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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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전한낙랑군 - 낙랑국 - 후한낙랑군의 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 2009. 4. 3. 05:53

윤여동설 - 낙랑의 위치를 찾아라 - 최초공개

 

 

 

윤여동설 - 전한낙랑군 - 낙랑국 - 후한낙랑군의 위치

 

  싫든 좋든 우리 고대 역사와 “낙랑(樂浪)”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왜냐하면 옛날 고조선 · 위만조선의 도읍이 왕검성(왕험성이라고도 한다)이었고, 한사군 때 전한낙랑군의 치소가 왕검성이었으며, 또 고구려의 평양성과 고려의 서경 역시 같은 장소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왕검성 즉 낙랑군의 치소를 정확히 찾는다면 우리 고대 역사를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낙랑(樂浪)" 이란 말이 원래 어디에서 유래하였는지 확실히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즐거울락(樂)”과 “물결랑(浪)” 자로 이루어진 것을 보면 경치가 좋은 내륙의 큰 강 또는 호수주변이나 큰 바다를 끼고 있는 경치 좋은 지역을 옛부터 그렇게 불렀고,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나누어 한사군을 설치하면서 낙랑이라 불리우던 그 주변지역을 역시 낙랑군이라 명명했던 것이 아닌가 추정해 볼 수 있을 뿐이다.

 

☆ 어느 사람은 낙랑이 보통명사로서 이 낙랑에서 나라라는 말이 생겨났을 것이라고 하기도 하나 믿을 만한 주장은 아닌 듯하다.

  

  그런데 지금에 이르러 이 "낙랑(樂浪)"이 현재의 어느 지역을 말하는지 잃어버렸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우리의 고대 역사를 정확히 밝히지 못하고 온갖 “설(說)” 만 난무하게 되고 말았다.
  이는 낙랑이 전한의 무제가 설치한 낙랑군과 최리의 낙랑국 그리고 후한 광무제가 설치한 낙랑군 등을 모두 "낙랑(樂浪)"으로 기록하고 있어 혼란을 가중시키게 되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리하여 지금 북한에서는 낙랑군은 갈석산이 있고, 만리장성이 시작된 중국 하북성 진황도 부근에 위치했다고 하고, 낙랑국은 북한 평양 부근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고조선의 왕검성이 지금의 북한 평양이라고 하고 있는데, 요즈음에 이르러서는 남한에서도 이러한 북한의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난 듯 싶다.
  그러나 이는 멋도 모르면서 덩달아 춤을 추고 있는 격이다.  
  왜냐하면 북한이 이러한 주장을 하는 것은 대외적으로는 북한이 고조선, 고구려, 고려의 맥을 이었고 우리 역사의 정통성이 북한에 있다고 선전하기 위한 것일 뿐 역사적 사실은 아니기 때문이다.
  북한은 지금 역사를 교묘히 정치에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러한 역사를 백성들에게 물증으로 확인시켜주기 위하여 북한 평양에서 고조선 단군의 유골을 발굴했다고 선전하며 단군릉이라는 것도 거창하게 만들어 놓았고, 고구려 동명왕릉(주몽릉)이라는 것도 수리하여 놓았으며, 개성에서 출토되었다는 이상한 동상을 고려 태조 왕건의 상이라고 선전하며 남한으로 보내 전시까지 했던 것이다.

 

☆ 고구려의 건국시조 주몽을 동명왕이라고 하는 것은 착각으로서 동명왕은 졸본부여의 건국시조로서 백제건국시조 온조왕의 증조할아버지쯤 되는 사람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전한낙랑군이 최리의 낙랑국이 되었다가 고구려의 대무신왕에게 멸망함으로써 고구려 땅이 되어 있던 옛 낙랑국의 일부 땅인 살수이남 땅을 후한의 광무제가 고구려로부터  탈환하여 다시 낙랑군(후한낙랑군)을 설치했던 것으로 나타나므로  낙랑은 동일한 지역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북한의 주장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다.
  사서의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전한의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낙랑군을 설치한 해는 기원전 108년이었고, 기원전 82년에 이르자 임둔군과 진번군을 없애고, 기원전 75년에는 현토군을 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기고는 현토군의 관할지역이었던 동옥저와 진번군의 일부를 낙랑에 붙여 낙랑동부도위를 설치하게 된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전한, 왕망의 신나라, 후한으로 이어지는 혼란기를 틈타 최리라는 사람이 전한낙랑군 땅과 낙랑동부도위 땅을 차지하고는 스스로 왕위에 올라 국호를 "낙랑국(樂浪國)"이라 칭하게 된다.
  그러자 서기 30년에 이르러 고구려의 대무신왕이 낙랑동부도위를 먼저 쳐서 빼앗았고, 서기 37년에는 최리의 낙랑국 마저 쳐서 빼앗게 되어 최리의 낙랑국은 멸망하고 말았는데,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이루지 못한 사랑이야기는 바로 이때 일어난 일이다. 
  그런데 서기 44년에 이르러 국내의 혼란을 수습한 후한의 광무제가 고구려가 빼앗아 차지하고 있던 옛 낙랑을 쳤으나 전부를 탈환하지 못하고 그 일부인 살수이남 땅 만을 다시 되찾아 그곳에 다시 낙랑군(필자는 이를 후한낙랑군이라 부른다)을 설치했다가, 서진 말기인 서기 313년에 이르러 고구려 미천왕이 그 후한낙랑군 땅을 다시 빼앗게 되어 우리 역사 강역에서 낙랑이 사라지고, 서진에서는 서진낙랑군을 갈석산 부근에 새로이 설치하게 된다.
  [이는 313년 이후에도 상당기간 중국 사서에 낙랑이 나타나기 때문에 그를 알 수 있다.]  
  따라서 전한낙랑군과 최리의 낙랑국의 치소는 고조선, 위만조선의 도읍이었던 왕검성이었고, 후한낙랑군은 살수 이남에 위치했었으므로 그 치소는 왕검성의 서남쪽에 위치하게 된다.
  대개 지금 많은 사람들은 살수(薩水)를 지금의 청천강이라고 알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으로서 살수는 북경 동북쪽 조하(潮河)를 말하는 것이다.
  조하는 지금의 북경 북쪽 하북성 풍녕만족자치현 부근에서 발원하여 동남쪽 고북구(古北口)를 통과하여 밀운수고로 흘러드는 강이다. 
  
낙랑은 한반도가 아닌 중국 하북성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인데, 필자는 전한낙랑군과 최리의 낙랑국의 치소를 지금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으로 비정하고 있고, 낙랑동부도위는 칠로도산의 동쪽에, 후한낙랑군의 치소는 승덕시의 서남쪽인 흥륭 부근으로 비정하고 있다.   
  이는 결국 우리 고조선의 왕검성이 지금 북한의 평양이 아니라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이라는 말이 되므로 위만조선의 도읍 왕검성, 고구려의 평양성, 고려의 서경도 그곳이라는 말이 되는 것이므로 결국 한반도에 낙랑은 존재한 적이 없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북한은 평양이 옛 왕검성이고, 평양성이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사실 북한 평양은 고조선의 왕검성이 아니므로 단군릉이 있을 수 없고, 낙랑도 아니었으므로 평양에서 출토되는 낙랑의 흔적들은 조작되었거나 옛 사람들의 이동에 의해 옮겨진 유물들이 묻혔다가 출토되는 것일 뿐이라 할 수 있다.


 

☆ 춘천에 낙랑이 위치하고 있었고, 황해도에 대방이 위치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이는 단순하게 백제의 동쪽에 낙랑이 있고, 낙랑과 대방은 가까이 접경하고 있었다는 기록과 한반도 서울 부근에서 백제가 건국되었을 것이라고 착각하고 비정한 것일 뿐 어떠한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비정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북한 평양 부근이 낙랑이었다고 믿는다.(요즈음에 이르러서는 낙랑이 지금의 압록강 북쪽 요동
  에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왜 그럴까?
  이는 우리가 지금 한반도에 살고 있고, 조선시대 쓰여진 사서들에 평양을 낙랑이라고 기록해 놓았기 때문일 것인데, 필자의 주장대로 우리 삼국의 중심 강역이 한반도가 아닌 하북성 난하 부근이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지금 한반도에 살고 있는 것일까?
  필자가 보기에 우리는 지금까지 바로 이 비밀을 풀지 못해 역사를 헷갈리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성계는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한 후 개경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우리는 지금까지 한반도 황해도의 개성에서 서울인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것이라고 역사를 이해 했었는데,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고려가 멸망하고 이성계의 조선이 건국된 후 대륙의 개경에서 한반도의 한양으로 도읍을 옮겼던 것이다.
  그리고 조선에서는 우리의 고대 지명과 고대 역사 모두를 한반도를 중심으로 바꾸어 썼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 정통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조선 500년간 그렇게 가르쳤으므로 지금 그 맥을 이은 대한민국 사람들도 한반도를 우리 역사의 중심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일제강점기에 우리 역사가 모두 왜곡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 우리 역사는 이미 조선왕조 때 거의 완벽하게 왜곡되어 있었다. 
  대표적인 기록이 신증동국여지승람이요, 그 역사왜곡을 위해 세조, 예종, 성종 3대에 걸쳐 고서적 수거령을 내려 고서적을 숨기는 사람은 사형에 처한다고 겁주어 가며, 악착같이 옛 대륙역사가 기록된 책들을 거두어들여 백성들이 대륙의 역사를 알지 못하게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고대 역사는 조선 시대에 이미 왜곡되어 버렸고, 사람들의 인식도 한반도에서 맴도는데, 지금에 이르러 대륙의 역사를 다시 찾고, 잃어버린 대륙의 땅을 다시 찾으려니 무척이나 힘이 드는 것이다.
  무엇보다 힘드는 것은 사람들의 역사인식이 잘 바꾸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원래의 땅 주인이 제 땅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있는데, 지금 그 땅을 차지하고 있는 중국이 자기들이 차지하고 있는 땅이 옛날 당신네 조상으로부터 빼앗아 차지했던 땅이라고 이실직고하면서 찾아와 자발적으로 돌려줄 리는 없지 않은가?
  그 땅을 찾으려면, 우리 스스로가 대륙의 잃어버린 우리 옛 땅의 위치를 알아야 하는데, 그곳이 어디라고 알려줘도 아직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긴가 민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긴가 민가 한다는 것 자체도 많이 발전한 것이기는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