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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백제 멸망 후 그 땅을 나누어 당나라가 설치한 5도독부의 추정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 2007. 10. 17. 22:40

윤여동설 - 당나라는 백제를 멸망시키고 그 땅을 어떻게 나누어 5도독부를 설치했었을까? - 최초공개

 

  서기 660년 7월 18일 백제의 의자왕은 늙은 몸을 이끌고 태자와 대신·장군들을 이끌고 사비성에서 소정방에게 항복함으로써 678년 백제 왕조는 사직을 문닫게 되고, 의자왕과 그의 아들들, 신하와 장군 등 93명과 백성 1만2천여 명이 당나라로 끌려가게 된다.
  백제는 원래 5부, 37군, 2백 개성, 76만 호로 되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지역을 나누어

웅진(熊津)·마한(馬韓)·동명(東明)·금련(金漣)·덕안(德安)의 5도독부로

나누어 통치하게 되는데, 그 위치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조에는 왕과 태자 효, 왕자 태, 융, 연 및 대신·장군 88명과 백성 12,807명을 당나라 장안으로 호송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서기 660년 백제가 멸망할 당시 백제의 전체 호수가 76만 호였다면 1가구에 평균 5명씩의 식구가 있었다고 볼 때 당시 백제인구가 약 380만 명 정도였다는 말이 되고, 또 668년 고구려 멸망 시 5부 176성 69만여 호(구당서에는 69만 7천호)라고 기록되어 있어 당시 고구려의 인구가 약 350만 명 정도였다는 말이 되는데, 신라까지 합한다면 당시 삼국의 총 인구가 약 1000만 명에 육박했다는 말이 된다.

 

☆ 삼국유사 기이 제1 진한 조에는 신라가 전성기에는 서울(금성)에 17만 8,936호, 1,360방, 55리 35개의 금입택이 있었다고 하여 당시 금성의 인구가 약 90만 명 정도였다고 알려주고 있다.

    
  그런데 삼국지 고구려 전에는 고구려의 인구가 3만호였다고 기록되어 있고, 같은 책 한전에는 54국으로 이루어졌다는 마한의 인구가 10여만 호, 12국이었던 변한의 인구가 4∼5만 호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같은 12국으로 이루어진 진한 역시 4∼5만 호 정도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시 고구려, 마한, 진한, 변한의 인구를 모두 합하면 25여만 호 정도로서 약 125만 명 정도의 인구였다는 말이 되는데 그로부터 4세기가 지난 7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삼국의 인구가 매우 많이 증가되어 있었음을 알게 한다.

 

☆ 삼국유사 변한, 백제 조에는 백제의 전성 시에 인구가 15만 2300호였다고 기록하고 있고, 같은 책 고구려 조에는 고구려가 가장 융성하던 때에 인구가 21만 508호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를 호당 평균 식구수 5명씩을 적용하여 환산해 보면, 백제는 76만 1,500명, 고구려는 105만 2,540명으로 계산되므로 신라의 인구까지 합한다면 당시 삼국의 총인구수는 많아야 약 250∼300만 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중국 사서의 기록들과 현격하게 차이가 있는 것은 아마 삼국유사가 순수한 본국 인구만을 기록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필자는 여기에서 인구수의 적정 여부를 따져보려는 것이 아니라 백제가 멸망하고 설치했었다는 5도독부에 대하여 그 위치를 새롭게 비정해 보려 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우리는 백제가 한반도에서 건국되고 멸망한 것으로만 생각해 이 5도독부 역시 한반도에서 찾으려 했기 때문에 그를 정확히 찾아낼 수 없었기때문이다.

  그런데 백제의 건국지가 한반도가 아닌 대륙임이 밝혀졌고 백제는 대륙백제와 반도백제가 별도로 존재하고 있었다.
  온조왕이 위례성에서 건국한 백제는 대륙백제이고, 한반도에는 4세기 중엽 계왕의 아들인 무광왕이 대륙에서 근초고왕과의 왕위 찬탈전에서 패하고 한반도로 도망쳐 와서 지모밀지에 도읍하고 세웠던 반도백제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 반도백제의 역사는 우리에게 자세히 전해지지 않고 있어 우리는 지금 반도백제의 역사는 잘 알지 못한 채 대륙백제의 기록인 삼국사기 기록을 한반도로 가져와 반도백제의 흔적들을 대륙백제의 기록에 맞추어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익산 왕궁리의 백제 왕성과 절의 흔적 그리고 그 부근 제석사터의 흔적과 김제 벽골제는 반도백제 무광왕이 지모밀지에 도읍했던 반도백제의 흔적이고, 공주와 부여 역시 반도백제 도읍의 흔적이지, 삼국사기 기록 속 대륙백제의 도읍 웅진과 사비의 흔적이 아닌 것이다.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을 받아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잡혀 죽자 문주왕이 왕위에 올라 한성에서 급히 옮긴 도읍 웅진에 설치되었는데, 지금까지 우리는 이 웅진을 한반도 충남 공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기록은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의 기록이 아니라 대륙백제의 기록이며, 웅진도 한반도의 공주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백제의 웅진은 지금의 하북성 난하 부근에 위치했는데, 지금의 진황도 노룡으로 비정된다.


  마한도독부(馬韓都督府)

  원래 마한의 도읍 월지의 위치가 지금의 하북성 당산시 풍윤부근으로 비정되는데, 마한도독부는 바로 이곳을 중심으로 설치되었기 때문에 마한도독부라 했을 것이다.  

             

  동명도독부(東明都督府)

  그 위치를 확실하게는 알 수 없으나 졸본부여의 건국시조인 동명왕에서 유래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주몽과 온조와의 사이를 이해하지 못하고는 주몽이 온조왕의 아버지이고, 동명성왕이라 하는 우를 범하고 있었다.
  이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조의,
  "백제시조 온조왕은 그의 아버지가 추모인데 혹은 주몽이라고도 한다. 주몽이 북부여(사실은 동부여이다)로부터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에 이르렀는데, 부여왕(졸본부여왕)이 아들은 없고 다만 딸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만나보고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둘째 딸로서 아내를 삼게 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여왕이 죽고 주몽이 그 왕위를 이었다. 주몽이 두 아들을 낳았는데 장자는 비류요, 차자는 온조였다" 라는 기록과  "원년 여름 5월에 동명왕의 사당을 세웠다" 라는 기록, 그리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기록되어 있는 "시조 동명성왕의 성은 고씨요, 이름은 주몽[추모 혹은 중해라고도 한다]이다" 라는 기록을 결부시켜 온조와 비류가 주몽의 친아들인 것으로 생각했고, 온조왕이 나라를 세우고 동명왕의 사당을 세운 것이 주몽의 사당을 세운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삼국사기가 잘못 기록한 것으로서 주몽과 온조는 혈통이 엄연히 다르다.
  즉 주몽은 북부여의 후예로써 해씨였고, 온조는 졸본부여의 후예로서 부여씨였다.

  따라서 주몽은 북부여의 건국시조인 천제 해모수의 후예였고, 온조는 졸본부여의 건국시조인 동명왕 부여두막루의 후예였다.
   앞서 북부여는 기원전 239년에 해모수에 의해 건국되어 주변 소국들을 병합한 후 기원전 232년에 이르러 해모수가 천제의 자리에 올라 왕위를 이어갔다.
  그러다가 4대 해우루왕에 이르른 기원전 108년에 동명이라는 사람이 졸본에서 또 하나의 나라를 세우고 왕위에 올랐는데 이가 바로 졸본부여의 건국시조 동명왕이다.
  그렇게 세월이 흐른 기원전 86년에 졸본부여가 북부여를 침공하여 멸망시키자 북부여 해우루왕의 동생인 해부루는 유민들을 이끌고 가섭원으로 도망쳐 다시 나라를 세우는데 이가 해부루의 동부여이다.
  따라서 주몽은 바로 이 북부여 해모수의 후손으로서 동부여에서 태어나 자랐고, 온조는 졸본부여 동명왕의 후손이었다.
  천제 해모수는 주몽의 고조할아버지였고, 동명왕은 온조의 증조할아버지였다.
  그런데 북부여 해모수의 후손인 주몽이 동부여에서 어떠한 중대 사건에 연루되어 잡히면 죽게되는 상황에 처하자 동부여에서 도망쳐 졸본으로 오자 졸본부여왕이 주몽이 북부여 해모수의 고손자라는 사실을 모른 채 그를 사위로 삼고 왕위를 물려주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주몽은 북부여를 재건할 절호의 기회로 여기고 왕위에 오른 지 21년 후인 기원전 37년에 이르러 졸본부여를 없애버리고 북부여의 맥을 잇는 고구려를 건국하게 되고, 기원전 19년에 아들인 유리가 동부여로부터 그 어머니 예씨와 함께 도망쳐 오자 그를 태자로 삼았다가 왕위를 물려주고 죽게된다.

  그러자  온조는 그 다음해인 기원전 18년에 졸본이 아닌 진번 남쪽 한산 부근에 졸본부여의 맥을 잇는 백제를 건국하게 되는 것이다.
  역사적 사실은 이러했다.
  그런데 온조가 나라를 세우고 자기 할아버지 동명왕이 세운 졸본부여를 빼앗아간 주몽을 위해 사당을 세우고 그를 시조로 받들 수는 없는 일이다.
  온조왕은 맨 처음 나라를 세워 국호를 십제라 하고, 위례성에 도읍한 후 동명왕의 사당을 세웠는데, 이는 주몽의 사당을 세웠다는 말이 아니라 사실은 자기 증조할아버지였던 졸본부여의 건국시조 동명왕의 사당을 세웠던 것인데, 그를 우리가 착각해 온조왕이 주몽의 사당을 세웠던 것이라고 해석했던 것이다.
  온조가 십제를 세우고 맨 처음 도읍했던 위례성의 위치는 지금 난하 중류 동쪽, 진황도 도산 남쪽이었다.
  그러다가 비류가 젊은 나이에 갑자기 죽게 되자 온조의 십제와 비류의 백제가 합해지게 되었고, 도읍을 위례성의 남쪽인 남한성(후일의 광주)으로 옮기게 되고, 근초고왕 때 다시 북쪽의 한성으로 옮겼다가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을 받아 한성이 함락되자 문주왕이 남쪽의 웅진으로 옮기게 되고, 성왕이 다시 웅진 남쪽의 사비로 옮겼다가 그곳에서 멸망하고 만다.  
  따라서 위례성에는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동명왕의 사당이 있었을 것인데, 도독부의 명칭을 정하면서 바로 그 동명왕묘(東明王廟)에서 동명을 따 동명도독부라 했을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동명도독부의  위치는 백제의 첫도읍 위례성 또는 남한성(광주)에 설치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금련도독부(金漣都督府)와 덕안도독부(德安都督府)의 위치는

  정확히 비정하기 어렵지만 백제가 멸망할 때의 강역이 지금의 당산, 진황도 일원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북사 백제전에 백제 오방 중 동방을 득안성(得安城)이라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득안이 곧 덕안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렇다면

  덕안도독부는 백제의 동부지역에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금련도독부는 백제의 남부지역에 설치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도읍이었던 사비성은 도호부로서 전체를 총괄하게 했을 것이다.

 

  다만 이 5도독부의 위치는 단순한 추정이기 때문에 유물이나 기록이 발견된다면 그 위치가 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온조왕의 대륙백제가  지금 난하의 중, 하류를 중심으로 존속했던 것은 확실하므로 5도독부나 한성, 웅진성, 사비성 등이 모두 그 부근에 위치했던 것 만은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