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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구려와 백제는 왜 개국후 400년간 전쟁을 하지 않았을까?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1. 11. 08:43

윤여동설 - 고구려와 백제는 왜 개국 후 400년 간 전쟁을 하지 않았을까? - 최초주장

 

 

 

 

 

 

고구려의 건국년도는 기원전 37년이고, 백제의 건국년도는 기원전 18년인데, 개국이후 약 400년간 두 나라간에 한번도 전쟁이 없었다.
  그러다가 삼국사기 백제본기 13대 근초고왕 24년(A.D.369) 조에, "가을 9월 고구려왕 사유(고국원왕)가 보기병 2만을 거느리고 치양에 와서 진을 치고 군사를 나누어 민가들을 약탈하므로 왕이 태자를 보내 군사를 이끌고 지름길로 치양에 이르러 갑자기 쳐서 이를 깨뜨리고 적병 5천여 명의 수급을 얻었으며, 노획한 물품은 장병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는 기록으로부터 두 나라간 전쟁기록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16대 고국원왕 39년(A.D.369) 조에도 "가을 9월 군사 2만을 보내 남쪽으로 백제를 쳤는데 치양에서 싸우다가 우리가 패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두 나라의 역사서에 공통적으로 전쟁기록이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 백제와 고구려 간에 처음으로 전쟁을 했던 것은 틀림없다.

 

  그리고 근초고왕 26년(A.D.371) 조에는 "고구려가 군사를 동원하여 침입해 왔다. 왕이 이 말을 듣고 패하(패수) 가에 군사를 숨겨놓고 있다가 그들이 도착하자 갑자기 치니 고구려 군사가 패배했다.
  겨울에 왕이 태자와 함께 정예군사 3만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침입하여 평양성을 공격하니 고구려왕 사유(고국원왕)가 사력을 다하여 항전하다가 화살에 맞아 죽으니 왕이 군사를 이끌고 물러왔다. 도읍을 한산(필자주 : 북한산이다)으로 옮겼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급기야 전쟁 중에 왕이 죽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고,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16대 고국원왕 41년(A.D.371) 조에도 "겨울 10월 백제왕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와서 평양성을 공격하므로 왕이 군사를 출동하여 방어하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았다. 이 달 23일에 왕이 죽으니 고국원에 장사지냈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고국원왕이 전투 중에 화살에 맞아 죽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호태왕비문에 의하면 후세 396년에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침공해 아신왕으로부터 항복을 받고 58개성, 7백개 촌을 빼앗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도, 고구려 장수왕이 475년에 백제를 침공해 도읍인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잡아죽였다고 기록되어 있고, 그 후에도 백제와 고구려는 끊임없는 전쟁을 하게 된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 21년(A.D.475) 조를 보면 고구려의 장수왕이 중 도림을 간첩으로 보내 백제 개로왕을 꼬드겨 백제를 쇠약하게 만든 후 침공하여 도읍을 함락시키고 왕을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 후 백제는 문주왕이 왕위에 올라 급히 도읍을 웅진으로 옮겨 재기를 도모하게 된다.

  

  

 

그런데 고구려와 백제는 개국 시점으로부터 약 400년 동안은 전쟁 기록이 전혀 없다가  369년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인 전쟁 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두 나라는 어떻게 그 오랜 기간 동안 한번도 전쟁을 하지 않을 수가 있었을까?
  두 나라의 출자가 같이 부여이기 때문이었을까?

 

☆ 위서 백제국전을 보면, 백제의 개로왕이 위나라에 표문을 보내 "신은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선대에는 우의를 매우 돈독히 하였었는데, 그들의 선조인 쇠(고국원왕: 재위 331-371)가 이웃 간의 우호를 가볍게 깨뜨리고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신의 국경을 침략했습니다" 라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백제의 근초고왕(재위: 346- 375) 때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먼저 백제를 침공했음을 알 수 있는데, 백제와 고구려간 본격적인 전쟁의 시작은 서기369년부터였다.


 
 

고구려의 주몽왕(추모왕)이 온조왕의 어머니인 소서노와 재혼을 했던 적이 있어 백제가 고구려를 의붓아버지의 나라로 예우했고, 고구려는 백제를 계모의 나라로 인식했기 때문이었을까?

 

☆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보면, "주몽이 부여에서 용납되지 못하여 전한 건소 2년 봄 2월에 남쪽지방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으며 소서노에게 장가들어 왕비로 삼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주몽이 소서노와 혼인했었음도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데, 고구려의 주몽은 동부여에서 도망쳐 졸본부여로 온 후 졸본부여 왕의 둘째 공주와 혼인하였고, 아들이 없던 졸본부여 왕이 죽자 그 왕위를 물려받아 졸본부여의 왕위에 올랐고, 그 후 다시 연타발의 딸인 소서노와도 혼인한다. 삼국사기 기록에는 백제 시조 온조왕이 주몽과 소서노 사이에서 출생했다고도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고, 온조왕은 졸본부여 동명왕의 아들(또는 손자)이었던 우태와 연타발의 딸인 소서노 사이에서 출생했고, 주몽이 소서노와 혼인할 때 소서노는 이미 비류와 온조라는 아들 둘 딸린 과부였었다. 그런데 주몽은 소서노와 혼인한 후 비류와 온조를 마치 친아들과 같이 대했었다고 하는데, 이때 주몽의 친아들인 유리는 동부여에 인질로 잡혀 있었고, 졸본으로 도망쳐 오기 전이었다.

         
      

  그런데 이때부터 백제와 고구려간에 전쟁을 하게 된  것이 옛 낙랑(후한낙랑)땅과 대방 땅을 놓고 다투었음을 아는 이 과연 몇이나 될까?

 
[삼국 초기 각국의 위치도]

 

선비                             동부여                   말갈


현토군                          고구려                  동옥저            
 
      
요동군      후한낙랑군         대방군                            예


                                                  백제                   신라
            
                           마한

 

 

낙랑군은 기원전 108년 전한의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했던 네 군중의 하나였는데, 이때의 전한 낙랑군은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일원이었고, 진번군은 지금의 능원 일원이었다. 그리고 임둔군은 지금의 내몽골 고륜기 부근이었으며, 현토군은 내몽골 옹우특기 부근이었다.
  그러다가 기원전 82년에 이르러  진번군은 맥국이 되고, 임둔군은 예(동예)가 된다. 
  그러자 한나라에서는 진번군과 임둔군을 폐지하게 되고, 현토군을 구려의 서북쪽으로 이동시키고, 옛 현토군의 관할지를 낙랑군으로 이관하게 되는데, 낙랑군에서는 단단대령의 동쪽에 위치한 그 땅에 낙랑동부도위를 설치하게 된다.
  그 후 기원전 37년에 고구려가 졸본에서 건국되고, 기원전 18년에 백제가 마한의 동북쪽 땅인 한산 부근의 위례성(도산 남쪽)에서 건국되었다가 남한성으로 도읍을 옮기게 된다.
  그런데 서기 8년 왕망이 전한을 없애고 국호를 신(新)으로 바꾸는 혼란기를 틈타 최리가 낙랑군과 낙랑동부도위를 차지하고 국호를 "낙랑국(樂浪國)"이라 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고, 한나라에서는 광무제가 왕망의 신나라를 없애고 다시 한을 복원하게 되는데, 이 때의 한나라를 역사에서는 후한 또는 동한이라 부른다. 
  따라서 이때 최리의 낙랑국은 신나라나 한나라와 관련 없는 독립된 나라였다.   
  그러자 고구려의 대무신왕은 서기 30년에 이르러 최리의 낙랑국의 일부였을 낙랑동부도위를 먼저 쳐서 빼앗고, 다시 서기 37년에 이르러 최리의 낙랑국을 쳐 없애버리게 되어 잠깐 동안 옛 낙랑 땅 모두가 고구려의 소유가 된다.

 

☆ 후한서 예전의 "건무 6년(A.D.30)에 (낙랑동부)도위를 폐지하고 (단단)대령 동쪽 땅을 포기하고 그 거수로서 현후를 삼고 모두 때때로 조하하도록 했다" 라는 기록과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20년(A.D.37) 조의 "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이를 멸망시켰다"는 기록이 바로 그것이다.

 

  한편 신나라를 없애버리고 국내를 수습한 후한의 광무제가 이미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옛 낙랑 땅을 서기 44년에 공격하여 살수 이남 땅을 다시 되찾아 낙랑군을 부활시키게 되는데, 필자는 이를 후한낙랑군이라 부른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27년(A.D.44) 조의, "가을 9월 한나라 광무제가 군사를 보내 바다를 건너와 낙랑을 치고 그 지역을 빼앗아 군현을 만드니 살수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는 기록이 바로 이때의 상황을 기록한 것인데, 지금까지 사람들은 전한낙랑군과 후한낙랑군을 구분하지 못해 온갖 억측이 난무하게 되었었고, 기록 속의 낙랑을 한반도 평양부근으로 해석함으로서 살수를 청천강이라고도 했고, 패수를 대동강이라 하기도 했으나 이는 아주 잘못된 것으로서 후한낙랑군은 지금의 중국 북경 동쪽 하북성 승덕시 흥륭현 일원을 말하는 것이고, 고구려의 평양성은 흥륭 북쪽의 승덕시 부근이었으며, 흥륭 동남쪽의 난하 중, 하류 부근에 백제가 위치했었고, 요녕성 호로도 금주 일원에는 신라가 위치했었다.
  또한 내몽골 파림우기, 파림좌기 부근에는 속말말갈이 위치했었고, 후한 건안(A.D.196-219) 중에는 공손강이 둔유현 남쪽의 황무지에 대방군을 설치하게 되는데, 지금의 북경 동쪽 준화 부근이다.

   

  

☆ 삼국지 한전의 "(후한) 환제와 영제 말기에 한과 예가 강성하여 군, 현에서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여 군현의 많은 백성들이 한국으로 흘러 들어가자 건안 중에 공손강이 둔유현 남쪽의 황무지를 나누어 대방군으로 만들고 공손모, 장창 등을 보내 유민을 불러모으고, 군대를 일으켜 한과 예를 정벌하자 옛 백성들이 점점 돌아왔고, 그 후 왜와 한이 드디어 대방에 속하게 되었다 " 라는 기록은 바로 지금 북경 동쪽에 설치했던 대방군에 관한 기록이다.

 

 

 

그런데 지금 북경 동북쪽 고북구 부근의 후한낙랑군은 서기 313년 고구려의 미천왕에 의해 우리 땅에서 완전히 소멸하게 되고, 북경 동쪽 준화 부근의 대방군 역시 314년에 소멸하게 되어 그 땅이 모두 고구려의 소유가 되는데, 이후 고구려는 고국원왕 때 전연 모용황의 침공을 받아 환도성을 함락 당하게 되고, 태후 주씨와 고국원왕의 왕비가 포로로 잡혀가게 되고, 선왕의 유골을 탈취 당하게 되며, 도읍을 평양 동황성으로 옮기게 되는 어려운 시기를 맞게 된다.
  그러다가 서기 355년에 이르러서야 태후 주씨가 귀향하게 됨으로써 수습되고, 고구려가 영주를 차지하게 되자 연나라에서는 고국원왕에게 정동대장군 영주자사 낙랑공이라는 작위를 보내오게 된다.       
  한편 이 시기에 백제도 내란으로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앞서 백제는 8대 고이왕이 나이 어린 조카인 7대 사반왕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한 이래 장자파와 차자파 사이에 왕위 찬탈이 이루어져 차자파인 12대 계왕이 346년 9월에 죽자 장자파인 13대 근초고왕이 왕위를 찬탈하게 되었고, 계왕의 아들인 무광왕이 잃어버린 왕위를 되찾기 위해 대립하게 되고, 결국 근초고왕이 승리하고 패한 무광왕은 한반도로 도망쳐 서기 365년경 지모밀지에 도읍을 정하고 다시 백제를 건국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반도백제이다.

 

☆ 지금 한반도에 있는 백제의 흔적들은 바로 이 무광왕이 세운 반도백제의 흔적들이지 삼국사기 기록 속 대륙백제의 흔적이 아니다.

 

  이렇게 내란을 수습한 백제와 연나라와의 관계를 수습한 고구려가 이제 일전을 치룰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고구려 고국원왕이 369년 9월에 먼저 백제를 쳤으나 치양전투에서 패하게 되고, 371년에 다시 한번 백제를 쳤으나 또 패수전투에서 패하게 된다.

 

☆ 패수는 지금의 난하로서 고구려에서는 난하의 반가구수고 북쪽을 패수라 불렀다.

 

  그러자 패수전투에서 승리한 백제의 근초고왕은 그 여세를 몰아 군사를 평양성(하북성 승덕시 부근)을 향하여 진군시키게 되고, 그 전투에서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죽이게 되는 전과를 올리며 승리하게 되고, 그 여세를 몰아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요서지역으로 진출하게 된다.      
  후한낙랑군 그리고 대방군의 위치를 보면, 고구려의 평양성으로 비정되는 하북성 승덕시 부근과  백제 지역으로 비정되는 하북성 난하 중 하류,  일원의 중간 지역에 정확하게 위치한다. 
  이 말은 곧 백제와 고구려가 개국이후 약 400년 간 전쟁을 하지 않았던 것은 두 나라의 중간지역에 바로 이 낙랑과 대방이 위치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실이 이러한데도 우리는 지금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모두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사건이었다고 역사를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와 백제는 이때 지금의 중국 북경 부근에서 전쟁을 했던 것이지 한반도에서 전쟁을 했던 것이 아닌 것이다.
  이를 인식하는 것이 우리 역사를 바로 찾는 지름길이다.
  지금의 중국 북경 부근까지와 내몽골, 몽골까지가 우리의 옛 땅이었는데, 그를 알려줘도 모르니............