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백제 역사의 미스테리가 풀렸다 - 최초주장
지금까지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백제는 매우 미스테리한 나라였다.
왜냐하면 백제에 대하여 깊이 연구하면 할수록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같은 기록들에 부딪치기 때문이었다.
☆ 옛 사서의 백제 관련 기록들을 모두 한반도에 비정하여 해석하려했기 때문에 미스테리하게 느껴졌을 것인데, 사실 백제는 한반도에서 건국된 나라가 아니었다.
삼국사기에는 백제의 동쪽에 (신라가 있고,서쪽에) 낙랑이 있으며, 북쪽에 말갈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기도 하고, 신라의 서쪽에 백제가 위치했다고도 기록되어 있고, 신라의 남쪽에는 가야가 있다고도 했고, 마한의 동북쪽에 백제가 위치하고 있었다고도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중국 사서들은 백제가 요동 동쪽 1천여 리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하기도 하고, 그곳이 장안(현 서안)에서 6,200리(?) 떨어진 곳이며, 백제의 북쪽에는 소해가 있고, 남쪽에는 대해가 있었다고 하기도 하며, 백제가 요서에 진평군 진평현을 설치했다고도 기록되어 있다.
☆ 백제의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 말갈이 있다는 백제 온조왕의 말은 잘못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위 그림처럼 백제의 서북쪽에 낙랑이 있었고, 북쪽에 진번(맥)이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제의 위치]
옥저 예(동예)
진번(맥)
낙랑 소해
신라
백제
가야
요동 마한
대해
그런데 아직까지 백제의 첫 도읍지 위례성은 물론 오백년 간 도읍했다는 한성의 위치도 밝혀지지 않고 있고, 신라군이 백제를 침공하기 위해 통과했다는 탄현과 계백장군이 이끄는 5천 결사대가 5만의 신라군과 만나 싸워 전멸했던 황산이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지 알지 못하고, 당나라의 소정방이 바다(발해)를 건너 군사들을 상륙시켰던 백강, 기벌포 등도 어디를 말하는지 찾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백제가 나당연합군의 침공을 받고 서기 660년에 의자왕이 항복을 하고 당나라로 끌려가 죽고, 복신을 중심으로 전개했던 부흥운동도 실패로 돌아가 끝내 멸망하고 말았다고 알고 있고,
그로부터 230여 년이 지난 892년에 이르렀는데도 견훤이 옛 백제 땅에서 백제의 부활을 표방하며 후백제를 세웠다가 자중지란으로 사라졌고,
또 고려 때도 1237년에 이연년이 옛 백제지역을 근거지로 삼아 백제 부활을 도모하였으나 얼마 못 가 소멸하고 말았음을 알고 있는데,
원사의 지원 4년 을사년(A.D.1267) 조에는 "백제가 그 신하 양호를 보내와 내조하니 비단을 차등 있게 하사했다(百濟 遣其臣梁浩內朝 賜以錦繡有差)" 라는 기사가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때의 원나라는 욱일승천해 가던 시절이었고, 백제는 멸망한지가 수백 년이 지난 때였다.
그런데 이때 백제가 사신을 보내 원 세조 쿠빌라이 칸을 만나 비단까지 하사 받았다는 것이다.
이는 이때까지 백제가 어디에선가 나라를 이루고 있었고, 꽤나 큰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원인(엔닌)의 구법입당순례행기를 보면, 백제 멸망시 3명의 왕자가 흑산도로 피신하였다는 기사가 나타나는데, 그렇다면 이 세 명의 백제왕자가 흑산도에 다시 백제를 세우고, 지원 4년까지도 존속하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백제 멸망 후 망국의 한을 가슴에 품고 바다건너 왜국으로 갔던 백제 유민들이 그곳에 다시 백제를 세웠던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백제가 멸망하고 당나라로 끌려갔던 백제 유민들이 양자강 남쪽에 다시 백제를 세웠던 것일까?
또 그것도 아니라면 견훤이 세웠던 후백제가 고려에 병합되자 그에 반대한 백제 유민들이 중국 남쪽으로 옮겨가 다시 그곳에 백제를 세워 1267년까지 존속했던 것일까?
그런데 필자는 여기에서 아주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려 한다.
백제의 건국지는 원래 한반도가 아닌 대륙으로서 지금의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도산(都山) 부근이었고, 마한은 당산, 풍윤 부근, 신라는 지금의 요하 서쪽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
특히 우리의 신라가 경주가 아닌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일원에 위치했었다고 하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는 필자의 근거 없는 주장이 아니라 중국의 수많은 사서들이 그렇게 알려주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신라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던 당나라의 역사서인 신·구당서에는 신라가 한(漢)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하고 있었고, 서쪽은 백제와 접했으며, 북쪽은 고구려와 접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수서와 북사에도 신라가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한나라 때의 낙랑 땅이란 한반도의 북한 평양 부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중국 하북성 승덕시 일원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한반도의 경주에 도읍하고 천년 왕조를 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신라가 한반도가 아닌 지금의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부근을 중심으로 건국된 후 강역을 넓혀 한(漢)나라 때의 낙랑 땅 일부를 차지했다는 말이 되고, 그 서쪽에 백제, 그 북쪽에 고구려가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며, 또 신라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가야 역시 요녕성 호로도, 흥성 부근에, 백제의 서남쪽에 있었다는 마한은 진황도 도산의 서남쪽인 당산, 풍윤부근에, 백제의 서쪽 1천여 리에 있었다는 요동은 북경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고, 백제의 북쪽에 있었다는 말갈은 진번(맥국)의 오기인 것이다.
그리고 백제 북쪽의 소해는 지금의 반가구수고를 말한다고 할 수 있고, 남쪽의 대해는 발해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자! 사실이 이러하다면 우리의 역사는 처음부터 모두를 새롭게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백제는 대륙에서 건국되었고, 그곳에서 왕위를 이어갔는데, 7대 사반왕까지는 장자계승원칙을 지켰다. 그런데 4대 개루왕의 차자인 구태의 손자인 8대 고이왕이 조카인 7대 사반왕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함으로써 백제왕실은 장자파와 차자파 간에 왕위찬탈로 얼룩지게 된다.
그러다가 11대 비류왕이 장자파로 왕위를 찾아가게 되고, 다시 12대 계왕이 차자파로 왕위를 되돌리고, 13대 근초고왕이 장자파로 다시 왕위를 찾아가게 되자 12대 계왕의 아들인 무광왕과 근초고왕 사이에 왕위를 놓고 다투게 되는데, 결과적으로 무광왕이 패하게 된다.
그러자 무광왕은 대륙을 떠나 한반도의 지모밀지(전북 익산 금마)에 다시 도읍하고 백제를 건국하게 됨으로써 근초고왕의 대륙백제와 무광왕의 반도백제가 등장하게 되는데, 이 반도백제는 안전한 한반도에서 빠르게 성장하여 지금의 일본열도까지 진출했던 듯 하다.
그렇게 100여 년이 흐른 후 반도백제가 대륙백제를 흡수 통합하게 되고, 죽은 곤지의 둘째아들인 동성왕이 대륙으로 건너가 대륙백제의 왕위에 오르고 뒤를 이어 동성왕의 이복동생인 무령왕이 왕위를 잇게 되고, 의자왕 때에 이르러 대륙백제는 멸망하고 마는 것인데, 반도백제의 기록은 단편적으로 무광왕, 모도왕 등이 나타날 뿐 아직 확실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런데 백제는 1267년까지도 원나라에 사신을 보낼 정도로 어디선가 건재하고 있었다.
이는 정황상 한반도에 세워졌던 반도백제 또는 지금의 일본열도에 있던 열도백제에서 원나라에 사신을 보냈을 것이라고 해석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지금 일본에서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헛소리를 하기도 하는데, 지금의 일본열도는 고대의 왜국이 아니라 우리의 백제(반도백제)가 차지했던 땅이었을 것이다.
고대의 왜국은 지금의 일본열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요동반도에 위치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사서들에는 한결같이 왜국이 백제, 신라의 동남쪽 대해 가운데, 또는 대방 동남쪽 대해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를 알 수 있다.
잃어버린 대륙의 우리 옛 땅, 한반도보다도 훨씬 더 큰 땅을 필자가 찾아낸 것이다.
백제는 미스테리한 나라가 아니라 그 역사 기록이 자세히 전해지지 않았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