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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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대방군은 한반도 황해도에 없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09. 3. 4. 08:36

윤여동설 - 대방군은 북경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 최초주장

 

 

삼국유사 대방군 조의 새로운 해석

 

  북대방(北帶方)  북대방(北帶方)은 본래 죽담성(竹覃城)이다. 
  신라 노례왕(弩禮王) 4년에 대방(帶方) 사람들이 낙랑(樂浪) 사람들과 함께 신라에 투항해 왔다.
  (이것은 모두 전한 때에 설치한 두 군의 이름이다. 그 후에 참람하게도 나라라고 불러오다가 이때에 와서 항복한 것이다).

 

  우리 역사를 찾는데 낙랑군의 위치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듯 이 대방군의 위치 역시 우리 역사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대방군은 후한 건안(A.D.196-220) 중에 공손강이 둔유현 남쪽 황무지를 나누어 설치했다고 전해오는데, 전한낙랑군 25개현 중 대방현이 있으니 대방이라는 명칭은 매우 오래 되었을 것이다.    
 

  앞서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한사군이 설치되었다가 진번군과 임둔군이 폐지된 기원전 82년 이후 낙랑군, 요동군, 요서군, 현토군 등이 중국 동북쪽 국경 방어를 담당하다가 서기 37년에 이르러 고구려의 대무신왕이 전한, 신, 후한으로 이어지는 혼란기를 틈타 전한낙랑군 땅을 차지하고 스스로 칭왕을 하던 최리의 낙랑국을 쳐 멸망시키자 후한의 광무제가 서기 44년에 고구려를 공격하여 살수이남의 일부를 탈환하여 그곳에 다시 후한낙랑군을 설치하게 되었고, 후한 말기 다시 그 일부를 나누어 대방군을 설치하여 후한낙랑군, 대방군, 요동군, 현토군이 공손씨의 영향권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가, 삼국시대를 지나 서진 말기인 313년에 후한낙랑군이, 314년에 대방군이 고구려 미천왕의 수중에 들어가게 됨으로써 우리의 역사강역에서 두 군이 완전히 소멸하게 된다.  
  따라서 삼국유사에서 신라 노례왕(3대 유리왕) 4년(A.D.27)에 대방과 낙랑 사람들이 신라에 투항해 왔고, 두 군이 이때에 와서 항복한 것이라는 기록은 사실은 고구려 대무신왕이 최리의 낙랑국을 멸망시킨 해인 서기 37년 때의 기록으로서 이때 대무신왕이 일시적으로 대방까지도 침공하여 멸망시켰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으나 7년 후인 서기 44년에 이르러 후한 광무제에 의해 후한낙랑군이 부활되자 대방도 다시 후한낙랑군에 속하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노례왕(유리왕) 4년이라는 기록은 사실은 14년의 오기일 것이고, 이때 대방의 위치는 지금의 중국 북경 동쪽 지역인 준화 부근으로서 그 서북쪽의 흥륭부근에 위치한 후한낙랑군과 접경하고 있었을 것이다.

 

  남대방(南帶方)  조위(曹魏) 때 비로소 남대방군(南帶方郡; 지금의 남원부)을 두었기 때문에 남대방이라 한 것이다. 
  대방의 남쪽은 바닷물이 천리(千里)나 되는데 한해(澣海)라고 했다.
  (후한 건안 연간에 마한남쪽의 황무지를 대방군으로 삼았다.  왜와 한(韓)이 드디어 여기에 속했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 삼국지에는 둔유현 남쪽 황무지에 대방군(북대방)을 설치했다고 하였는데, 삼국유사에는 마한 남쪽 황무지를 대방군(남대방)으로 삼았다고 주를 달아 놓았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대개 신증동국여지승람 전라도 남원도호부 조의 건치연혁에 “본래 백제의 고룡군이다. 후한 건안 중에 대방군(북대방)이 되었고, 조위 때에 남대방군이 되었다”라는 기록을 보고는 한반도의 전북 남원 부근까지도 대방군에 속했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후한)환제와 영제 말기에 한(韓)과 예(濊)가 강성하여 군현에서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여 군현의 많은 백성들이 한국(韓國)으로 흘러 들어가자 건안(A.D.196~220)중에 공손강(公孫康)이 둔유현 남쪽의 황무지를 나누어 대방군(帶方郡:북대방))으로 만들고, 공손모, 장창 등을 보내 유민을 불러모으고, 군대를 일으켜 한(韓)과 예(濊)를 정벌하자 옛 백성들이 점점 돌아왔고 그 후 왜(倭)와 한(韓)이 드디어 대방에 속하게 되었다”라는 삼국지 기록 속의 대방군이 한반도의 전북 남원부근을 말한다면 요동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떨치다가 238년에 사마의에게 토벌 당하고 사라진 공손씨가 한반도의 남원지역까지 한 때 차지했었다는 말이 된다.

 

☆ 역사를 이렇게 잘못 해석해 놓으면 중국의 동북공정에 날개를 달아주는 격이 되고, 후일에 이르러 중국이 한반도 남원까지 중국의 군현이었다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그런데 실제 공손씨 3대가 근거로 삼고 활동했던 지역이 요동군을 중심으로 한 그 부근지역이었으므로, 그 요동을 지금 압록강 북쪽의 요동이라 생각하고는 조선 후기에 정약용은 아방강역고에서 대방을 풍덕, 개성 부근으로 비정했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황해도 지역이 대방이었을 것으로 인식하고 역사를 해석하려 한다.

 

☆ 사실 지금의 요동은 옛 요동이 아니다. 옛 요동은 지금의 북경 부근을 말하는 것으로써 공손씨 3대는 지금의 북경 부근의 요동군을 주요 근거지로 삼고, 장가구 부근의 현토군, 북경 동쪽의 대방군, 흥륭 부근의 후한낙랑군을 차지하고 요동왕, 연왕, 대방왕 등을 자칭하고 한때 세력을 떨치다가 경초 2년인 서기 238년에 사마의의 토벌로 사라졌다.

 

  그리고는 대방의 남쪽에 한이 위치했다는 기록들을 한반도에 비정하여 경기, 서울, 충청, 전라도가 마한이었다고 하고, 경상북도가 진한이었다고 하며, 경상남도가 변한, 강원도가 예였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강역이 방 4천리에 이르렀다는 한(韓)이 사방 1천리 정도 밖에 되지 않는 한반도의 남부에 위치했다고 한다면 이는 소가 웃을 일이다.
   한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난하 하류를 중심으로 방 4천여 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원래의 대방군은 북경 동쪽인 준화 일원에 위치하고 있었다.
  대방군은 한반도 황해도에 설치되었던 것이 아니라 북경 동쪽부근을 말하는 것이고, 한(삼한)도 역시 한반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난하 하류를 중심으로 방 4천여리의 땅을 차지하고 있었고, 예는 지금의 만리장성 산해관 동북쪽인 내몽골 고륜기 일원을 말하는 것이고, 고대의 왜 역시 지금의 일본열도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발해 가운데 튀어나온 요동반도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북경 부근에 위치했던 공손강이 난하 하류일원의 한(마한), 고륜기 일원의 예를 침공할 수 있었던 것이고, 그 후 왜와 한이 한 때 대방군과 접촉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지금 우리는 옛 기록에 왜가 중국에 갈 때 반드시 대방군을 경유해서 가는 것을 가지고 지금의 일본열도에서 한반도 황해도에 위치했던 대방군을 경유해서 가는 것이라고 역사를 해석하고 있으나 이는 매우 잘못된 것이다.
  발해 가운데인 요동반도에 위치하고 있던 고대의 왜국에서 발해를 건너 지금의 북경 동쪽 대방군을 경유하여 당시 중국의 도읍이었던 낙양에 갔던 것이고, 대방 남쪽의 한해(澣海)라는 것은 한반도의 남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발해(渤海)를 말하는 것이다.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대방군이 한반도 황해도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말한게 아니라 지금의 북경 동쪽 준화부근에 대방군이 위치하고 있었다고 말했던 것인데, 우리가 지금까지 그 기록을 한반도에 관한 기록이라고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