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난하 부근 대륙삼국의 역사서이다 - 최초주장
세상이 또 한번의 새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 용틀임을 하고 있는 이때 우리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도 새 시대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할 때다.
우리는 지금 조선시대 사람들처럼 한반도만이 우리 역사의 전부라고 인식하며 웅크리고 살 것인지, 우리 선조들이 내몽골 부근까지를 차지하고 주변 세력들과 끊임없이 다투고 경쟁하며 역사를 이어온 민족이었다고 자부하며 활개펴고 살 것인지 선택해야할 기로에 서 있다.
그런데 우리 역사를 논하려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제외하고는 단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삼국사기는 김부식을 비롯한 고려의 학자들이 인종의 명을 받아 1145년에 편찬한 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의 역사서이다.
그런데 이 삼국사기의 내용에 대하여 고려시대에는 잘 쓰여진 역사서로 인정했고, 당시 김부식은 역사를 잘 아는 사람으로 중국 송나라에까지도 알려졌으며, 일연선사는 삼국유사 저술 삼국사기의 기록을 아무 의심 없이 인용했다.
고려시대에는 삼국사기가 우리 삼국 역사를 아주 잘 정리한 역사서로 인정받았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 삼국사기는 조선 시대로 접어들어서는 기록이 잘못 되었다고 치부되기 시작했고, 김부식을 사대주의자로 매도하는 근거로 활용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조선중기의 학자 안정복이 삼국사기를“조잡하고 잘못된 것이 너무 많아서 역사서라고 할 수가 없다”라고 비판을 가한 이후 조선 후기의 학자들은 삼국사기가 아주 잘못된 역사서로 이해하게 된다.
지금 삼국사기는 김부식 등이 써서 간행했을 최초 간행본은 전하지 않지만, 조선이 건국된 직후인 1394년인 태조 3년 갑술년에 계림부사 김거두 등이 원래의 삼국사기를 다시 목판본으로 간행했고, 1512년 중중 7년 임신년에 경주진 병마절도사 이계복 등이 태조 갑술본을 다시 목판본으로 간행한 중종 임신본이 완본으로 전하고 있다.
이때가 명나라 무종의 정덕(A.D.1506~1521) 연간이기 때문에 정덕본 또는 정덕 임신본이라고도 부르는데, 지금 우리는 바로 이때 만들어진 삼국사기 기록을 보고 삼국 역사를 알게 되었고, 또 우리 삼국 역사를 해석한다.
그런데 삼국사기의 내용을 세밀히 분석해 보면, 그 안의 내용들에 대하여 많은 의문을 가지게 하는 것이 사실이고, 기록들이 한반도의 지리적 상황과 비슷하기는 하지만 정확히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조선시대 학자들도 삼국사기의 기록에 대하여 그 정확성을 의심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왕명을 받아 고려의 김부식과 여러 학자들이 모여 심혈을 기울여 만든 삼국사기가 왜 이렇듯 지금 한반도의 지리적 상황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것일까?
1천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라서 삼국사기 편찬 당시의 고려시대 사람들은 방향도 제대로 모르고, 거리도 잘 몰라 그렇게 기록할 수밖에 없었을까?
그러나 신라시대에도 자석이 있어 나침반을 만들었다고 하고, 그때에도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졌으니 다른 것은 몰라도 동서남북 방위를 잘못 기록했을 리는 없을 것이고, 또 거리라는 것은 당초 옛날 사람들이 아침해가 떠서 해가 질 때까지 하루 종일 부지런히 걸어가면 얼마를 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았을 것이고, 그를 다시 나누어 "리(里)"라는 거리 단위가 만들어졌을 것이므로 비록 사람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다하더라도 평균적으로 보면 그 거리는 거의 일정했을 것이다.
따라서 고려시대 사람들이 거리를 아주 엉터리로 기록했을 리도 없는 것이다.
☆ 아주 옛날 동네에서 동네까지의 거리를 "리(里)"라 했고, 또 걸음(보폭)을 기준으로 하여 거리 단위를 정했다고 하는 사람도 있으나 어느 것이 사실인지 알 수 없다
.
그런데 지금까지도 우리 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삼국사기가 매우 정확한 삼국 역사서라고 인식하는 측과 조선시대 학자들과 같이 삼국사기 기록을 믿을 수 없다고 평가절하하는 측이 존재하는데, 필자가 보기에는 양측 모두 삼국사기가 한반도에 존재했던 삼국의 기록이 아니라 대륙에 존재했던 삼국의 기록임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가 지금 한반도에서 살고 있고, 구석기시대를 비롯한 선사시대 유물들도 한반도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고, 일부나마 삼국시대 유물들도 또한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역사가 한반도를 중심으로 수천 년 간 이어져 왔다고 인식해 삼국사기의 기록에 백제의 동쪽에 (신라가 있고, 서쪽에는) 낙랑이 있으며, 북쪽에 말갈이 있다는 백제 온조왕의 말과, 신라의 서쪽에 백제가 있고, 남쪽에 가야가 있다는 신라 파사이사금의 말을 한반도에 적용하여 해석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 사서들은 한결같이 전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했던 한사군 중의 낙랑군이 한반도 평양부근이라 기록하지 않고, 만리장성이 시작되었고, 갈석산이 있는 그 부근을 낙랑군으로 기록하고 있다.
옛 기록들을 억지로 한반도에 비정하지 말고, 기록이 말하는 대로 역사를 해석하면 우리 역사의 중심지는 한반도가 아니라 지금은 중국 땅이 되어버린 발해 북쪽 난하 부근이 된다.
그리하여 필자는 옛 기록에 따라 우리의 옛 땅을 찾아 나섰고, 결국 찾아냈다.
필자가 새로 밝힌 고조선의 왕검성, 고구려의 평양성은 하북성 승덕시 부근이며, 백제의 도읍들은 지금의 난하 부근에 있었다.
따라서 백제의 서남쪽에 위치했으며, 사방 4천리에 이르는 넓은 땅을 차치하고 있던 한의 도읍 월지국(목지국이라고도 한다)은 지금의 하북성 당산시 풍윤 부근을 말하는 것이고, 진한과 신라는 요녕성 호로도시, 금주시 부근을 말하는 것으로서 금주시(錦州市)가 바로 신라의 천년 도읍 서라벌(금성)로 비정되는 곳이다.
또한 변한과 가야는 호로도시 흥성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고, 말갈은 지금의 대흥안령 동쪽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백수의 강물 빛이 오리의 머리색과 비슷하여 압록수라고도 불렀다는 압록강은 지금의 한반도 북쪽 압록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북경 북쪽을 흐르는 백하, 밀운수고를 말하는 것이고,
요수(遼水)는 지금의 북경 서쪽을 흐르는 영정하(永定河)를 말하는 것으로서 이 요수가 바로 우리 역사상 대개의 경우 중국과의 서쪽 경계를 이루던 강이었고, 그 동쪽에 위치한 지금의 북경 부근이 곧 요동군이었고, 그 서쪽이 요서군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지금의 요하를 요수 라고 비정해 역사를 해석했으니 우리의 역사 강역이 한없이 줄어들게 되었으나, 우리는 지금까지도 내몽골, 몽골의 땅이 우리의 옛 땅이었음을 알지 못하여 그 땅을 잃어버렸다는 것 자체를 인식하지 못한 채, 요하 동쪽만이 우리의 옛 땅이었을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우리 역사 학자들의 책임이라 할 수 있을 것인데, 지금 많은 사람들은 일제 강점기에 친일 역사학자들이 우리의 대륙역사를 반도역사로 왜곡했다고 하기도 하나 우리의 역사는 조선시대에 이미 전부가 왜곡되어 있었지 친일 역사학자들이 당시에 모든 것을 왜곡했던 것은 아니었다.
일본 그들은 조선시대에 이미 왜곡된 우리 역사를 교묘히 식민통치에 활용했던 것이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일제 강점기 때 우리의 대륙역사를 반도역사로 왜곡한 원흉으로 지목하며, 지탄하는 이병도는 조선후기 때 사람인 정약용의 설에 따랐을 뿐 아무리 살펴보아도 정약용설을 뛰어넘는 새로운 주장을 한 것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는 우리 고대역사를 정확히 꿰뚫어 보지 못한 채 조선 후기의 정약용설을 답습했을 뿐이었다.
정약용의 "아방강역고"를 읽어보면 필자의 말을 금방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고대사의 중심 강역은 하북성, 요녕성, 내몽골 부근으로서 그 중에서도 지금 하북성 가운데를 서북에서 동남으로 흐르는 난하(灤河)가 우리 역사의 중심 강 바로 패수(浿水)였다.
그 부근이 바로 고조선으로부터 위만조선과 삼한, 삼국, 고려의 중심 강역이었다.
백제는 4세기 중반 근초고왕과의 왕위 찬탈전에서 패한 무광왕(계왕의 아들)이 한반도의 지모밀지(현 한반도 전북 익산 금마 왕궁리)에 도읍함으로서 한반도에 반도백제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1백여 년 후에는 반도백제가 대륙백제를 흡수통합 한 후 반도백제 모도왕이 둘째 손자인 모대(동성왕)를 대륙으로 보내 대륙백제의 왕위에 올렸다.
신라는 낙랑 땅과 가까운 진한에서 건국되었고, 신라의 도읍은 여전히 대륙의 서라벌[현 요녕성 금주시(錦州市)부근]이었으며, 신라의 중심 강역은 한반도가 아닌 대륙이었다.
그렇다면 통일신라 땅에서 일어난 고려는 어디에 위치하고 있어야 하는가?
사서들은 고려의 도읍 개경이 한(漢)나라 낙랑 땅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필자주 : 사실은 낙랑군과 진번군 사이지역으로 보인다]
이는 고려의 도읍 개경이 지금 중국 하북성 난하(옛 패수)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로서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관성현(관성만족자치현)이 바로 고려의 도읍 개경으로 비정되는 곳이다.
따라서 그 서북쪽의 옛 평양성인 하북성 승덕시는 고려의 서경이며, 관성의 동쪽인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부근은 고려의 동경(옛 신라의 천년도읍지 서라벌)이고, 개경의 동남쪽 도산 남쪽에 고려의 남경도 설치되었다.
고려는 한반도가 아닌 대륙이 중심 강역이었던 것이다.
☆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된 후 도읍을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겼는데, 우리는 지금까지 이를 한반도 황해도 개성에서 서울로 옮긴 것이라고 역사를 해석했으나 사실은 대륙의 개경(하북성 승덕시 관성현)에서 한반도의 한양(현 서울)으로 옮긴 것이었다.
지금까지 우리가 이를 인식하지 못해 한없는 착각을 하게 되었다고 생각되는데, 이러한 상황을 빨리 인식하는 것이 우리 대륙역사와 반도역사를 밝힐 수 있는 지름길로 생각된다.
따라서 지금의 난하를 중심으로 한 그 부근 지역은 고조선으로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의 땅이었다.
고려로부터 그 이전 우리의 선조들은 한반도를 중심으로 살았던 것이 아니라 지금의 중국 난하를 중심으로 역사를 일구었고, 삼국사기는 바로 그 대륙의 역사서였다.
그러므로 삼국사기는 한반도 삼국의 기록이 아니라 대륙에 위치하고 있었던 삼국의 기록인 것이며, 고려 역시 대륙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김부식 등 고려의 학자들도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 살았고 그곳에서 삼국사기를 편찬했던 것이다.
그런데 한반도에서 살았던 조선시대 학자들이 그를 모르고 삼국사기 기록이 한반도 삼국의 역사서인 것으로 착각해 그 기록 모두를 한반도에 비정해 삼국역사를 해석하려 했고, 역사적 장소들을 찾으려 했으니 찾을 수 없었을 것은 당연하고, 지리상 거리와 방향도 정확히 맞아떨어질 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급기야는 삼국사기를 형편없는 역사서라고 하게 되었으니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그런데 아직까지도 내노라 하는 우리 역사 학자들 대부분이 삼국사기 기록 속 역사적 장소들을 대륙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한반도에서 찾으려 하고 있고, 또 삼국사기 기록을 온갖 추리력을 총동원하여 한반도 지형에 맞추어 설명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 필자는 매우 안쓰럽다.
닫힌 사고로는 우리 역사의 진실을 절대로 밝힐 수 없고, 억지 주장은 후세 사람들로부터 반드시 엉터리 역사학자였다는 조롱과 함께 거짓 학문적 업적은 결국 쓰레기통에 쳐 박히게 될 것이다.
발상을 전환하라. 그리하면 역사가 환히 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