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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백제의 건국지가 정말 대방고지(帶方故地)였고, 건국시조는 구태(仇台)였을까? - 최초주장

윤여동 2015. 9. 19. 10:55

윤여동설 - 백제의 건국지가 정말 대방고지(帶方故地)였고, 건국시조는 구태(仇台)였을까? - 최초주장

 

 

  주서 백제전을 보면,

  “백제는 그 선조가 대개 마한의 속국이며 부여의 별종이다.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비로소 대방 땅에 나라를 세웠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수서 백제전에는,

  “동명의 후손에 구태(仇台)라는 자가 있었는데, 매우 어질고 신의가 두터웠다. 비로소 대방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 ()나라 요동태수 공손도(公孫度)의 딸을 아내로 삼았는데, 나라가 점점 번창하여 동이 중 강국이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북사 백제전에도,

  “동명의 후손에 구태가 있었는데, 매우 어질고 신의가 있었다. 비로소 대방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 한나라 요동태수 공손도의 딸을 구태에게 시집보냈는데, 마침내 동이 중 강국이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대체적으로 백제의 건국시조를 구태(仇台)”라는 인물이라 하고 있고, 건국지를 대방고지(帶方故地)”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구당서 백제국전에는,

  “백제국은 본래 부여의 별종으로서 마한의 옛 땅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대방고지를 직접 언급하지 않고, 마한 옛 땅에 백제가 위치하고 있었다고 하고 있고,

  이승휴의 제왕운기 백제기를 보면,

  “백제 시조는 온조인데, 동명성제가 아버지였네. 그 형 유리와서 왕위 이으니 마음이 편치못해 남쪽으로 옮겼도다. 한 성제 홍가 3년 계묘에 변한(弁韓) 땅에서 개국하니, 들은 넓고 기름지며 천시와 지리와 인화까지 함께 얻어 경영한 지 얼마 안되어 천관이 구비 되었도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엉뚱하게도 백제가 마한 땅이나 대방고지가 아닌 변한 땅에서 건국되었다고 읊고 있다.

 

졸본부여의 건국시조 동명왕은 백제의 건국시조 온조왕의 증조할아버지였고, 백제는 변한 땅이 아닌 마한 동북쪽, 진번 남쪽 한산부근에서 건국되었다.

 

  그런데 또 환단고기 속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를 보면,

  “고주몽은 재위시에 일찍이 말하기를 만약 적자인 유리가 오면 마땅히 봉하여 태자로 삼을 것이다라고 했다. 소서노는 장차 두 아들에게 이로울 것이 없음을 염려 하였는데, 기묘년(B.C.42) 3월에 패대의 땅(浿帶之地)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다는 말을 듣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번지간(辰番之間)에 이르렀다라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그리고 진번을 언급하고 있고,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보면,

  “일설에는 시조 비류왕은 그 아버지가 우태(優台 : 졸본부여 동명왕의 작은 아들의 아들)이니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이오, 어머니는 소서노이니 졸본사람 연타발의 딸로서 처음에 우태에게로 시집 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이는 비류요, 둘째는 온조였다

  “주몽이 북부여(동부여)에서 낳은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니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염려하여 드디어 오간, 마려 등 열명의 신하를 데리고 남쪽지방으로 떠나니 백성들 중에 따르는 자가 많았다. 이리하여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 살만한 곳을 살피다가 비류가 바닷가에서 살자고 하니 열명의 신하가 간하여 말하기를 이 강의 남쪽 땅은 북대한수(北帶漢水)하고, 동거고악(東據高岳)하며, 남망옥택(南望沃澤)하고, 서조대해(西阻大海)하였으니 그 천험의 지리가 얻기 어려운 지세이니 여기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하였으나 비류가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가지고 미추홀(弥鄒忽)로 가서 살게 되었고, 온조는 하남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열명의 신하를 보좌역으로 삼아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는데, 이때가 전한 성제 홍가 3년이었다

  “대왕(주몽왕)께서 세상을 떠나시게 되고 나라가 유류(유리왕)에게 귀속되니 우리들이 공연히 여기에서 몸에 군더더기 살처럼 지내기보다는 차라리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지방으로 가서 땅을 선택하여 따로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우는 것이 낫겠다하고는 드디어 그 아우와 함께 무리를 이끌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를 건너 미추홀(弥鄒忽)에 와서 살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종합해 보면, 백제의 건국시조는 비류와 온조이고, 패수와 대수 부근에 미추홀이 위치했고, 그곳에 비류가 나라를 세웠고,[필자주 : 그 후 기록을 보면, 미추홀에 자리잡은 비류는 그곳을 국가로서 성장시키지 못하고 일찍 죽었고, 미추홀의 백성들은 위례성의 온조 십제로 합병되어 백제가 되었다]

  한산과 부아악이 있고, 한수가 흐르는 부근에는 위례성이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비류와 온조의 아버지를 우태(優台)라 하고 있다. 중국 사서들의 기록과 우리 사서의 기록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백제의 건국시조가 비류 혹은 온조 임은 확실하고, 건국지 미추홀과 위례성이 한산과 한수 부근임도 확실하다.

  그렇다면 중국 사서들은 왜 백제의 건국자를 구태(仇台)라고 기록했고, 대방고지에서 백제가 건국되었다고 기록했던 것이며, 공손도와 연관시켰던 것일까?

  후한 말에 공손도(?-204)가 요동군을 장악했을 때 백제는 5대 초고왕(재위 166-214) 때였다.

  따라서 당시 공손도는 북쪽의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하여 요동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위치한 백제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실제 자신의 딸을 백제왕족인 부여구태(扶餘仇台)에게 시집보냈을 가능성이 있고, 9대 책계왕도 대방왕(공손공으로 추정된다)의 딸 보과와 혼인하였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한다.

 

공손도(公孫度)

공손도(? ~ 204) 또는 공손탁이라고도 읽는.

중국 후한 말의 인물로, 자는 승제(升濟)이며 유주(幽州) 요동군(遼東郡) 양평현(襄平縣) 사람이다. 어릴 적 이름은 공손표(公孫豹)였으며, 이름 중 '''도 또는 탁'으로 읽힌다.

그의 부친 공손연(公孫延)은 관리의 추적을 피해서 현토군(玄菟郡)으로 갔기 때문에 그곳에서 살았다.

같은 군 출신인 동탁(董卓)의 수하 장수 서영(徐榮)의 추천을 받은 뒤 요동 태수가 되었으나, 중원 지역이 혼란해지자 왕을 자처하며 독립 세력을 구축하였다.

그는 산동 반도의 동부 지역 및 주변 지방을 공략하는 등 세력을 확장하였다.

또한 국내적으로도 강성한 호족들을 대량 숙청하여 절대군주권을 확립하는 데 힘썼다.

한편 그와 적대하던 고구려와 선비족의 적국인 부여의 왕 위구태(尉仇台)에게 조카딸을 시집보내는 형태로 부여(夫餘)와 동맹을 맺는 등 외교 관계 수립에도 힘을 기울였다.

조정에서 그에게 작위를 내릴 때마다 공손도는 내가 왕인데 어찌 한()이 내리는 지위를 받겠는가며 인수를 창고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서기 204년에 공손도가 죽자 장남 공손강(公孫康)이 뒤를 이었고, 계속하여 아들 공손공(公孫恭), ()의 아들 공손연(公孫淵)에 이르기까지 전부 4대를 전했다.

위 명제 경초 2(서기 238)에 사마의(司馬懿)에게 토벌될 때까지 50여 년간 요동에서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군림하였다.

 

  그런데 삼국사기 잡지 제1 제사 조를 보면,

  “책부원구에 이르기를 백제는 연중 네 철의 중간 달마다 왕이 하늘과 5제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그 시조 구태(仇台)의 사당을 서울에 세우고 해마다 네 차례씩 제사를 지냈다고 하였다라고 중국 사서의 기록을 인용했는데, 이상했던지 주를 달아 해동고기에 의하면 혹은 시조 동명왕이라 하였고 혹은 시조 우태라 하였는데, 북사와 수서에는 모두 동명의 후손 구태가 대방에서 나라를 세웠다고 하였고, 여기에는 시조 구태라 하였는데 동명이 시조로 된 사적이 명백하므로 다른 것은 믿을 수 없다고 백제 건국시조 구태설을 부정했는데, 사실 김부식은 구태라는 인물에 대하여는 그가 누군지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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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구태(仇台)라는 인물은 과연 누구인 것일까?

  우리의 역사상식으로는 백제의 건국시조를 온조왕으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따라서 백제에서 건국시조인 온조왕의 제사를 철따라 지냈다던가 또는 온조왕의 증조할아버지이고, 졸본부여의 건국시조인 동명왕의 제사를 지냈다면 이해하기가 쉬울텐데, 구태(仇台)를 공손도의 사위라 하고, 백제의 건국시조라 하며 1년에 네 번 제사를 지냈다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백제의 건국시조 온조왕은 나라를 세우자마자 맨 먼저 그의 선조로서 졸본부여의 건국시조였던 동명왕의 사당을 세웠고, 백제왕들은 왕위에 오르면 동명왕의 사당에 고했다.

 

  우리의 역사상식으로 백제의 건국시기와 공손도의 생존시기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갸우뚱 할 수 밖에 없는 것인데, 이에는 우리가 잘 모르고 있는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

  사실 구태(仇台)라는 사람은,

  4대 개루왕의 둘째아들로서 5대 초고왕의 동생으로 추정되는 인물인데, 이때 백제에서는 이 구태에게 옛 마한의 도읍이었이었던 금마(옛 월지) 부근의 땅을 영지로 내려 주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7대 사반왕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이 구태의 손자인 차자파 8대 고이왕이 왕위를 빼앗아 9대 책계왕, 10대 분서왕까지 왕위가 이어지는데, 8대 고이왕은 왕위에 오른 후 죽은 자기 아버지(실명)와 할아버지 구태를 왕으로 추증했을 것이고, 제사도 지냈을 것이다.

 

신라 때도 왕위에 오르면 그 조상들을 왕으로 추증하였고, 고려 때도 마찬가지였고, 조선시대에도 그랬으므로 백제에서도 왕의 조상을 왕으로 추증하는 것은 당연한 절차였을 것이다.

 

  그런데 다시 장자파 7대 사반왕의 동생의 아들인 11대 비류왕이 왕위를 잇게 되고, 다시 차자파 분서왕의 아들인 12대 계왕이 왕위에 오르고, 다시 장자파 비류왕의 아들 13대 근초고왕이 남한성에서 왕위에 오르자, 차자파 계왕의 아들인 무광왕은 금마(대방고지)를 중심으로 삼아 그곳에서 스스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이때 백제는 왕실이 동쪽의 한산을 중심으로 한 장자파와,

  서쪽의 금마를 중심으로 한 차자파 두 세력이

  동서로 쪼개져 왕위를 놓고 다투는 상황으로써 내란 상태였던 것이다.

 

  그랬다가 장자파인 근초고왕이 최종 승리하자 패한 무광왕(武廣王)은 대륙을 떠나 한반도로 도망쳐 와서 다시 나라를 세우고 역시 백제(반도백제)라 하게 되는데, 이때가 4세기 중엽이었고, 한반도에서 4세기 중엽부터의 백제유물이 출토되는 이유이다.

관세음응험기 기록 속 백제 무광왕이 바로 이 사람이다.

  이리하여 세상에 두 개의 백제 즉 대륙백제와 반도백제가 동시에 존재하게 되는 상황이 되었다.

  중국 사서들에 백제에 대한 기록이 혼란스런 이유인데, 왜냐하면 대륙백제는 북조의 나라들과 교류하였고, 반도백제는 남조의 나라들과 교류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21대 개로왕 때 이르러 대륙백제의 국세가 약해지자 개로왕은 당시 반도백제 모도왕에게 두 백제의 통합을 제안하게 된다.

  그러자 모도왕은 그에 찬성하고 아들인 곤지를 대륙으로 보내 통합을 추진하던 중에, 대륙백제가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을 받아 개로왕이 잡혀 죽게되고, 도읍 한성을 빼앗기게 된다. 그리하여 문주왕이 새로 왕위에 올라 웅진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고, 다시 두 백제의 통합작업을 재개하게 된다.

  그런데 두 백제의 통합에 반대한 세력도 있었으니 바로 대륙백제 해씨들이었고, 그리하여 이들은 문주왕과 곤지를 죽여 버리고, 나이어린 삼근왕을 대륙백제의 왕위에 올리게 된다.

  한편 이 소식을 전해들은 반도백제 모도왕은 대노했고, 해씨들을 제거하고 대륙백제를 흡수통합해 버린다.

  그리고는 죽은 곤지의 둘째 아들이며, 자신의 둘째 손자인 모대(모태라고도 한다)를 대륙으로 보내 대륙백제의 왕위에 올렸는데, 이가 곧 동성왕이고, 동성왕이 백가에게 시해당하자 그 동생인 무령왕이 다시 대륙으로 건너가 난을 진압하고 동성왕의 뒤를 이어 대륙백제의 왕위에 오르게 되고, 그 이후에는 모두 구태의 후손이며 반도백제 무광왕의 후손들이 대륙백제의 왕위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자 상황이 이랬을 경우,

  차자파로서 대륙백제의 왕위에 오른 왕들은 차자파의 시조인 구태(仇台)의 제사를 지냈을 것은 쉽게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인데, 이러한 내막을 확실하게 알 수 없었던 중국 사람들은 백제의 시조가 구태라고 인식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사서에 구태가 대방옛땅에서 백제를 세웠고, 백제에서 그 시조 구태에게 일년에 네 번 제사를 지낸다고 기록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