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고구려 대무신왕에게는 호동이라는 아주 잘 생긴 왕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와의 이루지 못한 사랑 이야기가 전설이 되어 전해지고 있어 우리는 그들의 이루지 못한 사랑을 지금까지 매우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어쩌면 그들의 사랑은 애초부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는지도 모른다.
앞서 전한 왕실의 외척이었던 왕망은 서기 9년 1월 10일에 이르러 쇠약해진 전한(前漢)을 없애버리고 새로운 나라인 신(新)나라를 건국하고 황제에 오르는데, 이 혼란기를 틈타 낙랑군태수(조선사람이 그 땅을 되찾아 나라를 세우고 왕위에 올랐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였던 최리는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했던 한사군의 한 군이었던 전한낙랑군 땅과 낙랑동부도위 땅을 차지하고 국호를 낙랑국(樂浪國)이라 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리하여 낙랑왕 최리는 신나라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되어 스스로 국토방위를 해야할 상황이 된다.
이때 낙랑국의 주변으로는 북쪽에는 고구려와 동부여가 위치하고 있었고, 남쪽에는 백제, 동남쪽에는 신라가 있었다.
그런데 고구려 대무신왕이 서기 22년에 동부여를 쳐서 대소왕을 죽이게 되어 동부여가 쇠약해지고, 서기 25년에는 광무제가 신(新)나라를 없애버리고 다시 한(漢)나라를 복원하게 되어 후한이 서게되고, 서기 30년에 이르자 고구려 대무신왕이 낙랑동부도위를 쳐서 빼앗아가 버리게 되어 낙랑국의 강역은 반으로 줄어들게 된다.
낙랑왕 최리의 입장으로서는 후한의 우산 속으로 들어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고구려와의 관계를 개선하지 못하면 나라를 유지하지 못할 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어 갔고, 민심은 동요했다.
그리하여 최리는 나라 안을 순행하며 백성들의 민심을 다독거리기 위하여 남옥저(동옥저와 같은 곳이다)를 순행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귀티가 나는 미남자 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낙랑왕 최리는 고구려 대무신왕의 아들 호동왕자가 대단한 미남이라는 말을 소문으로 듣고 있었으므로 호동을 불러 "그대의 용모를 보니 보통 사람은 아닌 듯 한데, 혹시 북국 신왕(대무신왕)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물어보았다.
호동이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최리는 고구려와의 화친을 맺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는 호동왕자를 데리고 왕궁으로 급히 돌아가서는 그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어주었고, 왕궁의 이곳 저것을 구경 시켜 주고 나라의 비밀병기인 자명고와 나팔도 구경시켜 주었다.
낙랑국의 자명고와 나팔은 외적의 침입이 있으면 스스로 소리를 내어 위급 사항을 알려주어 외침에 대비할 수 있게 해주는 신기한 물건이었다.
☆ 자명고라는 연속극에서는 이 자명고가 엉뚱하게도 낙랑왕 최리의 딸로서 고구려 호동왕자를 놓고 자매간에 사랑을 다투는 삼각관계로 그려진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 호동왕자의 나이 14세였으므로 그의 딸을 소개시켜 주고는 호동왕자와 잠자리를 함께 하도록 조치한다.
그렇게 호동왕자와 낙랑공주는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고, 낙랑왕 최리로서는 고구려의 왕자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 고구려와 사돈지간이 되면 나라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호동왕자는 낙랑국 왕궁에서 며칠을 머무르다 고구려로 혼자 돌아가게 되는데, 이때 낙랑공주는 호동왕자에게 온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호동왕자의 아버지인 대무신왕은 서기 18년 10월 아버지인 유리왕이 죽자 15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고, 곧 연나부 모본호족의 딸을 맞아들여 첫 왕비로 삼았다.
그리고 서기 22년 4월에 이르러 죽은 동부여 대소왕의 동생이 갈사수가로 와서 갈사국을 세우자 그 갈사국왕의 손녀를 둘째 왕비로 맞아들여 23년경 호동왕자를 낳았을 것인데, 삼국사기에는 "호동은 왕의 둘째 왕비인 갈사왕의 손녀의 소생이었다. 그의 모습이 아름답고 곱게 생겨 왕이 몹시 귀여워했기 때문에 호동이라고 불렀다"라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미남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 대무신왕의 첫 왕비는 아들을 낳지 못한 상태였다가 호동이 태어난지 10년이 지난 서기 32년 봄쯤에야 아들 해우(후일의 모본왕)를 낳았던 듯 하다.
그리하여 이 첫 왕비는 만약 호동이 낙랑공주와 혼인을 함으로써 낙랑국과 화친을 하는데, 큰공을 세우게 된다면 그 공이 모두 호동에게 돌아가게 되어 호동이 태자로 봉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급기야는 호동을 모함하기에 이른다.
호동이 낙랑국에 갔다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인 서기 36년 10월 첫 왕비는 남편인 대무신왕에게 "호동이 나에게 무례하게 대하고 나를 겁탈하려 했습니다"라고 참소하게 되어 호동이 모함을 받아 죽게될 지경에 이르자 이때 어느 사람이 호동에게 말하기를, "왜 자신의 결백을 밝히지 않는 것이요?" 하자 호동은 "내가 만일 결백을 밝힌다면 그것은 첫 왕비의 허물을 드러내는 것이고, 왕에게 근심을 끼치게 될 것이니 어찌 효성이라 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서기 36년 11월에 호동왕자는 결국 스스로 칼을 입에 물고 엎어져 죽고 만다.
☆ 삼국사기에는 이때 호동왕자가 죽지 않아도 될 일에 죽은 것에 대하여 논하기를, "지금 왕이 참소하는 말을 믿어 죄 없는 사랑하는 아들을 죽였으니 그의 어질지 못함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호동에게도 죄가 없을 수 없으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꾸지람을 들을 때는 응당 순임금이 고수에게 하듯이 조금 때리면 맞고, 크게 때리면 도망쳐 그 아버지로 하여금 옳지 못한 곳으로 빠져 들어가지 못하게 하여야 하는 것이다. 호동은 이렇게 할 줄을 모르고 죽지 않아도 될 일에 죽었으니 이것은 사소한 체면 때문에 큰일을 그르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호동의 행동은 신생공자의 행동에나 비할 수 있을까?"라고 잘못된 일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호동이 죽자 대무신왕은 서기 37년에 이르러 최리의 낙랑국을 침공하여 멸망시키게 되는데, 이때 대무신왕은 호동왕자의 죽음을 비밀에 붙이고, 낙랑공주에게 호동왕자 명의로 글을 보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편지에는 "네가 너의 나라 무기고에 들어가 북과 나팔을 부숴 버릴 수 있다면 내가 예를 갖추어 너를 아내로 맞아들일 것이요, 만약 그렇지 못하면 너를 맞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편지를 받은 낙랑공주는 그 편지가 호동왕자가 보낸 것으로 믿고 칼을 들고 자기나라 무기고에 들어가 북을 찢고, 나팔을 부숴 버리고는 고구려에 기별을 해 주게 된다.
그 소식이 전해지자 대무신왕은 군사를 보내 낙랑국으로 진군하게 되는데, 낙랑국에서는 북과 나팔이 울리지 않았으므로 준비를 하지 않고 있다가 고구려군이 왕성을 포위한 후에야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게 되고, 범인을 색출하게 되는데, 잡고 보니 바로 자신의 딸 낙랑공주였던 것이다.
낙랑국왕 최리는 불같이 화가 나서 낙랑공주를 죽여버리고는 나와 항복하게 되고, 낙랑국은 멸망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사랑은 주변의 방해로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지만 그 이야기는 전설이 되어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첫 왕비 역시 호동왕자를 모함하여 죽게 만들고 자신이 낳은 아들 해우를 태자로 봉했다가 민중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려 목적을 달성하긴 하였으나 결국 이 모본왕 해우는 정신이 이상해져 폭군이 되어 시종에게 시해 당하게 되고, 그 고구려의 왕통이 엉뚱하게도 유리왕의 양자였던 재사의 아들 궁으로 이어지게 되었으니, 그 어머니가 죄 없는 사람을 모함하여 죽인 죄 값을 그 아들 모본왕이 대신 받았던 것은 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