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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구려가 백제(大陸百濟)를 백잔(百殘)이라 부른 이유는?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2. 20. 01:19

윤여동설 - 고구려는 왜 백제(大陸百濟)를 백잔(百殘)이라 불렀을까? - 최초주장

 

 

광개토대왕 비문 영락 6년 병신년 조를 보면,
"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
 而()以辛卯年來
 渡海破百殘OO新羅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伐殘國
"이라고 새겨져 있다.

 

☆ 위 기사 중 괄호 속의 글자는 원래 倦(게으를 권)자였으나 지금까지 이 글자가  글자 모양이 비슷한 倭(왜)자인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 신묘년 기사의 해석을 놓고 한·일 간에 논란이 많았는데, 사실 이 조문은 왜와는 아무 관련도 없다.

 

  압록강 너머 집안에 있는 호태왕 비는 413년 10월에 광개토대왕이 죽자 아들인 장수왕이 그 다음해인 414년 갑인년 9월 29일에 아버지인 광개토대왕 평생의 훈적을 새겨 능 앞에 세운 훈적비로서 당시 고구려인들이 글을 짓고, 쓰고, 새긴 것이므로 후대의 어느 기록보다도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필자주 : 다만 호태왕 당시 고구려의 도읍은 평양동황성 즉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부근이었는데, 어떻게 호태왕비가 한반도 북쪽 집안에 세워진 것인지 매우 이상하다. 누군가에 의해 옮겨진 것일까? ] 
  그런데 신묘년 기사를 해석해 보면 "백잔과 신라는 옛날 고구려의 속민이었으므로 그런 이유로 조공을 바쳤었는데, 신묘년 이래 조공 바치는 것을 게을리 하였으므로(신묘년 이래 조공을 바치지 않았으므로), 바다를 건너 백잔과 □□ 신라를 격파하여 신민으로 만들기 위해 영락 6년 병신년에 왕이 친히 수군을 이끌고 잔국(백잔)을 토벌했다" 라는 뜻으로서 비문의 다른 조문을 보면 신라, 동부여, 왜 등은 정상적으로 국호를 기록하고 있는데 비해 유독 백제만은 국호를 기록하지 않고 백잔(百殘)이라 부르고 있어 지금까지 왜 백제만을 그렇게 불렀는지 그 이유를 잘 알 수 없었다.

 

☆ 이때 백제의 도읍 한성은 한반도의 서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중국 하북성 진황도 도산 남쪽 부근으로 비정되고, 고구려의 평양성은 하북성 승덕시를 말하는 것이며, 신라의 서라벌은 요녕성 호로도시 금주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패수란 지금의 난하 중 반가구수고 북쪽을 말하는 것이다. 삼국사기는 바로 지금의 북경 부근에 존재했던 대륙삼국의 역사서이다.

 

  그리하여 백제와 고구려가 경쟁관계에 있었고, 백제가 평양성을 침공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화살로 쏘아 죽였기 때문에 백제를 증오하게 되어 국호인 백제라 불러주지 않고, 백제를 저주하는 의미로 백잔이라 낮추어 불렀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했다.
  그런데 드디어 그 이유를 필자가 밝혀내었다.
  앞서 고구려의 15대 미천왕은 서기 44년에 후한 광무제가 살수이남 땅에 설치했던 후한낙랑군 땅을 313년에 이르러 그를 빼앗아 고구려에 편입시킨다.

 

☆ 후한 낙랑군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흥륭현 일원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16대 고국원왕 때에 백제에서는 12대 계왕의 아들이었던 무광왕과 11대  비류왕의 아들이었던 근초고왕 사이에 왕위 다툼이 벌어져 결국 무광왕이 패하게 되어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자 그는 고구려 고국원왕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백제와 고구려는 원한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고국원왕은 무광왕이 다시 나라를 세우는데 도움을 주게 되는데 이때가 서기 365년경이었다.
  그리하여 무광왕은 대륙백제는 근초고왕에게 빼앗긴 상태였으므로 한반도로 건너와 백제를 다시 건국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반도백제이다.
  그렇게 되어 고구려는 반도백제를 정통으로 인정하게 되었고, 반도백제는 고구려에 조공을 바쳤을 것인데, 대륙백제의 근초고왕은 자신을 정통으로 인정하지 않은 고구려의 태도에 불만을 가지게 되었고, 적대시하게 되어 두 나라 사이가 벌어져 고구려의 고국원왕은 369년에 두 나라간 400여 년 간의 평화를 깨고 대륙백제를 선제 공격했으나 오히려 패하게 되고, 371년에 다시 한번 대륙백제를 쳤으나 역시 패하게 된다.
  그러자 고구려와 두 번의 전쟁에서 승리한 근초고왕은 자신감을 얻게 되어 371년 겨울에 전군을 고구려의 평양성을 향하여 진군시키게 되는데, 이때 근초고왕은 웅대한 작전계획을 수립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고구려는 지금의 중국 산서성으로부터 하북성, 북경, 내몽고자치구, 요녕성 일부까지를 영향권 안에 넣고 있었고, 도읍은 황성(평양성 동쪽 가까운 곳에 위치)이었는데, 대륙백제가 평양(평양성과 황성은 같은 평양지역에 위치)을 쳐서 빼앗는다면 고구려는 국토의 절반을 빼앗길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고국원왕은 도읍인 황성(황성과 평양성은 같은 평양에 위치하고 있었다) 즉 평양성에서 대륙백제의 침공군을 막게 되는데, 이때 대륙백제군이 쏜 화살에 고국원왕이 맞아 죽게 되어 고구려가 패하게 된다.
  이때 고구려가 평양성을 빼앗기지는 않았지만 왕이 죽고 패전하게 됨으로써 요서 진평현 땅을 대륙백제에게 빼앗기게 되고, 대륙백제와 고구려는 철천지원수의 나라가 되는데, 이때가 대륙백제로서는 가장 넓은 강역을 이룬 시기였다.

 

☆ 그러나 실제 백제 최대의 강역을 일구었던 때는 반도백제와 대륙백제가 통합을 이루었던 동성왕 때로 보인다.

 

  그렇게 고구려는 소수림왕, 고국양왕, 광개토대왕으로 왕위가 이어지게 되고, 대륙백제는 근구수왕, 침류왕, 진사왕, 아신왕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광개토태왕이 396년 병신년에 대륙백제를 쳐 아신왕으로부터 항복을 받고 후일 장수왕 때 다시 한번 대륙백제를 침공해 도읍인 한성을 함락시킨 후 대륙백제의 개로왕을 잡아죽이게 되어 결국 이후 대륙백제는 반도백제에 흡수 통합되고 이때부터 대륙백제와 반도백제는 공동으로 고구려의 팽창정책에 맞서게 된다. 

  
  결론적으로 다시 정리한다면 호태왕 비문에 백제를 백잔(百殘)이라 표기한 것은 대륙백제를 칭하는 말로서 "백제의 나머지 무리"라는 의미였던 것이다. 
  고구려는 근초고왕으로부터 삼근왕까지의 대륙백제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왕을 쫓아낸 반란군 무리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주변의 다른 나라와는 달리 대륙백제 만을 백잔이라 낮추어 불렀던 것이다


  발상을 전환하면 이렇듯 간단명료한 것을 이것을 밝혀내는데 천년도 더 걸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