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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동성왕은 웅진 대궐 동쪽 어디에 임류각을 세웠을까? - 최초공개

윤여동 2007. 10. 15. 19:50

윤여동설 - 동성왕은 웅진 대궐 동쪽 어디에 임류각을 세웠을까? - 최초공개

 

          [위 : 한반도 충남 공주 공산성 내에 복원해 놓은 임류각 ㅋㅋ] 

 

 

 

 

       [위: 웅진 공산(公山) 추정지(진황도 노룡현)]

 

 

                                                     [위 : 웅진성 동쪽 임류각 추정지]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 22년(A.D.500) 조에는,
  "봄에 대궐 동쪽에 임류각(臨流閣)을 세웠는데, 높이가 다섯 길이나 되고 또 연못을 파고 진기한 새를 길렀다. 잘못을 간하는 신하들이 상소문을 올렸으나 답하지 않고 다시 잘못을 간하는 사람이 있을까 염려하여 대궐문을 닫아버렸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학자들은 동성왕 때 백제의 도읍이 웅진이었으므로 그 웅진이 지금의 충남 공주였고, 백제의 왕궁이 그곳의 공산성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해 공산성 동쪽에서 임류각을 찾으려 노력했다.
  그리하여 결국 공산성 광복루 아래에서 건물터를 찾아내 그곳을 임류각지라고 명명하고 지금은 그 부근에 임류각이라고 2층 누각을 복원해 세워 놓았다.

 

  동성왕은 반도백제 모도왕의 손자로서, 두 백제의 통합을 위해 대륙백제로 건너가 문주왕 때 내신좌평에 올랐다가 해씨들에게 죽임을 당한 곤지의 둘째 아들이었다.
  앞서 백제 12대 계왕이 죽고 그 왕위를 근초고왕이 빼앗아가자 계왕의 아들이었던 무광왕은 그 왕위를 되찾기 위해 근초고왕과 20여 년에 걸친 왕위찬탈전을 펼쳤으나 결국 패하고 서기 365년경 대륙을 떠나 한반도의 지모밀지(현 익산 금마 왕궁리)로 도망쳐 와서 다시 반도백제를 세우게 되어 대륙백제는 근초고왕의 후손으로 왕위가 이어지게 되고, 반도백제는 무광왕의 후손으로 왕위가 이어져 가는데, 이들은 이후 100여 년 간 상호 교류없이 서로를 철천지원수로 여기면서 살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대륙백제 개로왕이 왕위에 오르자 두 백제의 통합을 제안하게 되는데, 이때 개로왕이 내세운 것은 반도백제나 대륙백제가 모두 4대 개루왕의 후손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 개로왕을 근개루왕이라고도 하는 것은 그가 두 백제가 모두 개루왕의 후손임을 표방하며 두 백제의 통합을 제안했기 때문에 붙여진 시호였다.

 

  그리하여 당시 반도백제의 모도왕도 그에 찬성하고 아들인 곤지를 대륙으로 보내 두 백제의 통합에 필요한 세부 사항을 협의하게 하는데, 그에 반대하는 대륙백제의 외척 해씨들의 반대로 뜻대로 추진되지 않았고 국론은 분열되었다. 그러는 와중에 고구려 장수왕이 대륙백제를 쳐 도읍인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고구려군에게 잡혀 죽게 된다.
  그러자 개로왕의 동복동생인 문주왕이 왕위에 올라 도읍을 급히 웅진으로 옮기고 난국을 수습한 후 두 백제의 통합을 다시 추진하기 위해 곤지를 왕명을 출납하는 내신좌평에 임명하게 된다.
  그러자 해씨들은 자신들의 권력이 약화될 것을 우려해 곤지를 죽여 버리고, 얼마 후 문주왕 마저 시해해 버리고, 나이 어린 삼근왕을 왕위에 올려 두 백제의 통합을 저지하려 한다. 
  반도백제의 모도왕에게 아들인 곤지가 대륙에서 피살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모도왕은 왕족과 외척인 진씨들에게 해씨들의 타도를 명령했고, 결국 몇 년 뒤 해씨들과 삼근왕을 제거한 뒤 자신의 둘째 손자인 모대(모태라고도 하며 곤지의 둘째아들)를 대륙으로 보내 대륙백제의 왕위에 올리게 되는데 이가 바로 동성왕이었다.
  그렇게 동성왕은 대륙백제의 왕위에 올라 남제와 국교를 맺고, 군사를 사열하는 등 약해진 대륙백제의 국력을 강화하는 조치를 취하게 되는데, 488년에 북위가 국경을 맞대고 있던 대륙백제를 침공해 오자 그를 물리치고, 490년에 북위가 또 다시 수십만의 대규모 기병을 동원해 침공해 왔으나 동성왕은 장수들을 보내 북위군을 기습공격 해 또 다시 대승을 거두게 된다.
  그리고는 신라와 우호를 맺고 493년에 신라에 혼인을 청하자 신라의 소지마립간이 이찬 비지의 딸을 보내 오자, 동성왕은 자신의 딸인 보과(寶果)공주를 당시 신라의 국공인 김원종(후일의 법흥왕)에게 시집 보내기도 한다. 이때 동성왕의 나이는 약 40세였다.

  동성왕의 딸 보과는 김원종(법흥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의 이름)에게 시집가 남모라는 딸과 모랑이라는 아들을 낳았는데, 삼국유사 탑상 제4 미륵선화 조에 언급되고 있는 두 원화 중 교정의 질투로 죽게 된 남모가 바로 이 동성왕의 딸 보과공주와 법흥왕 사이에 태어난 딸이었으며, 아들 모랑은 신라 화랑의 3세 풍월주가 되었다.
  백제와 신라가 아주 친밀했던 시기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14년(A.D.553) 조에는 "겨울 10월 왕이 백제 왕의 딸에게 장가들어 소비로 삼았다" 라고 기록하고 있고, 백제본기 성왕 31년(A.D.553) 조에도 "겨울 10월 왕의 딸이 신라로 시집갔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우리는 지금까지 그 기록을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때는 백제와 신라 사이가 매우 나빠져 있는 때였는데 어떻게 성왕이 진흥왕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낼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화랑세기에는 성왕의 딸이 신라로 시집갔다는 기록은 나타나지 않고 동성왕의 딸 보과공주가 신라 국공 김원종에게 시집을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서기 553년은 계유년인데 동성왕 15년(A.D.493)계유년 조에는 "봄 3월 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니 신라왕이 이찬 비지의 딸을 보내왔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사기 찬자들이 계유년을 착각해 493년 조에 삽입해야할 기록을 60년 뒤인 553년 조에 기록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이때 동성왕은 신라 소지마립간이 보내온 이찬비지의 딸과 혼인한 후 그 보답으로 자신의 딸 보과를 김원종(후일의 법흥왕)에게 시집보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하여 494년에 고구려와 신라가 살수(현 조하) 벌판에서 싸우다가 신라가 불리하여 견아성으로 들어가고 고구려군이 그 성을 포위하게 되어 신라군이 몰살당할 위험에 처하자 대륙백제의 동성왕은 군사 3천을 보내 그 포위를 풀어주어 신라군은 살 수 있었고, 다음 해 고구려가 백제를 침공하여 치양성을 포위하여 전세가 급해져 백제에서 신라에 도움을 청하자 신라에서도 군사를 보내 백제를 돕게 된다.
  494년에 이르러서는 탐라가 공납과 조세를 바치지 않자 동성왕이 손수 탐라를 정벌하려고 군사를 이끌고 무진주까지 이르자 탐라(탐모라)에서 사신을 보내 사죄해 중지하기도 한다.

 

☆ 우리는 위 기록을 이때 백제의 동성왕이 한반도의 제주도를 정벌하기 위해 전라도 광주에 이르자 제주에서 사신을 보내 사죄했다고 해석하나 사실 이 일은 대륙인 지금의 하북성 당산시, 진황도시 일원에서 일어났던 일로써, 이때 대륙백제의 도읍 웅진은 진황도시 노룡에 위치하고 있었고, 무진주는 그 서남쪽 천진시 영하 부근을 말하는 것이며, 탐라는 천진 부근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당시 대륙백제의 동성왕은 아무 것도 두려울 것이 없는 존재였는데, 499년에 이르러 크게 가물어 굶주린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을 지경이었으나 동성왕은 곡식을 풀어 백성을 구제할 생각을 하지 않아 한산 백성 2천명이 북쪽의 고구려로 도망치고, 설상가상 전염병 마저 돌아 백성들의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동성왕은 백성들은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도 왕궁 동쪽에 임류각이라는 누각을 짓고, 연못을 파고 진기한 새를 기르는 등 정치에는 무관심하게 된다.
  이때 동성왕이 무슨 정신적인 충격에 빠지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나 그는 이때부터 측근들과 어울려 임류각에서 잔치나 베풀고 밤새도록 놀기도 하고, 사냥이나 즐기게 되어 민심이 이반되어 가게 된다.
  그러자 결국 왕의 호위를 책임지고 있던 위사좌평 백가가 자객을 보내 왕을 시해하게 되는데, 이때 동성왕은 50세도 안된 나이였다. 반도백제의 희망이었던 동성왕은 그렇게 사라져갔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대륙으로 건너가 대륙백제의 왕위에 오른 동성왕이 세운 임류각을 한반도에서 찾고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록을 한반도 백제의 기록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충남 공주의 공산성을 뒤져 기와조각과 주춧돌의 흔적을 찾아내자 그곳이 임류각이 세워졌던 곳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성왕은 반도백제의 왕위에 올랐던 것이 아니라 대륙백제의 왕위에 올라 중국 대륙에 있던 북위와 전쟁을 하기도 했던 것이다.

  대륙백제의 웅진은 한반도 공주가 아니라 지금의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으로  비정되므로 임류각은 그 부근에 세워졌을 것이고, 임류각(臨流閣)은 그 누각의 이름으로 보아 왕궁의 동쪽 강변에 세워졌을 것이다.  
  높이가 다섯 길이나 되고, 웅장하며, 화려했을 임류각은 한반도 공주의 공산성에 세워졌던 것이 아닌 것이다.

  그리하여 누각의 이름도 강물이 흐르는 곳과 접했다는 의미로 임류각(臨流閣)이라고 했던 것이지, 강물이 바라보이지도 않는 한반도 공주의 공산성 산꼭대기쯤에 누각을 짓고 주변 환경과 어울리지도 않는 임류각(臨流閣)이라고 이름지었을 리는 없는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