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카테고리 없음

윤여동설 - 일본 국보 스타하치망인물화상경 명문의 비밀 - 최초공개

윤여동 2008. 5. 16. 04:54

윤여동설 - 일본 국보 스타하치망 인물화상경 명문의 비밀 - 최초공개

 

 

 

 

                                                   

  지금 일본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우전팔번(스타하치망)신사 인물화상경(隅田八幡神祠 人物畵像鏡)에는 우리 역사와 관련된 명문이 새겨져 있어 한·일간에 그 명문의 해석을 놓고 주장들이 분분하다.
  왜냐하면 그 명문에 "사마"와 "남제왕"이라는 두 사람의 왕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남제왕의 신분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고, 사마란 백제 무령왕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칠지도 명문과 함께 이 명문 역시 아직까지 명쾌하게 해독되지 못하고 있는데,

  기록을 보면,
"癸未年八月 日十六王年男弟王在意紫沙加宮時斯麻念長壽遣開中費直 穢人今州利二人等取白上同二百旱 作此竟

[계미년8월일16왕년남제왕재의자사가궁시사마념장수견개중비직예인금주리2인등취백상동2백한작차경]"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 위 명문 중 "十六王年"을 "十大王年"으로 보는 사람도 있으나 16왕년(재위16년이란 의미)으로 보아야 연대가 딱 맞는다.

 

  그런데 일본 학자들은 이 명문을,

  백제 무령왕(사마)이 왜왕인 남제왕에게 바친 헌상물이라고 해석하고,

  우리 학자들은 남제왕이 사마왕의 장수를 염원하며 만든 것이라고 거꾸로 해석한다.
  이 역시 한·일간 자존심 싸움이다.
  역사에 관한 한 해석이 항상 반대이다.
  그러나 이는 자존심 싸움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고,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 정확한 해석을 할 수 있다.  

 

☆ 사마왕이 곧 백제 무령왕이라는 것은 확실하지만 일본 역사 어디에도 남제왕이라는 사람이 왜국의 왕위 또는 천황위에 올랐었다는 근거가 없는데도 일본학자들은 남제왕이 왜국왕이었을 것이라고 우기고 있으니 억지 중의 억지이다.

 

대륙백제 무령왕과 반도백제 남제왕은 이복형제사이였다

 

  앞서 백제 무령왕이 태어났을 때 그 아버지 곤지에게는 이미 전처소생의 다섯명의 아들이 있었다.

  동성왕은 둘째였고, 무령왕은 여섯째였다.
  따라서 전처소생의 아들 5명과 개로왕의 왕비였던 여인에게서 태어난 무령왕은 이복형제사이였다. 

 

   앞서 곤지가 두 백제(대륙백제와 반도백제)의 통합을 추진하기 위하여 대륙으로 건너가 있을 때 개로왕의 왕비(개로왕이 정비와 후궁을 포함하여 몇명의 왕비가 있었는지는 전해지지 않았다) 중 한 사람과 정을 통하여 임신이 되자 개로왕이 그 왕비를 곤지에게 주었고, 후일 태어난 아이가 바로 무령왕 사마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령왕의 할아버지는 모도왕(牟都王)
으로서 당시 반도백제의 왕이었고, 곤지는 바로 반도백제 모도왕의 태자였다.
  그런데 곤지는 477년 7월에 발해 북쪽에 위치한 대륙백제에서 두 백제의 통합을 반대하는 해씨들에게 죽임을 당했고, 문주왕도 시해 당하고 삼근왕이 해씨들의 추대로 왕위에 오르게 되자 반도백제 모도왕은 해씨들을 타도해 버리고 대륙백제를 흡수 통합한 후 479년에 둘째 손자인 모대를 대륙으로 보내 왕위에 오르게 했는데 이가 바로 동성왕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반도백제의 모도왕이 죽었다면 그의 손자 중 누군가가 모도왕의 뒤를 이어 반도백제의 왕위에 올랐을 것인데, 과연 누가 그 할아버지 모도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을까?
  이는 정황 상 죽은 곤지의 장자가 왕위에 오르는 것이 순리라 할 수 있다.

 
☆ 앞서 반도백제 모도왕이 대륙백제의 해씨들을 타도하고 삼근왕도 죽여버림으로써 대륙백제를 흡수 통합한 후 자신의 손자 중 누군가를 보내 대륙백제의 왕위에 올려야 했을 때 반도백제의 모도왕이 자신의 맏손자는 태손으로 봉하여 반도백제의 왕위를 잇게 하려 했기 때문에 둘째 손자인 모대(동성왕)를 대륙백제의 왕위에 오르게 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무령왕의 출생년도는 462년이고, 무령왕이 태어났을 때 그에게는 이미 배다른 5명의 형들이 있었다.
  그렇다면 맏형과 여섯째인 무령왕과의 나이차이는 적어도 10년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동경을 만든 때가 계미년이라 했고, 사마(무령왕)가 언급되며, 16왕년남제왕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 말은 남제왕 재위 16년이라는 의미일텐데 삼국사기를 보면 무령왕(사마왕) 재위기간 중 계미년은 재위 3년으로서 503년에 해당되고 무령왕은 501년 12월에 이복형인 동성왕이 백가에게 시해 당하자 대륙으로 건너가 그 뒤를 이어 대륙백제의 왕위에 올랐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인 반도백제의 모도왕은 480년에서 490년 사이에 죽었고, 대륙백제동성왕은 그 할아버지의 작위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 책부원구 권963, 외신부8, 봉책1에는 남제태조 건원 2년인 480년에 백제왕 모도(牟都)가 사신을 보내와 사지절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의 작위를 주었다고 하고, 남제서 백제국전에는, 백제 동성왕이 488년에 북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490년에 남제에 사신을 보내자 남제의 무제는 동성왕에게 "사지절 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이라는 작위를 주었는데, 이때 "모대(동성왕)의 죽은 할아버지 모도(牟都)의 뒤를 이어 백제왕으로 봉한다"고 기록하고 있으므로 모도(牟都)가 백제의 왕위에 올랐었고 동성왕의 할아버지였음을 알 수 있으며, 또 모도왕(牟都王)은 480-490년 사이에 죽었음도 알 수 있다.  

 

  잘 따져보자.
  503년 계미년이 남제왕 재위 16년이라면, 남제왕은 488년에 왕위에 올랐었다는 말이 된다.
  이는 반도백제 모도왕(牟都王)
이 488년에 죽고 장손인 남제왕이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동성왕이 백가에게 시해 당해 죽은 501년에 반도백제의 왕위에는 무령왕의 맏형인 남제왕이 왕위에 올라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501년에 사마(무령왕)를 대륙으로 보내 죽은 동성왕의 뒤를 이어 대륙백제의 왕위에 오르게 한 사람이 곧 맏형인 남제왕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동경을 만든 때가 무령왕 재위 3년인 계미년 서기 503년 8월이라 했고, 이때 무령왕의 나이는 42세였다.
  이해 8월이 남제왕에게 있어 매우 의미 있는 달이었을 것인데, 이때 남제왕의 나이는 55세쯤이었을 것이다.  

 

☆ 혹시 남제왕의 생일이거나 왕위에 오른 기념일이 아니었을까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인데, 여기에서는 55세 생일로 보고 해석한다. 

 

  유추해 보면,
  맏형인 반도백제 남제왕의 생일날이 돌아오자 대륙백제의 왕위에 올라 있던 동생인 사마(무령왕)는 동경 제작 기술자인 예국 사람 금주리 등을 반도백제로 보내 큰 형님인 남제왕의 생일도 축하하고,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로 동경을 다량(약 4백∼5백개) 제조하게 하여 왕족과 귀족들에게 기념으로 나누어주었는데, 이때 무령왕은 대륙백제의 왕위에 올라 있었음에도 겸손하게 사마왕이라 하지 않고, 사마라고 만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가 맏형에 대하여 예우를 깎듯이 하고 있다고 할 수 있고, 해석이 매끄럽다.

 

☆  예란 동예를 말하는 것으로서 지금의 중국 내몽골 통요시 고륜기 일원을 말하는 것이고, 이때 대륙백제의 도읍 웅진은 발해 북쪽 지금의 하북성 청룡하 하류 진황도 노룡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을 알고 명문을 해석해 보자.

 

癸未年 八月 日
계미년(A.D.503) 팔월 일
十六王年 男弟王 在意紫沙加宮時
재위 16년 남제왕이 의자사가궁에 있을 때
斯麻 念長壽
사마가 (남제왕의) 장수를 염원하며
遣開中費直 穢人今州利 二人等
개중비직과 예국 사람 금주리 두 사람 등을 보내
取白上同二百旱 作此竟
백상동 2백한으로 마침내 이를 만들었다.

 

  라는 해석이 가능해 지는 것이다.
  결국 우전팔번신사 인물화상경은 동생인 대륙백제 무령왕이 큰형님인 반도백제 남제왕의 장수를 염원하며 503년에 만든 것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동경은 기념품으로 만들어져 세상에 흩어졌고, 당시 최고급품에 속했을 동경이 일본열도로 건너가 무덤에 부장품으로 묻혔다가 발굴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일본 사람들이 지금 그 동경의 명문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백제의 유물을 일본의 국보로 지정했다는 말이 된다.
  물론 그 외에도 백제의 유물이 일본의 국보로 지정된 것은 많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