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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익산 미륵사탑출토 사리봉안기의 비밀 - 최초공개

윤여동 2009. 1. 21. 06:12

윤여동설 - 익산 미륵사탑출토 사리봉안기의 비밀 - 최초공개

 

                                            

 "백제 무광왕이 지모밀지로 천도하고 새로이 절을 지었다. 그런데 정관 13년(A.D.639) 기해년 겨울 11월에 벼락이 떨어져 제석정사에 불이 났다"

  라는 관세음응험기 기록 속의 무광왕(武廣王)에 대하여, 우리는 정관 13년인 서기 639년이 삼국사기 기록 속의 백제 무왕 재위기간이라 하여 백제 무광왕이 바로 백제 30대 무왕(武王)과 동일 인물일 것이라 생각한다.

 

☆ 지금 학자들은 무광왕이 지모밀지로 천도하고 절을 지은 시기와 절에 벼락이 떨어져 불탄 시기를 동일시기로 보고 있으나 절을 지은 시기와 불탄 시기를 왜 동일시기로 보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절을 지은 지 수백년 후에 절에 벼락이 떨어져 불탔다면 백제 무광왕이 지모밀지로 천도하고 절(제석사)을 지은 시기와 불탄 시기가 현격하게 다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무광왕이 정관 13년에 도읍을 옮겼고, 절을 짓자마자 불이 났다면 "정관 13년에 백제 무광왕이 지모밀지로 천도하고 절을 지었는데 그 해 11월에 절에 벼락이 떨어져 불탔다"고 기록하지 않았을까?
  


  그리고는 삼국유사 무왕 조의,
  "어느 날 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가려고 용화산 아래 큰 연못가에 이르니 미륵삼존이 못 가운데서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예를 갖추었다.
  그러자 부인이 왕에게 말하기를, "저의 소원이니 여기에 절을 지어 주십시오" 하였고, 왕은 그것을 허락했다.
  곧 지명법사에게 가서 못을 메울 일을 물으니 신통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헐어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여기에 미륵삼존의 상을 만들고 전각과 탑과 낭무를 각각 세 곳에 짓고 절 이름을 미륵사라했다" 라는 기록을 전북 익산 미륵사에 관한 기록이라 생각하고는 지금 익산 미륵사가 무왕 때 지어진 것이라 역사를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익산 미륵사지를 발굴해 보았고, 서탑을 해체하여 심초석 사리공에서 사리병과 사리봉안기 그리고 각종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사리봉안기의 기록에 절의 조성연대가 "기해년(己亥年)" 이라 되어 있었고, 백제왕후인 사탁적덕의 딸이 익산 미륵사의 창건자로 기록되어 있어 삼국유사 무왕 조의 미륵사 창건설화(백제 무왕과 신라 진평왕의 셋째딸 선화공주가 미륵사를 지었다는 서동설화)와는 확연히 다르나, 학자들은 정관 13년(A.D.639) 기해년에 제석사에 불이 났다는 관세음응험기 기록 속의 기해년(己亥年)과 미륵사 서탑 출토 사리봉안기 속의 기해년(己亥年)을 동일 연대로 보고 익산 미륵사가 백제 30대 무왕 40년(A.D.639)에 지은 것으로 생각하는 듯 하다.

  그러나 사실 삼국유사는 한반도에 관한 기록이 아니라 대륙에 있던 삼국의 기록이다. 즉 지금의 중국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일원에 위치했던 대륙신라와 하북성 당산, 진황도 일원에 위치했던 대륙백제 그리고 하북성 승덕시 일원에 위치했던 고구려의 기록이고, 고려 또한 그 부근 지금의 하북성 관성현(寬城縣, 필자주 : 이곳이 고려의 개경이었다)이 중심이었다.
  일연은 한반도에서 살며 삼국유사를 지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의 중국 하북성 난하 부근에서 살면서 삼국유사를 지었고, 그곳에서 죽었다.
  아마 일연은 한반도에 와 본 일도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사실 삼국유사에는 한반도에 관한 기록은 들어 있지도 않은 것이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삼국유사 기록을 근거로 전북 익산 미륵사가 백제 30대 무왕 때 지어졌을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다.

 

☆ 중국 사서들에는 신라가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낙랑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고, 장성이 시작되었다고 했으며, 백제는 신라의 서쪽에, 고구려는 신라와 백제의 북쪽에 위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삼국은 어디에 위치했었다는 말일까?

 

  사실 백제는 8대 고이왕이 조카인 7대 사반왕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함으로서 5대 초고왕의 후손인 장자파와 초고왕의 동생 구태의 자손인 차자파간에 왕위찬탈전이 시작되어 9대 책계왕, 10대 분서왕은 차자파였고, 11대 비류왕은 장자파, 12대 계왕은 차자파 13대 근초고왕은 다시 장자파가 왕위에 올랐다.

 

☆ 삼국사기의 백제왕위계승 기록을 연대와 혈통을 잘 따져보면 필자의 주장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12대 계왕으로부터 13대 근초고왕이 왕위를 찬탈하자 계왕의 태자였던 무광왕과 근초고왕 사이에 왕위찬탈전이 전개되었고, 결국 패한 무광왕이 365년경 대륙을 떠나 한반도로 도망쳐 와서 지모밀지에 도읍하고 다시 백제(반도백제)를 건국하게 됨으로써 한반도에 백제의 흔적을 남기기 시작하는 것이다.
  한반도에서 4세기 중반 이후의 백제 유물이 출토되는 이유이다.

  그러다가 반도백제 무광왕의 후예인 모도왕 때 이르러 반도백제가 대륙백제를 흡수통합 하게 되어 모도왕은 둘째 손자인 모대(24대 동성왕)를 대륙으로 보내 대륙백제의 왕위에 오르게 하고, 반도백제는 모도왕이 죽은 후 장손자인 남제왕이 왕위에 올랐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무왕은 바로 이때 대륙으로 건너가 대륙백제의 왕위에 올랐던 동성왕의 고손자쯤 되는 인물이므로 삼국유사 무왕 조의 서동설화는 사실은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일이 아니라 대륙에서 일어나고, 전해지던 설화이고, 대륙백제의 왕위에 올랐던 무왕이 지은 미륵사는 한반도가 아니라 대륙인 지금의 하북성 난하 부근에 지어진 절일 것이다. 

 
☆ 일본 우전팔번신사 인물화상경 명문 속의 남제왕이 바로 반도백제 모도왕의 장손자이고, 곤지의 장자였으며, 동성왕은 모도왕의 둘째 손자로서 이들은 동복형제이다. 무령왕은 반도백제 모도왕의 아들이었던 곤지왕자가 두 백제의 통합을 추진하기 위하여 대륙백제에 가 있을 때 대륙백제 개로왕의 왕비와 불륜을 저질러 잉태되어 태어난 곤지의 아들로서 반도백제 모도왕의 여섯째 손자이다. 따라서 동성왕과 무령왕은 이복형제 사이가 된다.
무령왕이 태어났을 당시 곤지에게는 5명의 전처소생의 아들들이 있었는데, 동성왕은 둘째였고, 무령왕은 곤지의 여섯째 아들이었다. 따라서 동성왕이 이복 형이고 무령왕이 이복동생인 것인데, 이들은 약 10세 정도 나이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반도의 익산 미륵사의 원래 절 이름이 미륵사였는지도 불분명하게 되고, 반도백제의 무광왕 또는 그 후손이 왕위에 올라 있을 때 왕후가 되어 있던 좌평 사탁적덕의 딸이 주축이 되어 지은 전혀 다른 이름의 절일 가능성이 많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백제가 한반도로 진출한 이후의 기해년이란 서기 399년, 459년, 519년, 579년, 639년이 있으므로 익산 미륵사는 이 여러 기해년 중 어느 해에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이 가능한데, 무광왕이 지었다는 제석사(제석정사)에 벼락이 떨어져 불탄 때는 서기 639년 11월이었다.
  따라서 지금 왕궁리 5층석탑은 제석사가 불탄 이후에 제석사 불탑(목탑) 심초석 속에 넣었던 사리와 금강바라경판이 불타고 녹아버리자 장소를 옮겨 불에 타지 않는 석탑을 다시 세우고 사리와 경판을 다시 만들어 넣었으므로 왕궁리 5층석탑은 서기 639년 이후에 세워졌을 것이다.
  그런데 익산 미륵사탑과 왕궁리 5층석탑의 조성 형식은 익산 미륵사탑이 왕궁리 5층 석탑보다 훨씬 앞선 시기의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학자들도 익산 미륵사탑이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화하는 한반도 최초의 석탑일 것으로 보고 있고, 필자가 보기에도 그렇게 보인다. 

 

  따라서 필자는 익산 미륵사는 서기 639년보다 훨씬 앞선 시기 즉 399년 기해년 또는 459년 기해년이거나 반도백제가 대륙백제를 흡수 통합함으로서 국운이 욱일 승천하던 때인 519년 기해년에 지어진 절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만약 서기 519년 기해년에 지어진 것이라면 이때 반도백제의 왕위에는 무광왕의 후예이며, 모도왕의 장손자(곤지의 장자)이며, 무령왕의 이복형인 남제왕이 왕위에 올라 있었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이때 대륙으로 건너가 이복형인 동성왕의 뒤를 이어 대륙백제의 왕위에 올라 있던 무령왕도 이 절을 짓는데, 많은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 서기 519년에 무령왕의 나이는 58세였고, 이복 큰형인 남제왕은 무령왕보다 10여세쯤 위였을 것이므로 70세쯤 되었을 것인데, 바로 이 반도백제 남제왕이 이복동생인 무령왕을 대륙으로 보내 동성왕의 뒤를 이어 대륙백제의 왕위에 오르게 만든 인물이었으므로 무령왕은 큰 형님인 남제왕을 극진하게 예우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익산 미륵사는 반도백제와 대륙백제가 합심하여, 무광왕이 처음 한반도로 건너와 지모밀지에 도읍을 정하고 반도백제를 세웠던 그들의 고향에 세운 절일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익산은 반도백제의 시작이었고, 고향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관세음응험기에 기록되어 있는 "백제 무광왕"을 잘 모르고 있고, 남제서에 기록되어 있는 "백제 모도왕"도 잘 모르며, 일본에 있는 동경(銅鏡)에 명문으로 새겨져 있는 "남제왕"도 잘 모르고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에 그 왕들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고 하여 그들이 백제왕이었던 것도 모르고 있으나 사실 그들은 "반도백제의 왕"이었고,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대륙백제의 기록인 것이다.
  따라서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대륙백제의 왕대와 그곳에서 일어났던 사건들만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의 고대 역사를 새로 해석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참고] 

 익산 미륵사지 서탑출토 사리봉안기 번역문

  

  삼가 생각해보면,
  법왕(부처님)께서 세상에 나타나셔서 감응하시고, 현신 하시는 것은 물 속에 달이 비치는 것과 같습니다.
  왕궁에서 태어나셨으나 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시면서 8곡의 사리를 남겨 3천 세계를 이익 되게 하셨으므로, 정신을 맑게 하고 오색으로 빛나는 사리를 돌면 그 신통변화는 불가사의할 것입니다.
  우리 백제왕후께서는 좌평 사탁적덕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동안 선을 베풀어 금생에 좋은 보은을 받아 만민을 기르는 동량이 되셨으므로 재물을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시고, 기해년(己亥年)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모시게 되었습니다.
  원하오니, 세세토록 공양하겠으니 겁겁이 다할 때까지 이 선한 마음 변치 않게 하여 주시고,

  대왕폐하의 수명은 산악과 같이 견고하게 하여 주시고 치세는 천지와 함께 영구하며, 위로는 정법을 널리 펼치고 아래로는 창생을 교화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 원하오니, 왕후의 마음을 수경과 같이 하여 법계를 비추게 하여 주시고, 몸은 금강처럼 불멸하게 하시어 칠세의 먼 조상까지도 함께 복리를 입게 하시고, 모든 중생들도 함께 불도를 이루게 하여 주시옵소서. 

      
☆ 익산 미륵사를 백제 무왕 40년 기해년(A.D.639)에 지었다는 확실한 근거가 위 사리봉안기 기록 어디에 있다는 것인지 필자로서는 이해되지 않는다. 오직 "기해년(己亥年)"이라는 기록뿐인데 그를 어떻게 무왕 때라 단정할 수 있는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