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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익산 미륵사지는 선화공주가 지은 절이 아니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09. 3. 17. 00:28

윤여동설 - 익산 미륵사지는 선화공주가 지은 절이 아니다 - 최초주장

 

                                                            

  (백제) 제30대 무왕(武王)의 이름은 장이다. 
  그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 못 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못 속의 용과 관계하여 장을 낳았던 것이다. 
  어릴 때 이름은 서동(薯童)으로 재주와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항상 마를 캐다가 파는 것으로 생업을 삼았으므로 사람들이 서동이라고 불렀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공주 선화(善花 혹은 善化)가 매우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는 머리를 깎고 서울로 가서 마을 아이들에게 마를 먹이니 이내 아이들이 친해져 그를 따르게 되었다. 이에 동요를 지어 아이들로 하여금 부르게 하였다.
  善花公主主隱 他密只稼良置古 薯童房乙 夜矣卯乙抱遣去如
  (선화공주님은 남모르게 애인 만들어 놓고, 서동의 방을 밤에 몰래 간다네)
  동요가 서울에 가득 퍼져서 대궐 안에까지 전해지자 백관들이 임금에게 극력 간해서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보내게 하여 장차 떠나려 하자 왕후가 순금 한 말을 주어 노자로 쓰게 했다. 
  공주가 귀양지로 향하여 가고 있는데, 도중에 서동이 나와 공주에게 절하면서 모시고 가겠다고 했다.  공주는 그가 어디서 왔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저 믿고 좋아하니 서동은 그를 따라가면서 비밀리에 정을 통했다. 
  그런 뒤에야 서동의 이름을 알았고, 동요가 맞는 것도 알았다. 
  함께 백제로 와서 왕후가 준 금을 꺼내 놓고 살아 나갈 계획을 의논하자 서동이 크게 웃고 말했다. 
  "이게 무엇이오?"
  "이것은 황금이니 이것을 가지면 백 년의 부를 누릴 수 있습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마를 캐던 곳에 황금을 흙덩이처럼 쌓아 두었소." 
  공주는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 
  "그것은 천하의 가장 큰 보배이니 그대는 지금 그 금이 있는 곳을 아시면 우리 부모님이 계신 대궐로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좋소이다." 
  이에 금을 모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용화산 사자사의 지명법사에게 가서 이것을 실어 보낼 방법을 물으니 법사가 말하기를, 
  "내가 신통한 힘으로 보낼 터이니 금을 이리로 가져오시오."했다. 
  이리하여 공주가 부모에게 보내는 편지와 함께 금을 사자사 앞에 가져다 놓았다. 
  법사는 신통한 힘으로 하룻밤 동안에 그 금을 신라 궁중으로 보내자 진평왕은 그 신비스러운 변화를 이상히 여겨 더욱 서동을 존경해서 항상 편지를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서동은 이로부터 인심을 얻어서 드디어 왕위에 올랐다.
  어느 날 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가려고 용화산 아래 큰 못 가에 이르니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못 가운데서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절을 했다. 
  부인이 왕에게 "여기에 큰절을 지어 주십시오.  그것이 제 소원입니다." 하자  왕은 그것을 허락했다. 
  곧 지명법사에게 가서 못을 메울 일을 물으니 신비스러운 힘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헐어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여기에 미륵삼존의 모습을 만들고 회전(會殿)과 탑(塔)과 낭무(廊 )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彌勒寺; 國史에는 王興寺라고 했다)라 했다. 
  진평왕이 여러 장인들을 보내서 그 역사를 도왔는데 그 절은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 (三國史에는 法王의 아들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는 과부의 아들이라고 했으니 잘 알 수 없는 일이다).

 

위 기록은 삼국유사 기이 제2 무왕 조의 기록 전문인데, 우리는 이 기록 속의 미륵사를 지금 전북 익산 금마의 미륵사지라고 하며, 이 글이 바로 익산 미륵사지에 대한 창건설화라고 이해함으로써 이 미륵사를 창건한 사람이 바로 백제 무왕과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라고 이해했다.
  신라 26대 진평왕은 서기 579년 7월 17일에 진지왕이 죽자 그 뒤를 이어 13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라 재위 54년인 632년 1월에 66세의 나이로 죽었는데, 이때 백제는 27대 위덕왕 26년으로부터 28대 혜왕, 29대 법왕, 30대 무왕 33년까지의 기간에 해당한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면 앞서 554년 7월에 백제의 성왕이 신라군에 의해 시해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어 무왕 때까지도 신라와 백제는 철천지원수 사이가 되어 있을 때였다.
  그리하여 사람들 사이에서는 어떻게 백제 무왕이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와 혼인을 할 수 있었겠느냐, 어떻게 신라 진평왕이 적국인 백제에 기술자들을 보내 미륵사 짓는 것을 도와줄 수가 있었겠느냐, 삼국유사 이외에 진평왕에게 선화라고 하는 공주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다라는 이유로 삼국유사의 기록이 역사적 사실이 아닐 것으로 보는 회의적인 시각도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 익산 미륵사지 서탑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출토된 사리봉안기에 "我百濟王后佐平沙乇積德女(우리 백제왕후께서는 좌평 사탁적덕의 따님)"이라고 기록되어 있었고, 이 사탁왕비가 가람(미륵사)을 창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봉안기 명문 해석문 

  삼가 생각해보면,
  법왕(부처님)께서 세상에 나타나셔서 감응하시고, 현신 하시는 것은 물 속에 달이 비치는 것과 같습니다. 왕궁에서 태어나셨으나 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시면서 8곡의 사리를 남겨 3천 세계를 이익 되게 하셨으므로, 정신을 맑게 하고 오색으로 빛나는 사리를 돌면 그 신통변화는 불가사의할 것입니다.
  우리 백제왕후께서는 좌평 사탁적덕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동안 선을 베풀어 금생에 좋은 보은을 받아 만민을 기르는 동량이 되셨으므로 재물을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시고, 기해년(己亥年)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모시게 되었습니다.
  원하오니, 세세토록 공양할 수 있게 하여주시고, 겁겁이 다할 때까지 이 선한 마음 변치 않게 하여 주시고, 대왕폐하의 수명은 산악과 같이 견고하게 하여 주시고 치세는 천지와 함께 영구하며, 위로는 정법을 널리 펼치고 아래로는 창생을 교화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 원하오니, 왕후의 마음을 수경과 같이 하여 법계를 비추게 하여 주시고, 몸은 금강처럼 불멸하게 하시어 칠세의 먼 조상까지도 함께 복리를 입게 하시고, 모든 중생들도 함께 불도를 이루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기록은 삼국유사 미륵사 창건설화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삼국유사의 기록을 역사적 사실로 믿어왔던 역사 학자들은 이 의외의 결과에 매우 황당해 했고, 삼국유사의 기록을 신뢰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이제야 역사적 진실이 밝혀지게 되었다고 하기도 하며, 또 어떤 사람은 백제 무왕에게 꼭 한 명의 왕비만 있었으리라는 보장이 없으니 선화공주가 무왕의 여러 왕비 중의 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그러나 한반도의 미륵사지는 무왕과 선화공주가 지었다는 미륵사와는 아무 관련도 없는 절이다. 
  특히 일연이 삼국유사를 지을 때까지도 미륵사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잘 새겨 보아야 할 부분이고, 또 미륵사가 왕흥사와 동일한 절이라는 기록도 보이는데, 삼국사기에 의하면 왕흥사는 무왕 35년인 634년에 준공된 절로서 그 절의 위치가 강 언덕에 세워졌고, 채색으로 웅장하고 화려하게 장식했으며, 왕이 자주 배를 타고 절에 들어가 향을 피웠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무왕 40년 기해년에 절을 지었다는 기록은 없다.

 

☆ 많은 사람들은 왕흥사가 충남 부여 부소산 건너편에 있었던 절로서 위덕왕이 죽은 아들을 위해 탑을 세웠다는 사리기 명문이 출토된 옛 절터를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으나 무왕이 세운 왕흥사는 한반도에 세운 것이 아니다.     

     

  필자는 여기에서 우리의 역사학자들이 지금 매우 헷갈리고 있고, 전혀 엉뚱한 곳에 대한 삼국유사의 기록을 한반도의 익산 미륵사지에다가 결부시켜 해석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삼국사기 기록 속 백제의 건국지는 한반도가 아니라 지금의 중국 하북성 난하 부근이고, 무왕이 미륵사를 세운 곳도 그곳이며, 백제가 멸망한 사비성도 바로 그곳이기 때문이며, 신라와 백제 땅을 차지하고 나라를 세운 고려의 건국지 역시 한반도가 아니라 지금 중국 하북성에 있는 난하 부근이며, 김부식 등이 삼국사기를 지은 곳도 한반도가 아니라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관성현 부근이고, 일연이 삼국유사를 쓴 곳도 한반도가 아니라 하북성 진황도이기 때문이다.
  또한 신라의 진평왕이 살았던 곳도 한반도 경주가 아니라 요녕성 금주 부근이었다.
  이는 중국 사서들에 한결같이 낙랑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고, 장성이 시작된 곳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신라가 한나라 때의 낙랑(낙랑동부도위 부근으로 보인다) 땅에 있었다고 했으며, 신라의 서쪽에 백제가 위치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그를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한반도에 있는 익산 미륵사지는 어떻게 된 것일까?
  백제는 대륙의 백제에서 장자파와 차자파로 나뉘어 왕위찬탈전을 펼쳤다.
  4대 개루왕의 둘째 아들인 구태의 손자인 8대 고이왕이 개루왕의 장자인 초고왕의 증손자인 7대 사반왕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하는 것을 시작으로 11대 비류왕이 고이왕의 손자인 10대 분서왕으로부터 다시 왕위를 장자파로 돌리고, 12대 계왕이 다시 차자파로 왕위를 되찾아오자 13대 근초고왕이 또 다시 장자파로 왕위를 되돌리자 계왕의 아들인 무광왕과 근초고왕 사이에 왕위찬탈전이 내란으로 번지게 된다.
  그런데 이 싸움에서 무광왕이 패하게 되어 근초고왕은 대륙백제를 차지하게 되고, 패한 무광왕은 한반도로 도망쳐와서 다시 지모밀지(익산 금마)에 도읍하고 반도백제를 세우게 되는데, 후일 반도백제가 강성해져 대륙백제를 흡수 통합하게 되어 무광왕의 후예인 동성왕이 대륙으로 건너가 왕위에 오르게 되고, 무왕은 바로 이 동성왕의 고손자였다.
  동성왕은 초기에는 정치를 잘하여 북위의 침공을 무찔러 강국이 되나 만년에 이르러 정치를 등한시하고 향락에 빠지게 되어, 부하에게 시해 당하게 되자 다시 동성왕의 이복동생인 무령왕이 대륙으로 건너가 왕위에 오르게 됨으로써 동성왕의 후손들은 왕실에서 밀려나 대륙의 왕궁 남쪽에서 서민처럼 살게 된다.
  그런데 이때 동성왕의 증손자가 어느 날 집 근처의 호수에 놀러가 호수 가에 살고 있던 과부와 정을 통하여 아이를 낳게 되는데, 이가 곧 후일의 무왕으로서 어릴 때의 이름은 서동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서동은 분명 백제 왕실의 혈통을 이어받기는 했지만 오랜 세월을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나 살았기 때문에 어릴 때 마를 캐다 팔아 살아야 했을 정도로 가난하게 살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법왕이 죽고 아들이 없자 백제 왕실에서는 왕위를 이을 마땅한 사람이 없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자 백제왕실에서는 왕실의 혈통을 찾게 되었고, 수소문 끝에 찾아낸 사람이 바로 서동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서동은 어느 날 갑자기 마 캐는 청년에서 대륙백제의 왕위에 올랐던 것이다.
  물론 삼국유사에는 무왕이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와 혼인을 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으나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이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무왕의 왕비 이름이 우연하게도 선화였고, 신라의 장인들을 데려다 미륵사를 짓는 과정에서 그것이 잘못 추측, 와전되어 무왕의 왕비가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라 하게되었고 후세에 이르러 이야기가 만들어지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따라서 아직 서동설화는 그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것이다.
  대륙백제가 확실하게 밝혀질 때까지 서동설화에 대해서는 어설프게 손을 대지 않는 게 좋고, 무왕과 선화공주가 세웠다는 미륵사는 지금의 중국 하북성 난하 부근에 세운 절이었다.
  따라서 한반도의 익산 금마 미륵사지는 대륙에서 왕위에 올랐던 무왕이 세운 절이 아니라 반도백제의 왕후였던 사탁적덕의 딸이 지은 절이라 할 수 있는 것이고, 그 절의 건축시기를 단순하게 기해년(己亥年)이라는 명문만 가지고 무왕 40년 기해년(A.D.639)이라고 섣부르게 단정짓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익산 미륵사지는 대륙백제의 무왕과 연결짓지 말고 무광왕이 세운 반도백제의 왕실과 관련지어 해석해야 그 진실을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백날 모여 앉아 네가 옳다 내가 옳다 해봐야 말짱 헛소리일 뿐이다.

 

☆ 무광왕, 모도왕, 남제왕 등이 반도백제의 왕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