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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풍납토성은 백제의 위례성(慰禮城)이 아니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15. 7. 15. 23:49

윤여동설 - 풍납토성은 백제의 위례성(慰禮城)이 아니다 - 최초주장

 

[백제 11대 비류왕의 아들인 근초고왕과 12대 계왕의 아들인 무광왕은 대륙백제의 왕위를 놓고 20여년간 왕위다툼을 하게 되는데, 최종으로 근초고왕이 승리하여 대륙백제의 13대 왕위에 올랐고, 패한 무광왕은 한반도로 도망쳐 지모밀지에 도읍하고 다시 백제(이를 필자는 반도백제라 부른다)를 세운다.

그랬다가 반도백제의 모도왕 때 이르러 대륙백제의 개로왕(근개루왕이라고도 한다)이 두 백제의 통합을 제안하였고, 우여곡절 끝에 반도백제가 대륙백제를 흡수통합한 후 반도백제 모도왕의 둘째 손자인 모대가 대륙으로 건너가 대륙백제의 왕위에 올랐는데, 이가 곧 동성왕이고, 그 뒤를 이어 동성왕의 이복동생인 무령왕이 대륙으로 건너가 백가의 난을 진압하고 대륙백제의 왕위를 잇게 되었고 죽은 후에는 고향인 반도백제로 돌아와 묻혔기 때문에 지금 무령왕릉이 한반도 충남 공주에서 발견된 것이다]

 

  온조백제(필자는 이를 대륙백제라 부른다)의 건국지 위례성(慰禮城)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진황도에 있는 도산(都山 : 이 산이 바로 대륙백제의 북한산이었다)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그 부근에 또한 대륙백제의 한성(漢城)도 위치하고 있었다.

    

[백제의 북한산으로 비정되는 지금의 진황도 도산]

 

  남한성(南漢城 )은 위례성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지금의 건창영 부근이었고, 부아악(負兒嶽)은 바로 이 건창영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산이었고, 웅진(熊津)은 노룡 부근이었으며, 백제의 마지막 도읍 사비(泗沘)는 난주(난현) 부근이었다.

   

[위 : 한산 부아악으로 비정되는 지금의 건창영 동북쪽 산 노군태]

 

[위 : 옛 웅진성으로 비정되는 지금의 노룡고성]

 

[위 : 지금의 난주고성은 옛 백제 무왕이 왕궁 남쪽에 물을 끌어들여 방장선산처럼 만들었다는 곳으로서 지금도 그 형태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데, 그곳 사람들은 인공적임이 확실한 이러한 시설이 왜 지금의 난주(난현)에 있는지 그 내막을 알지 못하고 매우 의아해 한다]

 

  지금의 노룡고성은 옛 웅진성의 흔적이고, 난주고성은 옛날 백제의 무왕이 대궐 남쪽에 못을 파서 20여리 밖에서 물을 끌어 들이고, 사면 언덕에 수양버들을 심고 물 가운데 섬을 쌓아 방장선산처럼 만들었다는 곳으로서 지금도 그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고, 그 부근이 바로 삼국사기 기록 속의 온조백제(대륙백제)였다.

  삼국사기는 한반도에 관한 기록이 아니라 북경부근에 위치하고 있던 대륙삼국의 기록이다.

  한반도에는 무광왕(武廣王)의 백제(필자는 이를 반도백제라 부른다)가 있었고, 첫 도읍은 지모밀지(枳慕密地)였다.

  그 후 도읍을 지금의 공주, 부여로 옮겼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공주 부근은 곤지(무령왕의 아버지)왕자 후손들의 영지였던 것으로 보이고, 부여 부근은 위덕왕 후손들의 영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한반도 서울에 있는 풍납토성이 백제의 위례성(慰禮城)이라고 하는 것은 역사를 직시하지 못한 엉터리 주장인 것이다.

백제의 초기도읍 위례성은 대륙에 있던 성이었지 한반도에 있던 성이 아니었다.

  당초에 한반도에 있지도 않았던 위례성을 한반도에서 천년을 찾아봐도 그 확실한 흔적은 찾을 수 없는 것이고, 풍납토성, 몽촌토성은 아직 우리가 그 성격을 잘 모르고 있는 이름모를 옛 성터일 뿐이다.

 

[한반도 서울 한강변에 위치한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필자주 : 한반도의 풍납토성이나 몽촌토성은 옛날에 장사꾼 도매상이 교역품을 사고 팔던 장소였지 백제의 도읍성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