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고대의 우공갈석(禹貢碣石)은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낭아산(狼牙山) - 최초공개
우공갈석은 상산(항산) 구문현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고, 중국 역사상 9명의 황제들이 올랐다는 유명한 산이다.
진(秦) 시황이 올랐고,
진 2세 호해가 올랐다고 하며,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침공하기 전인 기원전 110년에 올랐고,
소설 삼국지에 등장하는 조조 즉 위 무제가 올라 “관창해(觀滄海)”라는 시를 읊었다 하고,
진(晉) 선제 사마의가 공손연을 토벌할 때 창려를 거쳐 갈석산에 올라 불로초를 구한 진시황을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북위 문성제,
북제 문선제가 올랐고,
수 양제가 고구려를 침공할 때 올랐다고 하고,
당 태종 역시 고구려를 침공할 때 올라 “춘일관해(春日觀海)”라는 시를 읊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 시황제(B.C.215), 진2세 호해(B.C.209), 한무제(B.C.110), 위무제(조조)(A.D.207), 진선제(사마의,A.D.238), 북위문성제(A.D.458), 북제문선제(천보4년 A.D.553), 수양제(A.D.612), 당태종(A.D.645)이 갈석산에 올랐다고 전해진다.
그렇지만 이 우공갈석은 언젠가부터 그 위치를 잃어버리게 되어 지금은 아무도 그 정확한 위치를 아는 사람이 없게 되고 말았다.
사기 하본기를 보면, “.........조이피복 협우갈석 입우해(鳥夷皮服 夾右碣石 入于海)”라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하나라 우왕 때 갈석의 동쪽에 위치했던 조이(鳥夷 : 그 외의 기록들에는 도이[島夷]라 표기하고 있어 어느 기록이 정확한지 알 수 없다)가 공물을 바치러 갈 때 배를 타고 갈석의 동쪽바다를 지나가면서 서쪽에 있는 갈석을 바라보며 갔다는 의미로서 이를 잘 새겨보면 우공갈석은 바닷가의 서쪽에 위치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주에는 “갈석은 해변에 있는 산(공안국설)”, “해(海)는 하(河)라고도 한다(서광설)”, “갈석산은 북평 려성현 서남쪽에 있다(지리지)”, “낙랑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는데, 장성이 시작된 곳이다(태강지리지)”, “갈석산은 요서 임유현(臨渝縣) 서남쪽 물 가운데 있다(수경)” 라고 하고는 “대개 갈석은 둘인데, 여기에서 말하는 협우갈석입우해라는 것은 당연히 북평의 갈석이다” 라고 결론을 짓고 있으나 지금 이 기록을 아무리 잘 새겨보아도 실제 갈석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하는 말인지 매우 헷갈린다.
따라서 옛 지도에서 갈석산을 찾을 수 밖에 없을 듯한데, 옛 지도들에는 한결같이 갈석의 위치를 상산의 동북쪽에 그려넣고 있다. 상산(常山)이란 중국의 북악인 항산(恒山)을 말하는 것으로서 고대의 북악 항산은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당현에 있는 대무산(신선산)을 말하는 것이다.
[보정군지]
이는 고대의 우공갈석이 지금 대무산의 동북쪽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인데, 진, 한 이래 중국 사람들은 지금의 대무산을 북악 항산으로 숭배하였으나, 명나라 때 이르러 지금의 산서성 혼원현에 있는 현악(玄岳)을 북악 항산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어 그때부터 항산의 위치가 바뀌게 되었고 따라서 갈석산의 위치도 헷갈리기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 항산(恒山)을 같은 의미인 상산(常山)으로 바꾸어 부른 것은 한 문제의 이름이 유항(劉恒)이었기 때문에 그 이후로 황제의 이름자를 피하기 위해 상산이라 바꾸어 부르게 된다. 그리고 항산은 중국 오악 중 북악이었다.
그런데 지금 중국에서는 관광 수입을 염두에 두고 “갈석산(碣石山)”에 대한 연고권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진황도 창려현은 당연히 지금 창려의 갈석산이 진짜라 하고,
산동성에서는 산동성 무체현 대산진에 있는 갈석산이 진짜 우공갈석이라고 주장한다고 하는데,
하북성 보정시도 갈석산 쟁탈전에 뛰어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필자가 보기에는 지금 보정시에 속해있는 낭아산(狼牙山)이 곧 원래의 우공갈석(禹貢碣石)이 틀림없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지금 하북성 역현 역수에서 바라본 낭아산(갈석산) 동북쪽 능선, 마치 뾰족뾰족한 여러 개의 비석이 세워져 있는 듯 보이기도 하는데, 지금은 이리의 이빨처럼 생겼다고 하여 낭아산이라 부른다. 시대에 따라 사람들이 바라보는 기준이 달라진 것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