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천년의 수수께끼 임유관(臨渝關)을 찾았다 - 최초공개


삼국사기 온달열전을 보면,
“.......이때 후주의 무제가 군사를 출동시켜 요동(遼東)을 침략하니 왕(평원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배산(拜山)의 들판에서 맞받아 쳐 싸우는데, 온달이 선봉이 되어 용감히 싸워 적병 수십명의 목을 베니 여러 군사들이 이긴 기세를 타 용감히 싸워 크게 이겼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를 보면,
“평강상호태열제(평원왕)는 담력이 있고 말타고 활쏘는 것을 잘했으니 곧 주몽의 풍모가 있었다. 대덕으로 개원하고 정치를 잘하였다.
대덕18년 병신(A.D.576)에 제(평원왕)는 대장 온달을 보내 갈석산(碣石山), 배찰산(拜察山)을 토벌하고 추격하여 유림관(楡林關)에 이르러 북주를 크게 격파하니 유림진(楡林鎭) 동쪽이 모두 평정되었다. 유림은 지금 산서성의 경계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평원왕 때 고구려와 북주 사이에 전쟁이 있었음을 알게 한다.
그런데 기록 속에서 삼국사기 온달열전은 후주(북주)가 고구려의 요동(遼東)을 침공했으나 배산의 들판(拜山之野) 전투에서 온달의 활약으로 고구려가 대승했다고 하고,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는 이유는 기록하지 않은 채 고구려가 북주를 선제공격한 듯이 기록되어 있고, 온달이 이끄는 고구려군이 갈석산과 배찰산 전투에서 승리하고, 후퇴하는 북주(후주)군을 뒤쫓아 유림관 전투에서도 대승함으로써 고구려가 유림관 동쪽을 빼앗았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때 고구려의 도읍은 평양성으로서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부근이었고, 북주(후주)의 도읍은 장안인 지금의 서안이었다.
그리고 요동은 지금의 북경 부근을 말하는 것이고, 배산 또는 배찰산의 위치는 지금 잘 알 수 없으나 갈석산은 지금의 보정시 부근의 낭아산을 말하는 것이므로 평원왕 때 고구려는 지금의 하북성 남부까지 진출하여 차지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25대 평원왕 때 고구려가 지금의 하북성 남부까지 진출하여 차지했다는 기록을 믿기 어렵다고 하는 사람도 있겠으나 고구려의 평양성이 하북성 승덕시 부근이며, 요동성이 북경 부근이고, 요수가 지금의 영정하로 비정되므로 기록의 해석을 전혀 다르게 할 수 있고, 또 훨씬 앞선 시기인 고구려 5대 모본왕 때 고구려가 우북평(북평이라고도 한다), 어양, 상곡, 태원까지 침공했던 기록이 전해지고 있고, 6대 태조대왕 때는 요서에 10개 성을 쌓아 한나라의 침공에 대비하였다는 기록도 전해지고 있으니 평원왕 때 “유림관(필자주 : 임유관을 말하는 듯)”까지 고구려가 차지했다고 하여 놀랄 일은 아니고 이것이 역사적 사실일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 고구려가 북주(후주)로부터 유림관(楡林關)을 빼앗아 임유관(臨渝關)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런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영양왕 9년(A.D.598) 조와 자치통감 권178 수기2 고조문황제 조를 보면 이 기록 속에도 다시 임유관이 등장하는데, 평원왕 때 고구려가 유림관(임유관)까지 빼앗아 차지했다는 기록과 직접 연결된다.
598년 2월에 고구려 영양왕이 말갈 군사를 동원하여 수나라의 요서(요서군)를 침공하자 이에 화가 난 수 문제가 한왕 량과 왕세적 등으로 하여금 수륙군 30만으로 고구려를 침공하도록 명령한다.
그런데 6월에 이르러 한왕 량이 이끄는 육군이 임유관(臨渝關)을 출발하자 장마로 군량수송이 원활하지 않게 되어 군사들이 굶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고, 설상가상 또 전염병도 발생하게 된다.
☆ 고구려에서는 이때 강이식장군을 보내 수나라의 침공군을 임유관전투에서 궤멸시켰다고도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수나라가 처절하게 패배한 전쟁기록을 남기기 싫어 장마와 역질 때문에 많은 군사들이 죽었다고 거짓으로 기록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주라후가 이끄는 수군은 동래로부터 뱃길로 평양성으로 가다가 역시 풍파를 만나 많은 배가 유실되거나 침몰하게 된다.
그리하여 고구려를 침공하기 위하여 출발했던 수나라의 육군과 수군은 회군을 할 수 밖에 없었는데, 9월에 수나라 군사가 돌아갔는데 죽은 자가 십중 8, 9였다고 한다.
이를 보면 이때 수나라군은 실제 전투는 해보지도 못한 채 수 많은 군사들만 죽이고 회군할 수밖에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후일 당 태종이 정관 19년 즉 645년에 고구려를 침공했다가 철수할 때 또 다시 임유관이 언급된다.
당시 당 태종은 정주에서 출발하여 갈석산에 올랐다가 내려와 요택을 지나고 요수를 건너 마수산에 진을 치고 요동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킨 후, 다시 안시성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킬 수 없자 철군하여 요동에서 요수를 건너고 요택을 지나 포구, 발착수를 건너 영주 유성에 도착한 후 다시 임유관을 통과하여 출발지인 정주로 되돌아오게 되는데, 아직까지도 이 임유관이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지 확실한 장소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 지금 진황도 무녕현 동쪽에 유관진(楡關鎭)이라는 지명이 있어, 이곳을 옛 임유관(臨渝關)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갈석산은 지금의 낭아산(또는 그 부근), 요동성은 지금의 북경 부근이라는 것을 필자가 밝혀내었다.
따라서 요택이나 포구, 발착수, 영주, 임유관 등은 그 경로 중에 위치했을 것인데, 요택은 지금의 영정하 중류를 말하는 것으로 판단되고, 영주(유성)는 보정시 부근으로 비정해 볼 수 있다.
지금 역현 남쪽부근으로부터 동쪽으로 서수현 북쪽을 지나고, 안신현 부근을 지나고, 문안현 부근을 지나 대성현 부근까지 무너진 옛 장성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임유관은 바로 이 무너진 장성의 출입문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수수께끼 속 옛 임유관(臨渝關)은 지금의 보정시 서수현 부근에서 찾아야 그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