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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한반도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은 당나라의 승전비일까?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1. 3. 09:25

윤여동설 -  한반도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은 당나라의 승전비일까? - 최초주장

 

                                       

                                   

 

 

 

 

 

 

 

 

                        

 

 

  충남 부여에 가면 부소산 남쪽에 정림사지가 있고, 그 곳에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정림사지 5층석탑이 있다.
  그 탑은 백제 시대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형되는 초기의 석탑으로서 불탑 형식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고 판단되어 국보로 지정되었는데, 그 형태가 매우 아름답고, 안정감이 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석탑의 탑신에는 글자가 빼곡하게 새겨져 있는데 이것이 백제 멸망을 기록한 논란 많은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이다.
  당나라가 백제국을 평정하고 세운 비석이라는 의미이고, 현경 5년(A.D.660) 경신년 8월 15일에 세웠다고 새겨져 있다.
  기록대로라면 이 탑은 불탑이 아니라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전승비인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 문안을 보고 서기 660년에 당나라의 소정방이 13만 당나라군을 이끌고 서해바다를 건너와 백제를 침공하여 멸망시키고 세운 탑이라고 생각하고는 국치의 표상이라 하여 그 탑을 헐어버리려 했었다고도 한다.

  그런데 실제 당나라와 신라가 연합하여 서기 660년에 멸망시킨 백제는 한반도에 있었던 반도백제가 아니라, 지금의 당산, 진황도 일원을 차지하고 있던 대륙백제였고, 당시 대륙백제의 도읍인 사비는 난하 하류 난현(난주) 부근으로 비정된다.

 

☆ 당시 반도백제의 도읍은 지금의 , 익산 금마, 충남 부여 또는 충남 공주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부여의 옛 이름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부여에서 출토된 사택지적비에 "내기성(柰祇城)"이 언급되고 있어 혹시 지금의 부여가 옛날에는 내기성으로 불리지 않았을까 추측하는 정도이다.


 
  따라서 이때 소정방은 중국 대륙에서 서해바다를 건너 한반도로 왔던 것이 아니라, 지금의 산동반도 내주만에서 서북쪽으로 항해하여 발해를 가로질러 난하 하류에 상륙하여 신라군과 기벌포에서 합류한 후 사비하(난하하류)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 당시 백제의 도읍이었던 사비(사자라고도 한다) 즉 지금의 당산시 난현(난주)을 공격하여 백제 의자왕의 항복을 받았던 것이지 한반도의 충남 부여를 공격했던 것이 아니었다. 
        

☆ 우리는 지금까지 한반도 백제의 흔적들이 삼국사기 기록 속의 백제 흔적이라고 생각했고, 삼국사기가 한반도 삼국의 역사 기록이라고 생각했으나 이는 역사적 사실과는 매우 다르다. 백제는 대륙백제와 반도백제의 두 백제가 있었다.
  이는 삼국사기에 백제의 건국지를 마한의 동북쪽, 말갈의 남쪽, 신라의 서쪽이라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한반도 백제를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중국 사서들은 한결같이 한나라 때의 낙랑군 수성현이 갈석산이 있고, 장성이 시작된 곳이라 하고, 신라가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은 피서산장이 있는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이었고, 신라의 도읍 서라벌(금성)은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일원이었으며, 백제의 도읍 사비는 난하 하류 난현(난주) 부근이었다.

  그리고 후대 삼국의 땅을 차지하고 건국된 고려 역시 발해 북쪽 대륙에서 건국되었고, 그곳에서 멸망했으며, 고려를 멸망시키고 건국된 조선 초에 이르러 대륙의 개경으로부터 한반도의 한양으로 도읍을 옮김으로서 한반도가 역사의 중심이 되기에 이른다.

     
  
  사실이 이러하다면 부여의 정림사지 5층석탑에 새겨져 있는 대당평백제국비명에 대해 의문을 가질 만 한 것이다.    
  지금까지 어느 나라에서도 전승기념비를 불탑 형식으로 세운 예는 찾아볼 수가 없다.
  불교에서 불탑은 곧 부처님의 몸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매우 신성시하는데 어떻게 정림사지 5층석탑에 부처님을 찬양하는 글이나 조각이 아닌 당나라가 백제를 평정했다는 문장이 새겨질 수 있었을까 이상한 것이다.
  이는 매우 야만적인 행위로서 아무리 승전한 장수라 하더라도 불교를 숭상했던 나라인 당나라 장군이 이렇듯 몰상식한 행동을 했을 리는 없는 것이다.
  만약 소정방이 실제 불탑에 전승기념비문을 새겼다면 정복당한 나라의 백성들이 당나라를 야만국가라고 비난하게 되어 이는 결국 황제를 욕보이는 것이 되기 때문에 소정방은 비록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하더라도 귀국 후 탄핵받을 각오를 해야한다. 소정방이 바보가 아니라면 그렇게 무모한 행동을 했을 리는 없고, 승전비를 꼭 세우고 싶었다면 크고 좋은 돌을 구해 그를 반듯하게 다듬어 글을 새겨 세우는 것이 무리도 없고, 보기도 좋았을 것이다. 
    
  국보 제9호인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의 형식은 국보 제289호인 익산 왕궁리 5층석탑과 매우 유사한데, 관세음응험기의 정관 13년(A.D.639)에 제석사에 벼락이 떨어져 불에 탔다는 기록을 감안해 추정해보면 왕궁리 5층석탑은 제석사에 불이 난 이후 석탑으로 다시 세웠을 것이다.
   그런데 석탑 조성 형식이 정림사지 5층석탑이 시기적으로 앞선다고 하니 정림사지 5층석탑은 6세기 말 또는 7세기 초에 세워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정림사지에서 태평8년(太平八年)명 기와편이 출토되었는데, 이때는 서기 1,028년에 해당되는 때이다. 아마 이때 대대적인 수리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대륙백제 멸망과 한반도 부여의 정림사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을 것이고, 불교를 신봉하던 대륙의 통일신라 때 한반도 부여의 정림사지 5층석탑 탑신에 글자를 새겼을 리도 없고, 후대 불교를 매우 숭상하던 대륙고려에서도 그러한 짓을 했을 리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조선은 대륙의 개경에서 건국되어 한반도의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고, 조선은 불교를 억제하고 유교를 숭상하게 된다.
  그렇다면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에 글자를 새길 수 있는 사람들은 불교를 억제하고 유교를 숭상하던 조선시대 사람들 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 지금 전국에 있는 석불 중 목 없는 석불 대다수는 아마 불교를 배척하던 조선시대에 잘려졌을 것이고, 무너진 석탑들도 대개 조선시대에 허물었을 것이다.  

  
  조선은 대륙의 개경(필자주 : 현 하북성 승덕시 관성현)에서 한반도 한양(필자주 : 현 한반도 서울)으로 도읍을 옮긴 후 모든 역사를 한반도를 중심으로 만들어야 했다.

  조선이 정통성이 있는 나라 즉 옛 환인, 환웅으로부터 왕검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 삼한, 삼국, 고려의 맥을 잇는 나라라고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대륙의 지명을 고스란히 따서 한반도의 비슷한 위치에 교치시키고, 고서적 수거령을 내려 옛 역사지리서를 거두어 들여 백성들이 옛 역사지리를 알지 못하도록 한 후 새로이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편찬했다.
  그리고는 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대륙에서 일어났던 모든 역사적 사실을 담되, 한반도의 지도를 붙여 그 기록들이 마치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것처럼 만들어버렸다고 할 수 있다.
  정림사지 5층석탑의 대당평백제국비명도 아마 이러한 역사왜곡의 일환으로 불탑에 글을 새겨 놓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 비문을 읽어본 사람들은 소정방이 서해바다를 건너 한반도 부여까지 왔던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이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역사 기록과도 일치하게 되어 누구나 충남 부여를 옛 백제의 도읍 사비라고 믿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의 고대 역사는 조선시대에 이미 모두가 왜곡되어 있었지 일제 강점기에 왜곡한 것이 아니다.  
  지금 정림사지 5층석탑에 새겨져 있는 대당평백제국비명은 백제가 멸망한 서기 660년에 새겨진 것이 아니라 한참 후대인 조선시대에 이르러서야 새겨졌을 가능성이 많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