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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공주 의당면 수촌리고분은 반도백제 왕족의 무덤일 가능성이 있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11. 11. 4. 20:03

 

윤여동설 - 공주 의당면 수촌리고분은 반도백제 왕족의 무덤일 가능성이 있다 - 최초주장

   

 

 

 

 

  백제 “무광왕(武廣王)”은 아직까지 비밀 속의 왕이다.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아무리 뒤져봐도 백제의 왕 중에 무광왕이라는 왕은 존재하지 않고, 백제의 도읍 중에 지모밀지라는 곳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에 대한 기록은 정사에는 단 한 줄도 나타나지 않고 오직 관세음응험기의 기록 속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百濟武廣王遷都枳慕密地新營精舍(백제 무광왕이 지모밀지로 천도하고 새로이 절을 지었다)” 라고............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은 이 관세음응험기라는 기록의 신빙성에 대하여 의심의 눈초리를 늦추지 않는다.

  그러나 백제 역사를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무광왕이라는 왕이 누구를 말하는지 알 수 있게 되고, 양서나 남사에 언급되고 있는 백제 모도왕(牟都王)에 대해서도 알 수 있게 된다.

  앞서 백제 건국시조 온조왕이 십제를 건국하였다가 그 형 비류왕이 죽자 그 형이 세운 나라인 비류백제를 통합하고는 국호를 백제로 바꾸어 2대 다루왕, 3대 기루왕, 4대 개루왕, 5대 초고왕, 6대 구수왕, 7대 사반왕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이때까지는 장자계승원칙을 철저히 지켰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4대 개루왕의 차자 구태의 손자인 8대 고이왕이 집안 조카인 7대 사반왕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하여 백제의 왕통이 장자파에서 차자파로 바뀌어 그 아들 9대 책계왕, 10대 분서왕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랬다가 7대 사반왕의 동생의 아들이 성장하여 분서왕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하여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이가 장자파인 11대 비류왕이고,

  다시 분서왕의 아들이 성장하여 비류왕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하게 되는데, 이가 차자파 12대 계왕이며,

  또 다시 비류왕의 아들이 성장하여 계왕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하게 되는데, 이가 장자파 13대 근초고왕인데 이후 23대 삼근왕까지 근초고왕의 후손으로 왕위가 이어지게 된다.

  그런데 근초고왕이 계왕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했을 때 계왕의 아들도 어느 정도 성장하여 있었는데, 자신이 올라야할 왕위를 빼앗기게 되자 그 왕위를 되찾기 위하여 근초고왕과 약 20년에 걸쳐 잃어버린 왕위를 되찾기 위하여 대립하였으나 결국은 패하고 만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조에 약 20년 정도의 기록이 없는 이유이다.

  그리하여 그는 대륙에서 도망쳐 한반도로 와서 서기 365년경 나라를 세워 국호를 다시 백제라 하고 도읍을 지모밀지에 정하고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이가 곧 무광왕이라는 인물이다.

  백제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기록들이 중국 남조의 역사서에 기록되는 이유이다.

  그리하여 필자는 대륙에서 건국된 온조백제(대륙백제)와 구분하기 위하여 이를 반도백제라 부른다.

 

  이로부터 백제는 대륙백제와 반도백제로 나누어져 약 1백여년간 각각 독자적으로 존재하며 세력을 키워갔는데, 반도백제의 왕위계승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전해지지 않았으나 대륙백제의 왕위계승에 대하여 기록한 삼국사기에는 나타나지 않으나 중국 남조의 역사서인 양서나 남사 등에 기록되어 전해진 백제 “모도왕(牟都王)”이 바로 반도백제 무광왕의 후예로서 반도백제의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그런데 이 반도백제 모도왕이 바로 곤지의 아버지였고, 동성왕, 무령왕의 할아버지였는데, 동성왕이나 무령왕은 대륙백제의 왕위에 올랐고 그 이후에도 이들의 후손들이 대륙백제의 왕위를 이어갔다.

  이 말은 곧 반도백제 모도왕 때 반도백제가 대륙백제를 흡수 통합하였고(이때 대륙백제는 삼근왕 때였는데 모도왕이 삼근왕과 그 지원 세력인 해씨들을 제거하고 통합을 이룬다), 반도백제 모도왕이 그 손자인 모대(모태라고도 하고 일본서기에는 말다라고도 기록되어 있는데 곧 동성왕을 말한다)를 대륙으로 보내 대륙백제의 왕위에 올렸고, 동성왕이 시해당하자 그 이복동생인 무령왕이 다시 대륙으로 건너가 대륙백제의 왕위에 오른다.

  그런데 대륙백제의 왕위에 올랐던 무령왕의 능이 충남 공주에서 발굴되었고, 전북 익산 제석면에서는 제석사지가 발견되었으며, 금마 왕궁리에서는 왕궁터가 발굴되었고, 그 가까이에는 미륵사지가 있고, 미륵사지 서탑에서는 사탁적덕의 딸로서 백제왕후가 되었던 인물이 탑을 세웠다는 명문이 출토되었으며, 익산에는 지금 쌍릉이라 불리우는 무광왕과 왕후의 능으로 비정되는 고총도 있다. 그리고 충남 부여에서는 창왕명석조사리감이 출토되었고, 부소산 건너편에서는 사리장엄구가 발굴되었는데, 청동사리함에는 백제 창왕이 죽은 아들을 위해 탑을 세웠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창왕이란 대륙백제의 왕위에 올랐던 위덕왕을 말하는 것이다.

  이를 보면 동성왕이나 무령왕으로부터 그 이후 그들은 대륙백제의 왕위에 올랐었으나 한반도에 능을 조성하였고 탑을 세웠다는 말이 된다.

  동성왕 이후 무광왕, 모도왕의 후예들이 대륙으로 건너가 대륙백제의 왕위에 올랐으나 한반도도 여전히 그들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는 말이 되는 것인데, 필자는 익산 금마의 왕궁리는 무광왕이 한반도로 도망쳐 와서 처음 도읍한 지모밀지라는 곳이라 생각하고 있고, 공주나 부여는 그 이후의 도읍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리하여 무령왕 같은 경우는 한반도에서 40세 정도까지 살다가 그 이복형인 동성왕이 대륙에서 시해 당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당시 반도백제의 왕위에 올라 있던 큰형인 남제왕(동성왕의 바로 위 형이고, 무령왕의 이복큰형으로서 후일 무령왕은 그의 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동경 제작 기술자를 한반도로 보내 동경을 제작하도록 하였다)의 명에 따라 대륙으로 건너가 백가의 난을 수습하고 대륙백제의 왕위에 올랐고, 죽은 후 그 아들인 성왕이 대륙백제의 왕위를 이었으나 무령왕 스스로는 자신이 자란 고향 땅에 묻히기를 원하여 그 유골을 한반도로 가져와 공주에 능을 조성했다고 보여지고, 그 후의 왕들도 마찬가지가 아니었나 싶다.

  사실이 이랬을 경우 공주시 북쪽 의당면 수촌리에서 발견된 고분들은 반도백제의 건국시조인 무광왕의 후예인 반도백제 왕족들이 묻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동성왕, 무령왕의 아버지였던 곤지에게는 첫 부인 소생의 다섯 아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동성왕은 그 중 둘째였다고 했고, 원래 개로왕의 왕비였으나 개로왕이 곤지에게 주었던 여인의 소생 무령왕이 있었다.

  그런데 무령왕의 능이 충남 공주에 조성되었고, 무령왕의 아들인 성왕의 명복을 비는 절을 창왕(위덕왕)이 충남 부여에 세웠으며, 무령왕의 손자인 창왕(위덕왕)이 일찍 죽은 그 아들을 위한 탑을 부여에 세웠다는 점을 감안하면 공주, 부여 지역은 그들에게 있어 고향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공주 수촌리고분군은 바로 반도백제 무광왕의 후손들 즉 반도백제 왕족들이 묻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거의 왕릉급에서나 출토될 수 있는 고급 유물들이 출토되었을 것이다.

  수촌리는 공주의 북쪽에 위치하는데, 공주의 남쪽에도 백제왕릉이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고, 그 위치를 필자는 알고 있는데 수촌리에서 백제고분이 발견되었으므로 공주 남쪽에서도 백제 왕릉 또는 왕릉급의 고분이 발견될 가능성은 충분하다 하겠다.

  백제 무광왕, 백제 모도왕을 모르고, 동성왕이 왜 모도왕의 손자라고 기록되었고, 그 할아버지 모도왕의 작위를 물려받고 있는지를 모른 채 삼국사기만을 가지고는 백제의 역사를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