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카테고리 없음

윤여동설 - 고구려 태조대왕의 동부여 유화태후릉 참배루트를 밝힌다 - 최초공개

윤여동 2011. 3. 1. 18:55

 

윤여동설 - 고구려 태조대왕의 동부여 유화태후릉 참배루트를 밝힌다 - 최초공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6대 태조대왕 69년(A.D.121) 조를 보면,

  “겨울 10월 왕이 부여(동부여)에 가서 태후의 사당에 제사지냈다(冬十月 王幸扶餘 祀太后廟)” 라고 기록되어 있고,

  “11월 왕이 부여로부터 돌아왔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태후란 고구려의 건국시조 주몽왕(추모왕)의 어머니인 유화를 말하는 것으로서 이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태조대왕이 직접 동부여까지 가서 유화태후의 능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앞서 주몽이 동부여에서 무슨 큰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잡히면 죽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자 졸본부여로 급히 도망치게 되는데, 이때 주몽은 어머니인 유화와 임신한 부인 예씨를 동부여에 그대로 남겨 놓고 올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어머니인 유화와 예씨 그리고 그해 태어난 아들 유리는 동부여에 인질로 잡힌 몸이 되어 고생스런 나날을 보내게 된다.

 

  한편 졸본부여로 도망쳐온 주몽은 졸본부여왕의 둘째 공주와 재혼을 하였고, 왕이 죽자 그 왕위를 물려받아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런데 기원전 24년 8월에 이르러 주몽왕(추모왕)의 어머니인 유화가 동부여에서 죽게 되었고, 동부여의 금와왕은 죽은 유화를 태후의 예로 장사지내주게 되고, 10월에는 주몽왕이 사신을 보내 자기의 어머니인 유화를 태후의 예로서 장사지내 준 것에 대하여 토산물을 보내 보답하게 된다.

 

☆ 이때 동부여의 금와왕이 죽은 유화의 시신을 주몽왕에게 보내주지 않고 동부여에 능을 조성했던 것은 죽은 유화의 시신마져도 인질로 잡고 있겠다는 뜻이었고, 주몽의 첫 부인 예씨와 아들인 유리는 여전히 인질로 잡혀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그로부터 5년 후인 기원전 19년 여름 4월에 이르러 주몽왕의 친아들 유리가 그 어머니 예씨와 함께 동부여를 탈출하여 졸본으로 오게 되자, 주몽왕은 유리를 태자로 봉하게 되고, 그해 9월 주몽왕이 죽자 유리가 그 왕위를 이어 고구려의 제2대왕이 된다.

  그런데 2대 유리왕, 3대 대무신왕, 4대 민중왕, 5대 모본왕을 지나 6대 태조대왕 69년인 서기 121년에 이르러서야 왕이 직접 동부여에 있는 유화태후의 능을 처음으로 찾아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유화가 죽은 지 실로 145년 만의 일이었다.

  이때는 고구려가 매우 강해졌기 때문에 태조대왕이 동부여에 직접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고구려의 태조대왕은 어느 길을 따라 동부여로 가서 유화태후의 능(사당)에 제사를 지내고 돌아왔던 것일까?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태조대왕은 10월에 동부여에 가서 11월에 돌아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날짜가 밝혀져 있지 않기 때문에 그 걸린 기간을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태조대왕 당시 고구려의 도읍 국내성에서 동부여의 도읍까지 왕복 약 1개월 정도 걸렸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후한서 부여전을 보면, “부여국은 현토의 북쪽 1천리에 있다. 남쪽은 고구려, 동쪽은 읍루, 서쪽은 선비와 접했고, 북쪽에는 약수가 있다. 땅이 2천리인데 본래는 예의 땅이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지 부여전에는 “부여는 장성의 북쪽에 있는데, 현토에서 1천리 떨어져 있다.............백성은 8만호이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나머지는 후한서와 거의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다. 후한서나 삼국지에서 말하는 부여란 동부여를 말하는 것으로서 동부여가 고구려의 북쪽, 현토군의 북쪽 1천여리, 읍루(숙신,말갈)의 서쪽, 선비의 동쪽, 약수의 남쪽에 위치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아직까지도 부여가 어디에 위치하고 있었는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고, 현토군, 선비, 읍루(말갈), 약수의 위치 역시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는데 다만 삼국지의 기록 속에서 동부여가 장성의 북쪽에 위치했다는 것 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중국 사람들이 말하는 장성이란 대개 지금의 만리장성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필자의 연구에 의하여 고구려의 초기강역이 지금의 북경 북서쪽 부근에 위치했었음이 밝혀졌고, 읍루 즉 말갈이 대흥안령 동쪽에 위치했었으며, 요동군과 현토군은 고구려와 접하고 있어 중국 세력들과 고구려가 쟁탈전을 펼치던 곳이었는데, 현토군은 지금의 장가구 부근으로 비정되고, 요동군은 북경 부근으로 비정된다.  

  그런데 후한서나 삼국지는 동부여가 장성의 북쪽에 위치했으며, 현토 북쪽 1천리에 위치한다고 하였으니 동부여는 지금의 정람기 부근에 위치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또 동부여의 북쪽에 약수가 있다고 하였으니 약수란 지금의 바이칼호수를 말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며, 태조대왕 당시 고구려의 도읍은 국내성이었는데 지금의 북경시 연경현 영녕진이었다.  

  따라서 태조대왕은 유화태후의 능에 참배하기 위해서 지금의 연경현 영녕진을 출발하여 북쪽으로 향하여 졸본(지금의 적성 후성진)을 지나 정람기 부근으로 향했고, 그 동쪽에 위치해 있었던 유화태후의 능에 도착하여 제사를 지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태조대왕은 왕복 약 2천여리 정도를 여행했던 것이 되니  하루 1백리정도씩 이동했다고 해도 왕복 20일이 걸렸다는 말이고, 중간에 머무르는 기간 등을 감안하면 최소한 1개월 정도는 족히 걸렸을 것이다.

  위 그림이 바로 필자가 주장하는 동부여의 강역과 태조대왕이 유화태후릉에 참배하러 갔던 대강의 루트를 표시한 것으로서 역사의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