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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가야는 한반도에 없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12. 2. 25. 09:17

윤여동설 - 가야는 한반도에 없었다 - 최초주장

 

 

  일반적으로 우리는 가야가 지금 한반도 가야산의 남쪽, 지리산의 동쪽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인식하고 있으나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기록되어 있는 가야의 위치에 대한 기록과는 그 지형이 다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가야의 서북쪽(필자주 : 사실은 서남쪽이다)에 지리산이 위치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한반도의 지리산은 서북쪽이 아닌 서쪽에 위치하고 있고,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가야산이 가야의 동북쪽에 위치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한반도의 가야산은 북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가야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으며, 때로는 수교하고, 때로는 전쟁을 했으며, 결국 후대에 이르러 가야를 병합한 것으로 나타나는 가야 북쪽에 위치했었다는 신라의 위치에 대하여, 신라 5대 왕이었던 파사이사금은 신라가 “서쪽으로는 백제와 이웃하고, 남쪽으로는 가야와 접하였다”고 말했고,

  북사 백제전을 보아도, “백제의 동쪽은 신라까지이고, 북쪽은 고구려와 접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신라의 서쪽방향에 백제가 위치했던 것은 확실한 것이다. 그렇다면 신라의 남쪽에 가야가 위치했다는 파사이사금의 말도 역사적 사실을 말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수서 신라전을 보면, “신라국은 고구려의 동남쪽에 있다.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사는데, 혹은 사라라고도 부른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북사 신라전에도, “신라는 그 선조가 본래 진한의 종족이다. 땅이 고구려의 동남쪽에 있는데, 한나라 때의 낙랑에 산다”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신라와 밀접했던 당나라의 역사서인 구당서와 신당서를 보아도 역시 신라가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 구당서 신라국전을 보면, “신라국은 본래 변한의 먼 후예이다. 그 나라는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과 남쪽은 모두 대해로 한정되어 있고, 서쪽은 백제, 북쪽은 고려(고구려)와 인접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신당서 신라전에는, “신라는 변한의 먼 후예이다.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사는데, 횡으로 1천리, 종으로 3천리이다. 동쪽은 장인국에 닿고, 동남쪽은 일본, 서쪽은 백제, 남쪽은 바다에 닿아 있으며, 북쪽에는 고구려가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의 일반적인 역사 상식대로라면 지금의 한반도 경주부근의 땅이 옛날 한나라 때의 낙랑땅이었다고 해야 기록과 한반도의 지형이 일치할 것인데, 한나라 때의 낙랑군은 옛 고조선의 도읍 왕검성 부근을 말하는 것이고, 낙랑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고, 장성이 시작된 곳이라는 중국 사서들의 기록도 존재한다.

  앞서 연나라에서 망명해온 위만이 고조선 준왕의 왕검성을 습격하여 빼앗고 왕위에 올라 왕검성에 도읍하고 아들로, 손자로 왕위를 이어가다가 위만의 손자 우거왕 때인 기원전 108년에 한 무제의 침공을 받아 멸망했고, 한 무제는 그 땅을 네 군으로 나누어 낙랑군, 진번군, 임둔군, 현토군을 설치했었다고 전한다.

  그리고는 그중 왕검성 부근을 낙랑군으로 만들었고, 그 치소를 왕검성(중국 사람들은 왕험성이라고도 했다)에 두었으며, 고조선의 도읍이었으며, 낙랑군의 치소였던 왕검성은 후일 고구려의 평양성이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고구려의 평양성이 지금의 북한 평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을 말하는 것이라는데 있고, 백제는 지금의 북경 동쪽 난하하류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신라는 지금의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일원에 위치한 나라였다는데 우리 역사 해석의 어려움이 있다.

 

  그렇다면 신라의 남쪽에 위치했었다는 가야는 어디에 위치하고 있어야 할까?

  필자가 보기에 가야는 지금의 하북성과 요녕성의 접경지역인 산해관 동쪽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해야 기록과 일치한다.

 

[위 : 금관가야왕성 추정지 지금의 흥성고성]

 

[금관가야 구지봉으로 추정되는 흥성 수산]

 

  그런데 우리는 지금 가야의 위치를 비정하면서 한반도 경주를 신라의 천년도읍 서라벌, 금성이라 하면서, 역사기록들과 지형을 전혀 감안하지 않은 채 한반도 경남의 김해, 합천, 고령, 함안 등을 가야의 강역이라 하고 있으며, 기록과 현실이 일치하지 않는 것쯤은 안중에 두지도 않고, 그곳에서 유물이 출토되면 무조건 가야유물이라 하고 있으며, 내몽골 유목민들이 주로 사용하던 오르도스형 동복이 출토되자 그 역시 가야유물이라 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한나라 때의 낙랑군, 낙랑동부도위가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내몽골 객라심기 일원을 말하는 것이라면, 고구려와 신라 그리고 백제는 모두 그 부근에 위치하고 있어야 하며 신라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가야 역시 그 부근에 있어야 하는 것이지 한반도 남쪽에서 건국되고 멸망한 나라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 한반도 김해에는 가야의 첫 임금이었다는 수로왕릉도 있고, 수로왕비 허황옥의 능도 있으니 이를 어찌 해석해야 할까?

  가짜인가?

  언젠가 대륙으로부터 이장을 한 것인가?

 

☆ 삼국유사 가락국기를 보면, “건안4년 기묘(A.D.199)에 처음 이 사당을 세운 때부터 지금 임금(고려 문종) 재위 31년인 대강 2년(A.D.1076)까지 도합 878년이 되었으나 층계를 쌓아올린 흙이 허물어지거나 무너지지 않았고, 심어 놓은 아름다운 나무들도 시들거나 죽지 않았으며, 더구나 거기에 벌여놓은 수많은 옥조각들도 부서진 것이 없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가야의 건국시조 수로왕의 능은 원래 제왕의 능으로서의 품격에 걸맞게 석물이나 제각 등이 잘 갖추어진 능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김해 수로왕릉 안내문을 보면, “조선 선조13년(A.D.1580) 영남관찰사 허엽이 왕릉을 크게 수축하여 상석, 석단, 능묘 등을 갖추었고, 인조25년(A.D.1647) 능비를 세웠으며, 고종15년(A.D.1878)에는 숭선전의 호를 내리고 능묘를 개축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라고 되어 있으니 조선 선조 13년 이전에는 능으로서의 모습을 전혀 갖추고 있지 못했었다는 말이 되어 삼국유사의 기록과는 다르니 매우 이상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