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실제로 고조선, 위만조선이 북한 평양을 도읍으로 했던 것이 아니라면 그 후의 한사군, 삼한, 삼국시대 역시 한반도를 중심으로 역사를 해석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삼국을 이어 일어난 고려의 역사를 한반도를 중심으로 역사를 해석한다는 것 역시 잘못된 해석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성계의 조선은 한반도의 한양을 중심으로 500년간 존속했던 것은 확실하다.

  지금 서울에 조선의 정궁이었던 경복궁도 있고, 조선시대의 도성도 있으며, 조선 태조릉으로부터 마지막 왕인 순종릉까지 모두 서울 부근에 조성되어 있으니 이것까지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고, 무엇보다도 우리 각자의 조선시대 선조들의 묘도 한반도에 조성되어 있는 것이다.


  고려까지는 대륙이 중심이었던 것으로 나타나나, 이성계의 이씨조선은 한반도가 중심이 된 것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대륙의 고려를 멸망시키고 이씨조선을 건국한 후 개경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우리는 이것을 지금까지 한반도 황해도 개성에서 서울로 도읍을 옮겼던 것이라고 역사를 해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대륙의 개경에서 발해와 황해를 건너 한반도의 한양(현 서울)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말로 해석이 가능해 지는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는 이성계가 도읍을 지금의 서울로 옮김으로 해서 그 때부터 우리 역사의 중심지가 되었던 것이지 옛 고조선, 삼한, 삼국, 고려 때까지도 역사의 중심지는 아니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고인돌이 고조선의 대표적인 고유유물일 수 없는 것이고, 미송리형 토기 역시 고조선의 대표적인 표지유물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고인돌은 고조선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한반도 고유 문명의 흔적인 것이고, 미송리형토기 역시 마찬가지인 것이다.
  고인돌이나 미송리형토기는 고조선 고유 문명의 흔적이 아닌 것이다.

 
☆ 고조선, 위만조선의 도읍 왕검성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으로서 후일 낙랑군의 치소가 되었다가 고구려의 평양성이 되고, 신라는 요녕성 금주시(錦州市)부근, 가야는 호로도 흥성부근, 백제는 난하중하류 일원, 예(동예) 는 내몽골 고륜기 부근, 옥저는 내몽골 적봉, 옹우특기 부근에 위치했었고, 요동성은 북경 부근을 말하는 것이고, 대방군은 북경 동쪽 준화 부근에 위치했으며, 지금의 난하 중 반가구수고 북쪽은 패수였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고려로부터 그 이전의 고대역사를 해석하려 하는 것은 덜 깨우친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고, 필자의 주장에 따라 옛 사서의 기록들을 다시 해석해 본다면 우리 역사를 정확히 밝힐 수 있게 되고, 나아가 옛 사서들의 기록 자체에 대한 오류까지도 밝혀낼 수 있다.
  우리의 선조들은 한반도만이 아닌 드넓은 대륙에서 중국 세력들과 끊임없이 다투며 살았다.
  지금의 북경 서쪽 태행산맥 부근까지가 우리의 옛 땅이었고, 고대의 왜국은 지금의 요동반도에 위치하고 있었다.
  발해는 바로 우리 선조들의 바다였다. 

  낙랑해였고, 동해였고, 한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